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타임’ 놓칠세라…연금 개혁 고삐 쥔 尹 정부
“前과는 다르다” 자신감에도 정부안 대폭 수정 불가피
연금 개혁 대장정의 막이 올랐다. 신호탄을 쏘아올린 건 윤석열 정부다. 윤석열 정부는 9월4일 21년 만에 처음으로 연금 개혁 정부 단일안을 내놓았다. 쟁점 사안이 다수 포함됐기 때문에 정부안을 발표했다고 해서 국회 통과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부안을 마련한 것만으로도 진일보한 것”이란 평가를 받는다.
이번 연금 개혁에는 ‘지금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함도 따라붙었다. 1988년 국민연금이 첫 시행된 이래 현재까지 개혁에 성공한 사례는 2007년 노무현 정부 때가 마지막이다. 그사이 세계 유례없는 속도의 고령화로 기금 고갈 시점은 더욱 가까워졌고, 더 이상 개혁을 미룰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윤석열 정부는 연금 개혁 ‘골든타임’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윤석열 정부 연금 개혁, 과거와 뭐가 다를까
윤석열 정부가 연금 개혁과 관련해 꾸준히 드러낸 메시지는 “과거 정부와 다르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이 거론된다. 보건복지부는 5년마다 종합운영계획을 내놓는다. 통상 60쪽 남짓으로, 각 정부의 국민연금 운용 청사진이 담긴 문서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18년 제4차 종합운영계획 분량은 66쪽, 2013년에는 42쪽, 2008년에는 60쪽이었다.
그에 비해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10월 5704쪽 분량의 제5차 종합운영계획을 제출했다. 종합운영계획 83쪽에 더해 각종 참고자료를 덧붙였다. 대국민 설문조사, 재정계산위 회의록, 해외 연금제도 분석 등에 대한 상세 설명이 담겼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이전에는 종합운영계획에 참고자료까지 제출한 사례는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만큼 정부 의지가 강하다는 얘기다.
윤석열 대통령 스스로도 이에 대해 자신감을 드러냈다. 윤 대통령은 8월29일 국정브리핑에서 “과거 정부에서는 연금 개혁은 표가 깎이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종합운영계획을 얇은 자료집 하나만 형식적으로 내왔지만, 저는 대선 때부터 연금 개혁에 대한 충실한 자료를 내겠다고 말씀드렸다”고 자평했다. 해당 자료는 윤석열 정부표 연금 개혁 정부안의 밑바탕이 됐다.
연금 개혁은 정부로선 ‘독이 든 성배’를 드는 것과 같다는 평가를 받는다. 해외 사례를 볼 때, 연금 개혁은 정권 교체의 결정적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프랑스 마크롱 정권이 대표적이다. 마크롱 정부는 지난해 연금 개혁을 단행했다가 대규모 폭동을 맞닥뜨렸고, 올해 선거에서 원내 1당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니카라과도 2018년 연금 개혁안을 발표했다가 30명 넘게 숨지는 유혈 사태를 촉발한 뒤 결국 개혁안을 철회한 바 있다.
‘더 내고 덜 받는’ 현실 보완…구조 개혁 병행
이 같은 부담감 속에서도 윤석열 정부가 연금 개혁의 고삐를 쥔 데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절박한 인식이 조성됐기 때문이다. 한국의 급속한 고령화로 2050년에는 국민연금 수급자 수가 가입자 수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돈을 내는 사람보다 받는 사람이 더 많아진다는 뜻이다. 현재 1000조원 규모에 달하는 기금 잔액이 0원으로 소진되는 시점도 2055년으로 당겨졌다. 기존 문법으로는 기금 고갈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됐다는 얘기다. 여권에서 연금 개혁 논의를 주도하는 관계자는 “여론이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개혁을 꼭 성사시키겠다는 의지도 강하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연금을 지속 가능하게 하려면 ‘더 내고 덜 받는’ 현실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 사회적 합의를 통해 보험료율(내는 돈)을 늘리되, 다양한 부수 장치를 도입해 소득대체율(받는 돈, 가입기간 평균 소득 대비 연금 수령액 비율)은 최대한 건드리지 않는 게 목표다. 구체적으로 현행 9%인 보험료율을 2040년까지 13%로 올리고, 소득대체율은 올해 수준인 42%를 유지한다.
