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변호사·사업가·고위관료 실종 잇따라…中 의법치국의 어두운 이면
지난 10월15일 중국 언론은 홍콩 출신 월드스타 저우룬파(周潤發·주윤발)의 발언을 일제히 보도했다. 저우는 영화 홍보차 대만 타이베이를 방문한 자리에서 “전 재산인 56억 홍콩달러(약 8040억원)를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2010년부터 저우는 “재산의 99%를 기부하겠다”고 약속해 왔다. 그날 이 약속을 다시 확인한 것이다. 저우는 1980년대 영화 《영웅본색》 시리즈로 한국에 잘 알려진 홍콩 톱스타다. 최근까지 중화권과 할리우드를 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중국 언론매체는 “그는 진정한 다거(大哥·큰형님)”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일부 언론은 탈세 혐의로 물의를 일으킨 중국 인기 여배우 판빙빙(范冰冰)과 비교했다. “어떤 이는 돈을 벌어서 탈세하고, 어떤 이는 돈 벌어 사회에 공헌한다”고 지적했다. 이 소식은 곧 중국 온라인을 달궜다. 각 포털사이트의 관련 기사에 수만 개의 댓글이 달렸다. 저우의 ‘56억 홍콩달러 기부’ 소식이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 한데 중국 네티즌들 반응은 사뭇 달랐다. “연예인은 정말 돈을 엄청나게 버는구나” “중국 사회복지기관에는 기부하지 말라” “세금 내는 걸 피하기 위한 방법일 것” 등 각양각색이었다.
판빙빙은 중국에서 몸값이 가장 높았던 여배우다. 1998년 드라마 《황제의 딸(還珠格格)》로 데뷔했다. 한때 “중국에서 얼굴이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손꼽혔다. 동시에 영화·드라마·CF 등을 넘나들며 엄청난 출연료를 벌어들였다. 그러나 지난 6월 중국 국영 CCTV의 인기 MC인 추이융위안(崔永元)이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에 판의 탈세 의혹을 폭로했다. 추이는 “판이 4일간 드라마에 출연해 6000만 위안(약 98억원)의 출연료를 받았는데, 이중계약서를 작성해 이를 은닉했다”고 주장했다.
135일 만에 모습 드러낸 판빙빙
추이의 폭로 이후 판이 운영하는 엔터테인먼트 회사인 판빙빙공작실은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주장”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하지만 며칠 뒤 판은 공식 석상에서 사라졌다. 활발하게 팬들과 접촉했던 SNS는 물론이고 자택과 공작실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심지어 7월말부터 공작실에는 직원들마저 출근하지 않았다. 이처럼 판의 돌연한 ‘실종’은 곧 해외를 떠들썩하게 했다. 중화권 매체는 “판이 관계당국에 감금당해 조사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판빙빙의 갑작스러운 실종은 해외에서 “판이 탈세 사건 외에 중국 최고위층과 연루돼 사라진 게 아니냐”는 의문마저 불러일으켰다. 한때는 “판이 미국에 망명하기 위해 입국했다”는 목격담까지 떠돌았다. 한국 포털사이트에서도 판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에 여러 차례 올랐다. 이에 대해 중국 언론매체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지난 수개월 동안 중국인들 사이에서 판의 구속설·망명설 등 온갖 루머가 회자됐다.
넉 달 만에 논란은 마무리됐다. 지난 10월3일 중국 세무총국이 “판이 이중계약서를 작성해 여러 차례 탈세를 자행했다”고 발표하면서 모든 의혹을 잠재웠다. 세무총국은 판과 관계회사에 벌금 5억9500만 위안, 미납 세금 2억8800만 위안 등 총 8억8394만 위안(약 1437억원)을 내라고 고시했다. 그제야 중국 언론은 판의 행적을 보도했다. 판이 지난 8월부터 소유한 아파트 41채를 급매물로 팔아 납부금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아파트는 시가보다 30% 싸게 내놓았지만, 매물 가치가 10억 위안(약 1630억원)에 달했다. 또한 판의 재산이 50억~60억 위안으로 납부금을 내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추정했다. 세무총국의 발표 직후 판은 SNS를 통해 반성문을 공개하며 사과했다. 10월15일에는 135일 만에 베이징공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후폭풍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판의 탈세 의혹을 제기한 추이융위안이 “판을 비호하는 관계당국에 조사받았다”고 폭로했기 때문이다. 10월7일 추이는 “상하이(上海)공안국 경제정찰대에 무려 세 차례나 소환당해 보복성 조사를 받았다”며 “이번 판의 사건은 연예계 실력자와 상하이 권력기관 책임자도 관여돼 있다”고 웨이보에 썼다. 10월10일에는 미국에 도피한 부동산 재벌 궈원구이(郭文貴)가 “판이 왕치산(王岐山) 국가부주석과 관련 있다”고 주장했다. 궈는 “판과 왕의 섹스 비디오를 봤다”면서 “판은 유력 사업가가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알선해 줘 거액의 수수료를 챙겼다”고 말했다. 왕치산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최측근이자 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를 지냈던 권력자다.
의법치국? 시진핑의 공허한 외침
이번 사태의 이면엔 중국 관계당국의 대응 문제가 있다. 정해진 법과 절차 없이 판을 ‘실종’시켰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 사건은 중국 연예인의 천문학적인 출연료와 연예계에 횡행했던 탈세가 배경이었다. 중국에선 “한 번 뜨면 3대가 먹고살 돈을 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인기 연예인이 높은 출연료를 받는다. 관계당국은 대중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을 고려해 여러 차례 출연료 상한선을 제시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연예인은 이중계약을 요구해 왔다. 연예계의 온갖 비밀을 알고 있는 추이융위안이 개인적인 원한이 있던 판빙빙을 겨냥해 이를 폭로했던 것이다.
판의 실종 사태 과정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끌다가 사라진 장웨이제(張偉杰)까지 다시 주목을 받았다. 장웨이제는 ‘다롄TV’ 아나운서로 일했는데, 당시 다롄시장이었던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重慶)시 당서기와 내연 관계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1998년 임신 8개월 상태에서 갑자기 사라졌고, 지금까지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중화권 언론은 장의 실종 배후로 보의 부인인 구카이라이(谷開來)를 지목했다. 보의 불륜을 알게 된 구가 장을 납치해 살해했을 거라는 의혹이었다. 구는 2011년 내연남이던 영국 사업가 닐 헤이우드를 독살했다. 그 사실을 왕리쥔(王立軍) 당시 충칭시 공안국장이 인지해 조사하다 보의 질책을 받았다. 2012년 2월 왕이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의 미국 총영사관에 가서 망명을 신청하는 사건을 일으키면서 모든 일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결국 보는 실각했고 구도 살인죄로 구속됐다. 구가 장을 살해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가 없다.
최근에는 인권변호사, 사업가, 고위관료 등의 강제 실종도 잇따르고 있다. 그들이 끌려가는 장소는 경찰서나 검찰청의 조사실이 아니다. 한 인권변호사는 홍콩 언론에 “알 수 없는 건물에 검은 커튼이 드리운 방에서 외부와 연락이 완전 단절된 채 24시간 감시당했다”고 폭로했다. 물론 중국도 형법이 있다. 엄연히 범죄 혐의자를 조사하고 인신을 구속하는 절차가 있다. 현실은 전혀 다르다. 시진핑 주석은 틈만 나면 의법치국(依法治國)을 부르짖는다. 중국 언론은 “누구든 법 앞에 평등하다”고 강변한다. 절차와 인권을 무시하는 상황엔 눈감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