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투 감독의 눈도장 받은 대표팀 새 기둥은?
10월 A매치 2연전에서 파울루 벤투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은 내용과 결과를 모두 잡았다. 10월12일 6만4000여 명의 만원 관중이 모인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FIFA 랭킹 5위의 세계적인 강호 우루과이를 상대로 2대1로 승리했다. 아내 출산 문제로 빠진 루이스 수아레스를 제외하면 핵심 멤버가 총출동한 우루과이는 그동안 한국이 한 번도 승리하지 못한(1무6패) 난적이었다. 지난 러시아월드컵에서 독일을 상대로 쓴 ‘카잔의 기적’에 이은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성과였다.
나흘 뒤 천안종합운동장에서 파나마와 2대2로 비긴 것은 우루과이전 성과를 생각하면 실망스러웠다. 파나마는 FIFA 랭킹 70위로 한국보다 15계단 아래 팀이었다. 우루과이는 물론이고 9월의 코스타리카(37위), 칠레(12위)보다 수준이 낮았다. 벤투호(號)는 경기를 지배하며 2대0으로 앞서갔지만, 전반 종료 직전 추격골을 내준 게 화근이었다. 후반에 파나마의 카운터 어택에 말려 무승부로 경기를 마쳤다. 대승을 너무 의식해 방심했다는 게 선수들의 자체 진단과 반성이었다. 벤투 감독도 “이것이 축구다. 이기고 있을 때의 경기 운영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차분하게 복기했다.
파나마를 제외하면 월드컵에서 경쟁력이 높은 중남미 강호들을 상대로 벤투호는 2승2무의 성적을 거뒀다. 지난 7월까지 중국 슈퍼리그의 충칭 리판을 맡으며 아시아 축구를 처음 경험했던 벤투 감독은 수준이 더 높은 한국 선수들의 기량에 만족하는 표정이다.
장기적으로 2022년 카타르월드컵에서 16강 이상의 성적을 낼 경쟁력 확보가 목표지만, 벤투 감독은 당장 내년 1월 UAE에서 열리는 아시안컵 우승도 중요한 목표라고 강조하고 있다. 선수 구성에서 전면적 변화보다 실력을 증명한 이들을 신임하고 있다. 익숙한 얼굴이면서도 벤투 감독의 스타일을 잘 흡수한 선수들이 중용되며 ‘벤투호의 황태자’로 올라서는 중이다.
벤투호의 기반, 황의조-정우영-김영권-이용
아시안컵 우승을 위해 벤투 감독은 “기틀을 다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부임 후 4개월 만에 큰 대회를 치르는 만큼 기복 없는 경기력을 보여줄 기초공사를 지난 두 달 동안 진행했고, 남은 두 달 동안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단단한 수비는 기본 전제고, 양 측면을 향한 공격과 후방에서의 정교한 빌드업, 그리고 연계 플레이를 마무리할 골 결정력이 벤투 감독의 확고한 색깔이다.
러시아월드컵을 통해 수비의 중심으로 거듭난 김영권은 벤투 감독의 큰 신뢰를 받고 있다. 중앙수비수로서 단단한 수비는 물론이고 공격수에 버금가는 왼발 테크닉을 이용한 빌드업에서 큰 점수를 받고 있다. 유럽 진출이 무산된 뒤 소속팀 광저우 헝다(중국)에서 꾸준히 경기를 뛰지 못하고 있음에도 A매치 4경기에 모두 선발 출전했다.
