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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22화 - 원산총파업 90주년
막일꾼들의 눈물겨운 '5전'에 담긴 상호부조 정신 되짚어 볼 때

며칠 뒤면 일제 강점기 최대의 노동항쟁인 원산총파업 90주년을 맞는 날이다. 1929년 1월 13일에 일어난 이 파업은 4월 6일까지 무려 80여일 동안 한반도 이북의 항구 도시를  완전히 마비시켰다. 당시 신문 기사는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는 파업 노동자 떼와 그 뒤를 쫒는 순사 떼가 자못 험악한 분위기를 내며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돌발될지... " 라며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을 전했다. 서슬 퍼런 식민통치 하에서 어떻게 이토록 장기적인 파업이 지속될 수 있었을까? 원산총파업은 영국 석유회사 '라이징선'의 제유소에서 고타마란 일본인 감독이 조선인을 게으르다고 구타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에 일본인보다 '2시간 더 일하고 임금은 30%나 덜 받는' 조선인 노동자 200여 명의 분노가 폭발했다. 이들은 감독관 처벌과 함께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수용하는가 싶었던 회사 측이 시간을 끌다가 3개월 후 협약을 파기했다. 그러자 이 회사 노조가 소속된 '원산노동연합회'는 단체교섭권, 8시간 노동제 등을 내세우며 산하 조합원 2200여 명에게 총파업 명령을 내렸다.  

술 끊고 하루 5전씩 모아 항쟁의 신화를 만들다

다급해진 일제는 합법적인 파업을 불법으로 몰아 모든 집회를 금지시키고 파업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또 일본인 자본가 집단인 원산상업회의소는 '파업깨기꾼'을 동원하고 함남노동회라는 어용노동단체를 만들어 '노노갈등'을 부추겼다. 그럼에도 시위가 수그러 들지 않자 일경은 도내 경찰병력과 400여 명의 일본인 제대군인, 소방대원, 청년단원들을 총동원해 무력 진압을 시도했다. 이에 맞서 시위대는 폭력을 자제하고 대오를 유지하며 끈질기게 버텨 나갔다.
원산노동연합회와 오른쪽은 총파업 당시 모습 ⓒ 이원혁 제공
원산노동연합회와 오른쪽은 총파업 당시 모습
3.1운동 이후 민족의식이 고조되면서 농민, 노동자, 학생, 여성 등 각 계층에서 조직적인 민중운동을 펼쳤다. 원산의 부두 노동자들은 1921년 원산노동회를 만들었는데, 이 단체는 4년 후 운송, 제화, 양복, 인쇄 노조 등을 통합해 지역 최대의 '원산노동연합회'로 발전했다. 그 무렵 부두 하역 노동자들의 평균 일당은 1.4원으로 인력거꾼의 2.3원이나 칠쟁이의 2.1원 보다 훨씬 낮았다. 이처럼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처지였지만 이들은 일당에서 5전씩 떼어 파업 기금을 차곡차곡 마련해 두었다. 총파업 때는 노조원들에게 금주령을 내려 내부 결속을 다지기도 했다. 이런 단단한 조직력과 기민한 대응이 장기간의 투쟁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일본인도 응원했던 원산총파업

