박근혜 대통령은 뭘 믿고 버티나
#장면 1. 2008년 6월10일 ‘100만 촛불대행진’이 있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가 정점을 이룬 날이었다. 그 직후 ‘이명박 청와대’는 촛불집회에 참가한 단체들과 배경에 대해 다양한 조사 및 분석을 진행했다. ‘촛불 세력의 핵심은 노사모’라는 결론을 내리고 물적 토대를 허물기 위한 대반격을 시작했다. 7월30일 국세청은 태광실업에 대한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재계 순위 600위권의 경남 김해에 있는 태광실업을 조사하기 위해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이 동원됐다. 그해 12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 노건평씨가 구속됐다. 이 수사는 이듬해 5월23일 노무현 대통령이 비극적인 죽음을 택하면서 끝났다.
#장면 2. 2016년 11월12일 ‘100만 촛불집회’가 있었다. ‘최순실 국정 농단’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찌른 날이었다. 국민들의 퇴진 요구에 직면한 ‘박근혜 청와대’는 다양한 분석과 예상 시나리오들을 구상했다. 반격이 시작됐다. 11월16일 박 대통령은 김현웅 법무부 장관에게 “엘시티 비리 사건에 대해 가능한 수사 역량을 총동원해 신속, 철저하게 수사하고 진상을 명명백백하게 규명해 연루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단하라”고 지시했다. 엘시티 비리 사건과 관련해선 이미 여야 정치인들 다수가 연루됐다는 각종 루머가 제기되는 상황이었다. ‘게이트’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규모가 크다는 말도 심심찮게 나왔다.
버티면서, 지지층 모으고, 이슈 분산 전략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이 터지면서 궁지에 몰렸다. 자신 또한 깊이 연루된 정황이 여기저기서 드러났다. 단순한 연루가 아니라 스스로가 ‘몸통’이라는 의혹이 확산했다. 과거 정권의 친인척 비리 사건과 결이 달랐다. 비판이 비등하자 당연히 풀이 죽었다. ‘지지도 5%’로 상징되는 국정 운영의 마비가 현실화됐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민심을 수용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세 가지 전략을 가동하며 위기 탈출을 꾀하고 있다. 우선 버티기다. 임기를 마치겠다는 의지를 뚜렷이 하고 있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하야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대통령도 그럴 뜻이 전혀 없어 보인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시사저널 인터뷰에서 말한 대로 “5000만이 시위해도 절대 안 물러날 것”이라는 전망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늘었다. ‘2선 후퇴’와 관련해서도 이미 “도대체 2선이 어디까지인가. 헌법을 넘어서기는 어렵다”는 말이 나왔다. 헌법에 규정된 국무위원 임명제청권과 각료해임권을 국무총리가 제대로 행사하는 것 이상의 권한을 총리에게 줄 수는 없다는 얘기다. 정치적으로 ‘2선 후퇴 선언’을 할 생각은 없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박 대통령이 계속 버틸 경우 국회가 정치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탄핵이다.
애초 “검찰 조사를 성실히 받겠다”던 대통령은 “변론 준비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변호인의 말을 내세우며 뒤로 숨었다. 최순실씨를 기소하기에 앞서 대통령을 반드시 조사해야 한다는 검찰의 요구는 거부됐다. 검찰은 박 대통령을 ‘최순실씨와 관련된 각종 의혹의 중심’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외교부와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임명, 국무회의 주재 및 한·중·일 정상회의 참석 저울질 등의 뉴스도 흘러나온다. 박 대통령은 날씨도 추워지는 만큼 일단 버티면서 시간을 끌다 보면 국면을 바꿀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고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는 고정 지지층 결집이다. 최근 청와대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대통령님을 위해 기도하겠다” “흔들림 없이 국정을 살펴달라”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정홍원 전 국무총리는 11월17일 언론에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을 배포했다. 그는 “지금 진실 규명 작업이 한창인데도 진상이 드러나기도 전에 보도를 통해 모든 내용이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그렇게도 금기시하는 마녀사냥이 아니고 무엇이겠냐”고 주장했다.
친박계 인사들도 격한 어조를 써가며 조직적으로 세 결집에 나섰다. 오히려 공격적이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한마디로 헌법에 대통령 지위 권한을 가진 분을 여론 선동을 통해 끌어내리겠다고 하는 것은 헌법에 의한 재판이 아니라 인민재판식이다”고 주장했다. 조원진 최고위원은 “추미애 대표가 영수회담을 제안했다가 취소하는 과정을 보면서 민주당보다 더 힘 있는 배후세력이 누군지 궁금하다.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헌정 중단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던 좌파시민단체가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김진태 의원은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지게 되어 있다”는 말도 했다. 친박계를 중심으로 고정 지지층을 모으고 전열을 정비하기 위한 움직임을 본격화한 것이다.
중심 못 잡는 야당에 대한 비판도 상승 중
‘박사모(박근혜 대통령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조한기 민주당 의원은 자신의 SNS에 “십알단 부활하고 박사모가 조직적으로 움직입니다. 엘시티 문재인 실검 2위까지 올리고 1위 올리겠다고 자랑합니다. 문재인 대표 측은 형사고발 포함, 강력히 대응하겠답니다. 증거들을 하나씩 잡아내야 합니다. 이참에 공작정치도 보내 버립시다”라는 글을 올렸다. 이에 대해 정관용 박사모 회장은 “박사모 지도부는 엘시티 루머와 관련, 조직적으로 움직인 바 전혀 없다.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자는 반드시 법적으로 조치할 것임을 천명한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과 친박계는 새누리당이 분열하지 않고 고정 지지층을 다시 끌어모을 수 있다면 이 위기 국면을 어느 정도 넘어갈 수 있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그러면서 내년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귀국하는 등 정치 지형의 변화가 일어나면 그 속에서 활로를 찾을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세 번째는 이슈 분산 전략이다. 지금은 모든 이슈가 ‘최순실 국정 농단 의혹’에 쏠려 있다. 국민의 관심을 낮추기 위해선 이슈를 분산시켜야 한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주목된 것은 부산 엘시티 비리 사건이다.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이 11월16일 “박 대통령이 수사 역량을 총동원해 신속·철저하게 수사하고 진상을 명명백백하게 규명해 연루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단할 것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언론은 ‘엘시티 게이트’라고 부르며 관련자인 이영복 회장의 비자금 규모와 용처 등에 대해 보도하기 시작했다. SNS에는 관련 의혹이 있는 정치인들의 이름이 돌아다닌다. 청와대는 “대통령이 이 사건에 직접 연관성이 있는 것처럼 의혹이 제기됐다. 근거 없는 의혹 제기에 대한 혼란을 막기 위한 것이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사건이 이슈화하는 것 자체가 국민 여론을 분산시키는 데 일정 효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11월28일 발표 예정인 국정교과서 현장 검토본 공개 등도 이와 관련해 주목된다.
박 대통령의 버티기, 고정 지지층 잡기, 새 이슈 던지기는 민심 흐름과는 한참 거리가 있다. 중심을 잡지 못하는 야당에 대한 비판도 높아가고 있다. 마음 둘 곳 없는 국민의 울분 게이지는 자꾸 높아간다. 이것이 어떻게 표출될지는 아무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