측면수비수 이용도 김영권과 함께 4경기에 모두 선발로 나선 수비 자원이다. 1986년생으로 현재 대표팀 최고참이지만 뛰어난 체력과 수비에 강하고 정교한 크로스를 지녔다. 측면수비수들의 공격 가담을 통해 밀집 수비를 무너트리는 벤투 감독의 전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수비형 미드필더 정우영은 벤투 감독 체제에서 가장 빛을 보고 있는 선수다. 스타일상 기성용과 닮아 그의 백업으로 여겨졌지만, 벤투 감독은 둘을 함께 세운 4-3-3 포메이션으로 중원의 존재감을 높였다. 기성용이 후방에서 수비 안정과 경기 조율을 맡으면 정우영은 많은 영역을 누비며 후방 빌드업에 관여한다. 소속팀 알사드(카타르)에서 세계적인 두 미드필더 차비(전 바르셀로나), 가비(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함께 뛰며 경기운영 능력이 한층 좋아졌다. 우루과이전에서는 결승골까지 넣으며 벤투 감독의 확실한 눈도장을 받았다.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킬러 감각을 증명한 황의조는 벤투호의 황태자라는 표현이 가장 적합한 선수다. 벤투 감독의 축구에서 최전방 공격수는 다재다능해야 한다. 득점부터 움직임, 경기를 함께 조립하는 것까지 익숙해야 하는데, 현재 대표팀이 소집할 수 있는 공격 자원 중 황의조가 최적이다. J리그 진출 후 용병으로서의 생존 경쟁을 통해 근성과 야성까지 겸비했다는 평가를 받는 황의조는 정교한 공격을 원하는 벤투 감독의 신임을 받으며 우루과이전에서 선제골을 터트렸다. 손흥민·황희찬 등 아시안게임 멤버들과의 콤비네이션도 선발 경쟁에서의 이점이다.
변함없는 전술의 축, 손흥민-기성용
손흥민과 기성용에겐 황태자라는 표현이 무의미하다. 어떤 감독이 부임하든 두 선수는 대표팀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벤투 감독은 유럽에서 충분히 검증된 두 선수를 전술의 축에 두고 있다.
손흥민은 벤투호 출범 후 주장까지 맡으며 팀 내 위상이 한층 공고해졌다. 월드컵과 아시안게임으로 이어진 각급 대표팀 차출로 체력이 떨어져 혹사 논란도 있었지만, 9월에 이어 10월에도 선발 출전으로 모든 경기를 소화하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4경기에서 6골을 터트리는 동안 손흥민의 득점이 없는 것에 불안한 시선도 있지만 벤투 감독은 “전술적 역할과 주장으로서의 역할 모두 잘 소화해 주고 있다”며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아시안게임 차출의 대가로 11월에 열리는 호주 원정은 쉬는 손흥민은 소속팀 토트넘(잉글랜드)에서 체력 회복에 집중한 뒤 아시안컵 조별리그 막바지에 대표팀에 합류할 예정이다. “2011년에는 3위, 2015년에는 준우승에 그쳤다. 이번엔 꼭 우승을 하겠다”며 아시안컵에 강한 의욕을 보인 손흥민은 러시아월드컵 때처럼 팀의 에이스 역할을 해 줄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월드컵을 전후해 대표팀 은퇴 의사를 밝혔던 기성용은 벤투호 출범 후 신중해진 모습이다.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인해 대표팀 차출에 부담을 느꼈던 그지만, 벤투 감독 체제에서 대표팀이 보여주는 경기력과 변화상에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지난 9월 벤투 감독은 첫 소집 당시 기성용과 따로 면담을 갖고 당분간 계속 대표팀을 위해 헌신해 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주장 완장을 손흥민에게 넘기며 부담감이 줄어든 기성용은 그라운드 위에서 여전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중이다.
벤투 감독의 시야에 들어온 새 얼굴도 있다. 공격수 황희찬은 지난 러시아월드컵 독일전에서 교체로 나섰다가, 부진한 플레이로 다시 교체돼 나가는 굴욕을 겪었다. 아시안게임에서도 무모한 플레이와 골 세리머니로 여론의 비판을 받은 바 있다. 하지만 벤투 감독은 그런 황희찬의 저돌성과 무모함이 대표팀에 필요한 요소라 판단하며 손흥민·황의조와 함께 공격의 축으로 삼고 있다.
아시안게임을 통해 기성용의 뒤를 이을 중원의 희망으로 등극한 황인범도 성공적인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앞선 3경기에서 10분 안쪽의 짧은 교체 출전을 했던 그는 파나마전에서 처음 선발 출전 기회를 잡았다. 위협적인 패스와 뛰어난 탈압박 능력을 보여주며 데뷔골까지 터트렸다. 기술과 공격성을 지닌 미드필더를 찾는 벤투 감독이 아시안컵 이후 본격적으로 활용할 자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