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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의 만물을 보면서 산다. 그래서 옛날 그리스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우리처럼 ‘숨을 거두었다’고 하지 않고 ‘눈길을 거두었다’고 했다고 한다.

‘미술’(美術)은 일본을 통해 들어와 고착된 용어다. 전문가들은 시각예술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미술은 알다시피 절대적으로 감각기관인 시각에 의존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한없이 많은 형태와 색채들이 펼쳐져 있는데 사람들은 본 것 중에서 왜 어떤 특정한 것을 골라 표현하는 걸까?

사람들은 1초 동안에도 몇백 개의 사물들을 본다고 한다. 어쨌든 사람들은 눈을 뜨고 있는 동안에 수많은 사물들을 보고 있는 셈이다.

 

ⓒ pixabay


미술에서는 이렇게 펼쳐져 있는 세상의 만물들을 보는 방법에 따라 표현하는 방법도 달리했는데 미술사에서 보는 방법의 혁명이 일어난 것은 ‘투시원근법’의 발견이다.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알베르티, 듀러,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화가들이 중심이 되어 여러 가지 과학적 실험을 거쳐서 이러한 시각효과를 완성하게 된다. 대표적인 작품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다.

이 작품을 보면 보는 사람이 가운데 고정되어 있고 소실점에 따라 형태가 단축되는 1시점 원근법으로 그렸는데, 우리가 이런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지평선이나 수평선을 생각하면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를 투시원근법이라고도 하는데 카메라의 원리와 같은 것이다.

지금까지 모든 현대미술과 미술대학의 입시에서 소묘시험부터 건축의 도면 작성 등에는 이 투시원근법이 절대적이다.

그런데 이 원근법의 발명 이전에는 보는 방법이나 표현이 신이나 절대자가 보는 눈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예를 들어 의미가 있는 것들은 크게 또는 화면의 중심에 그리고 그렇지 않으면 작게 주변부에 그렸다. 일종의 권력의 여부에 따라 크게 또는 작게 그린 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어린이가 어렸을 때 가족을 그리면 엄마를 크게 그리고 상대적으로 아빠를 작게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는데 어린아이는 보통 엄마가 가장 의미가 크고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원근법이 발달한 르네상스 시기는 과학과 인문학이 발달하기 시작한 때와 같이하고 있다. 또 상업의 발달로 초기 자본주의가 형성되기 시작한 때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보는 자의 시점을 한가운데 고정시키고 모든 보이는 것들을 크기에 따라 일렬로 질서 정연하게 배치하는 방법은 원근법이 발견되기 이전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절대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방법이 아닌가.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자본, 즉 돈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모든 가치는 이 자본으로부터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술가에게 절대적인 ‘자유’도 모두 이 자본으로부터 나오고 그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지난 박근혜 정권하에서 노골화된 예술가 ‘블랙리스트’도 결국 그들의 시선으로 보기에 소위 불량한 예술가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모든 지원으로부터 그들을 배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시각에 불량해 보이거나 그들의 질서에 순응하기를 거부하거나 하면 가차 없이 리스트를 만들어 어떻게든 자유를 박탈하고자 한 것이 바로 그들의 투시원근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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