흥미를 끄는 점은 일부 일본인들도 이 파업을 응원한 사실이다. 그 당시 원산 제2 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항일 투쟁가 김학철(1916~2001)은 "원산항에 정박한 일본 배들이 일제히 기적을 울리며 조선 노동자들의 시위를 응원했다. 무장경찰들은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서 당황한 반면 파업 노동자들은 난데없는 '뱃고동 응원'에 크게 고무되었다"라고 회고했다. 이런 '희한한' 광경을 목격한 탓에 그는 훗날 일본군과 교전 중 총상을 입어 한쪽 다리를 잘라내고도 "일본은 미워하되 일본인을 미워하진 않는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원산총파업이 장기화되자 전국 각지에서 성금과 식량이 쇄도했다. 해외에서도 프랑스, 중국, 소련 노동자들이 이 파업을 격려하고 후원했고 일본의 관동 노동지회와 금융노조도 지지 모금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지도부가 대부분 검거되고 노동자와 가족들의 생계가 위협받는 상황에 이르자 원산노동연합회는 '자유 취업'을 결정하고 파업 종결을 선언했다. 당초 요구를 관철시키진 못했지만 이 파업은 조선 노동자들의 의식을 크게 각성시켜 이후 봇물 터지듯 쏟아진 노동쟁의의 '마중물' 역할을 했다. 원산총파업 6개월 후인 1929년 10월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은 세계 경제를 뒤흔들었고 식민지 나라에는 더 큰 충격을 주었다. 영국의 식민지 미얀마에서도 1938년 1월 영국 BOC 석유회사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이들은 임금 삭감 철폐와 연간 30일의 휴일 보장 등 12가지 요구 조건을 제시했지만 사측은 대화 조차 거부했다. 분노에 찬 노동자들은 "식민 자본의 착취와 악행을 전국에 알리자"면서 양곤까지 시위 행진을 펼치기로 했다. 회사가 위치한 마구에 지역에서 양곤까지는 600Km가 넘는 거리였다.
석유노동자 시위 행진과 폴라지. 오른쪽은 지금도 재래식으로 원유를 추출하는 미얀마 유전 모습 ⓒ 이원혁 제공
석유노동자 시위 행진과 폴라지. 오른쪽은 지금도 재래식으로 원유를 추출하는 미얀마 유전 모습 ⓒ 이원혁 제공
이들을 이끈 알라워카 다킨 폴라지(1899-1943)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영국군에 입대해 중동지역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하지만 원체 '반골' 기질을 타고난 터라 본국과 식민지 출신 병사의 차별 대우에 항의하다가 몇 차례 영창 신세를 지기도 했다. 폴라지는 군 복무 3년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당시 영국은 식민지 출신 군인에게 참전의 대가로 토지를 무상 지급했다. 그러나 그는 "내 나라 땅을 영국이 마음대로 나눠줄 순 없다"면서 이를 거부하고 석유추출 공장에 노동자로 들어갔다. 마침내 1938년 11월 30일 폴라지가 이끄는 석유 노동자 2000여 명의 행진이 시작됐다. 약 두 달만에 양곤에 도착한 시위대에 양곤 대학생과 고등학생 7000여 명이 가세하면서 사태가 악화됐다. 양곤대 학생대표인 보아웅저가 경찰의 곤봉에 맞아 현장에서 즉사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그의 룸메이트인 아웅산은 무력항쟁에 나서 민족독립군 BIA를 만들었다. 얼마 후 독립군은 시위 주동자로 체포된 폴라지를 감옥에서 빼냈다. 탈옥한 폴라지는 '농성 전쟁'이란 책을 펴내는 등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1943년 미얀마 최초의 노동조합인 '척 석유노조'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공교롭게도 미얀마 시위와 원산 총파업은 모두 영국계 석유회사에서 일어났다. 두 파업의 성격 또한 당시 전세계를 휩쓴 계급투쟁적 운동이라기 보다 임금 삭감이나 비참한 노동현실에 저항한 '생존권' 투쟁에 가까웠다. 대규모 시위로는 드물게 비폭력 행동을 조직적으로 펼친 점도 닮았다. 여기에다 두 나라의 반식민 역사에 커다란 분수령을 이룬 사건이란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석유 노동자 시위는 8년 뒤 아웅산 장군이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발판이 되었다. 원산총파업도 노둥자들에게 합법적인 노동투쟁의 한계를 분명히 각인시킴으로써 이후 비합법적, 폭력적인 '적색노동투쟁'을 통한 항일운동이 전개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90년 전, 우리 의료보장의 역사를 쓴 '막일꾼들'

비록 원산총파업은 실패로 끝났지만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사실도 있다. 파업을 지휘한 원산노동연합회가 노동자 전문병원을 세운 일이다. 이 단체는 1928년 경성에서 의사 2명과 간호사, 약제사들을 초빙해 '노동병원'을 열고 2000명이 넘는 노조원과 그 가족들에게 '무료 진료' 혜택을 제공했다. 물론 이 전에도 노동자를 위한 의료 서비스가 없진 않았지만 대부분 시혜를 베푸는 '진찰소' 수준이었다. 이처럼 노조원들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조성하고 상시로 병원을 운영한 일은 원산 노동병원이 사실상 최초로 여겨진다.
노동병원 모습. 그당시 의원과 병원은 혼용되었다. 오른쪽은 1920년대 원산 부두 하역 모습 ⓒ 이원혁 제공
노동병원 모습. 그당시 의원과 병원은 혼용되었다. 오른쪽은 1920년대 원산 부두 하역 모습
아쉽게도 총파업의 여파로 2년 만에 병원 문을 닫게 되었지만, 일제 강점기에 노동자들이 스스로 '의료보장'의 역사를 만들어 낸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더군다나 총파업 지도부가 조금의 부정도 저지르지 않은 사실은 이 항쟁의 의미를 더한다. 일제가 탄압의 빌미를 잡으려고 경리장부를 샅샅이 뒤졌지만 단 한 푼도 유용한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런 지도부의 도덕성과 노동자들의 삶에 실제로 도움을 주는 의료 공제(共濟) 서비스 또한 장기간의 파업을 추동한 힘이 됐을 터다. 90년 전 항구도시 원산에서 일어난 일은 2019년 새해 최저임금제 논란에 휩싸인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한다. 막일꾼들의 눈물겨운 '5전'에 담긴 상호부조의 정신을 되짚어 본다. 가뜩이나 영세한 사업장에서 노동자와 사업자가 임금 갈등을 일으키게 되는 방식이 아닌 둘 다 사는 '덧셈의 노동'은 없을까. 저임금 근로자들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 노동공제 제도를 널리 장려하고 국가와 지자체가 이를 적극 돕는 정책을 펴는 것도 그 중 하나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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