이를 위해 새로운 시도를 도입한다. 자동조정장치가 대표적이다. 자동조정장치는 최근 3년 평균 가입자 수와 기대여명 증감률에 따라 연금 수급액을 자동 조정하는 방안이다. 이 장치 도입 시 물가상승률을 현행보다 덜 반영하게 돼 연금액의 실질적 가치가 깎일 수 있지만, 기금 고갈 시점은 최대 30년가량 늘어난다는 게 정부 추산이다.
내는 돈을 세대별로 차등화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50대는 향후 4년간 보험료율을 매년 1%포인트씩 올리고, 20대는 16년에 걸쳐 매년 0.25%포인트씩 천천히 올려 청년층의 보험료 부담을 덜어주는 게 핵심이다. 모두 학계에선 도입 논의가 있었던 주제지만, 정부안에 공식적으로 포함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논의의 틀도 확장하기로 했다. 기금 고갈 문제를 막기 위해 모수를 조정하는 것과 동시에 퇴직연금과 개인연금으로 이어지는 연금의 3층 구조 전반을 들여다보기로 한 것이다. 국민연금의 낮아진 소득대체율을 보완하기 위해 퇴직연금과 개인연금을 구조 개혁해 활성화하는 방안이 담겼다. 박근혜 정부 당시 공무원 연금 개혁을 추진했던 이근면 초대 인사혁신처장은 시사저널에 “종전까지 연금 개혁 논의는 더 내고 덜 받자느니, 덜 내고 더 받자느니 이런 얘기만 있었는데 (윤석열 정부가) 고통 분담이라는 아주 좋은 사회적 어젠다를 갖고 나온 것은 맞다. 진일보한 조치다”고 평가했다.
“논의의 출발점 제시한 데 의미 있어”
그러나 개혁 논의의 틀을 확장시킨 만큼 난항이 예상된다. 당장 국민연금을 얼마나 더 내고 얼마나 돌려받을지에 대한 숫자도 합의하지 못한 상태라서다. 기초적인 합의도 되어 있지 않은데 구조 개혁까지 추진하는 것이 만만치 않을 것이란 관측이다.
실제 지난 21대 국회에서는 여야가 각각 소득대체율 43%, 45%를 주장하면서 대치하다가 최종 협상을 결렬시킨 바 있다. 또 당시 국회 연금개혁특위 산하 공론화위원회에서 각계로 구성된 시민참여단의 다수는 ‘명목 소득대체율 50%·보험료율 13% 인상’안을 택했다. 윤석열 정부안과는 괴리가 큰 셈이다. 당장 연금 개혁 논의의 카운터파트인 더불어민주당은 정부안에 대해 “마지못해 내놓은 안”이라며 “21대 국회에서 어렵게 합의한 안을 짓밟아버리는 수준의 정부안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평가절하했다.
이 때문에 정부안 수정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구조 개혁안은 후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부 관계자 전언을 종합하면, 당초 퇴직연금의 수익성 강화를 위해 국민연금에 운용을 맡기는 안도 고려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이번 정부안에는 퇴직연금의 단계적 의무화 등의 조치만 담겼다. 이마저도 목표 시점은 제시되지 않았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은 “정부안에 구조 개혁 방안은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구조 개혁이 어렵다는 것을 정부가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공을 넘겨받은 여권도 정부안 수정 가능성을 닫아두지 않는 입장이다. 국민의힘 연금개혁특위 위원장을 맡은 박수영 의원은 “정부안은 정부안이고 논의의 출발점을 제시한 데 의미가 있다”며 “최종 결정 권한은 입법 사항이기 때문에 여야 간 충분한 숙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구조 개혁이나 자동조정장치 도입 등 논쟁 사안을 배제하고 모수 조정만 우선 합의하는 식으로 국회 논의가 전개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