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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문재인 대통령과 위안부 할머니들

올해 노벨평화상은 전시 성폭력을 고발하고 피해자를 치유하는 데 생을 바친 인물들에게 돌아갔다. 문학상 수상자가 없었다는 사실과도 연결되어, 한층 마음이 고양된다. 문학상은, 심사를 맡은 스웨덴 한림원과 관련된 성범죄를 한림원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 다른 위원들과 사무총장까지 사직해 버리는 일이 생겼고, 이에 대해 사죄 반성하는 의미에서 수상자를 발표하지 않기로 한 탓이었다. 수상 예정자에게 의혹이 제기된 것이 아니어서 다행이지만,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있었고 문단 권력자들이 폭로·고발을 당하는 등의 일들이 일어났던 우리나라는 아마도 굉장히 오랫동안 노벨문학상에는 추천명단을 못 올릴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세상은 참 느리지만 좋아지고 있나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발표되는 오후 여섯시 나는 은근히 발표를 기다렸다. 혹시 전쟁을 종식시켜 항구한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어려운 도정에 나선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이 수상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험이 사라진다는 것은 인류가 3차 세계대전에 휘말릴 위험이 정말 많이 줄어든다는 뜻이므로, 당연히 기대했다.

 

1월4일 문재인 대통령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초청 오찬에 참석하는 할머니들을 청와대 본관 앞에서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 청와대제공


 

모든 전쟁에서 성폭력은 전쟁무기로 사용된다. 그만큼 전쟁이 벌어지는 곳에는 성폭력이 있다. 때로 군인의 사기진작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때로 적군의 사기를 꺾고 직접 피해를 입히려는 의도로. 심지어 지속되는 고통과 비참을 적에게 안김으로써 승리를 오래 즐기기 위하여. 성폭력이 전쟁의 부산물이 아니라 전쟁의 목적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전쟁의 다른 얼굴인 성폭력, 이 현장에서 싸워온 두 사람이 평화상 수상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평화의 개념이 좀 더 구체적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긴 한데, 수상자를 알게 된 뒤 나는 기쁘면서도 다른 의미에서 서운함이 들었다. 전시 성폭력에 맞선 사람들이 수상자가 될 수도 있었다면,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이 그 첫 번째 수상자가 되었어야 하지 않나 싶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복동 할머니는 추천되었으나 공동 수상자가 되지 못했다는 후일담도 들었다. 마음이 좀 복잡해졌다. 유엔 인권위원회가 아니라 노벨상 위원회의 결정은, 인류를 선도하기보다는 인류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에 가깝다. 별 근거 없는 짐작이지만, 아프리카나 중동 같은 세계의 타자들이 노벨평화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들이 ‘멀리’ 있는 이웃이어서가 아니었을까. 분쟁, 기아, 살육 이런 말들은, 저기 아프리카 대륙이라든가 ~스탄 자가 붙은 나라들의 문제일 땐 모든 사람을 인도주의자로 만들 수 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싸움은 우리에게뿐 아니라 세계인들에게도 너무 가깝다. 위안부가 “제 발로” 갔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는 아직도 평화가 아니라 전쟁과 관련된 이익의 목록 위에 있고, 그 군국주의 일본은 군대도 아닌 자위대가 제국주의 시절의 욱일승천기를 달고 세계의 바다를 누벼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나라다. 우리나라 내부에도 욱일기는 안 되지만 위안부는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민족의 딸’이 아니라 여성이 성폭력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데 한국 ‘민족’이 동의할 때 평화도 오고 노벨상도 올 거라는 덧없는 생각을 잠시 해 본다. 

 

이래저래 올해의 노벨상은 성폭력 없는 세상을 향한 큰 걸음을 내디뎠다. 인류 최후의 전쟁은 아마도 성폭력과의 전쟁이 될 것이다. 일상에서의 성폭력이야말로 여성의 나날을 전쟁으로 만드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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