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30주년 기획] 대한민국, 길을 묻다 ②
[인터뷰] 나눔의집·지구촌공생회 이사장 송월주 스님
건강은 어떠십니까.
“마음이 편합니다. 늦게 자면 그만큼 늦게 일어나고, 잠도 7시간씩은 꼭 자려 합니다. 맡고 있는 단체에서도 이젠 실무를 보지 않고, 부딪히고 갈등하는 입장에서 머리 써야 할 일도 없으니 근심걱정이 덜합니다. 그러니 건강에도 도움이 됩니다.”
세인(世人)들은 그렇게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방하착(丢开着)’, 모든 집착을 내려놓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옳은 일에도 연연하지 않고 나쁜 일엔 더더욱 집착하지 않는 거죠.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스스로 잘 다스리며 살고 있더이다. 속세에 사는 내 주변 50~60대들만 해도 쉽게 흔들리거나 크게 부딪히질 않더라고요.”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나눔의 집 이사장을 수년간 맡고 계십니다. 설립부터 주도해 오셨는데요.
“25년도 더 전에 나눔의 집을 만들었습니다. 오갈 곳 없는 위안부 할머니들 쉼터를 만들고 싶었죠. 당시 불교인권위원회 대표를 맡고 있었는데, 그땐 나부터도 이분들이 어린 나이에 처녀 공출돼 몸을 유린당했다는 사실을 잘 몰랐어요.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피해 사실을 증언한 후부터 국내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만들어졌고, 불교계도 오갈 데 없는 할머니들을 위해 생활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나눔의 집 설립 당시(1992년)만 해도 위안부 문제가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처음엔 할머니들 쉼터 용도로만 만들었어요. 그동안 관심을 받지 못하고 흩어져 쓸쓸히 살고 있는 이분들을 한곳에 모셔 안정적인 삶을 살게 하고 싶었죠. 서울 서교동에 처음 방 하나 구해 개원했어요. 그런데 이웃에서 이런 곳이 주변에 운영되는 걸 싫어하더라고요. 민원도 제기됐고. 그래서 명륜동, 혜화동 등지로 여러 번 보금자리를 옮기다 지금 위치인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에 자리 잡게 됐죠. 그때부터 조용해졌어요. 점점 국내 안팎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권익 신장에 대한 목소리도 커지고, 수요집회도 꾸준히 이뤄지면서 우리 국민들도 그때보단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확실히 잡힌 것 같아요.”
“나눔의 집이 문을 연 후 2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면서 적지 않은 할머니들이 세상과 작별했다. 할머니들이 세상과 인연을 다할 때마다 오고 가는 것에 얽매이지 말아야 하는 수행자이지만 마음이 아프다.”(송월주 스님 회고록 《토끼뿔 거북털》 383쪽) 2015년, 무더위에도 맹추위에도 수년간 매주 연로한 몸을 이끌고 수요집회에 참가하던 피해 할머니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이 일어났다. 한·일 정부 간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를 명시한 한·일 협정이 체결된 것이다. 월주 스님은 이에 대해 자신의 회고록에 “당사자인 할머니들의 의견을 수렴했는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며 “한·일 정부가 다시 심사숙고하기를 바란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내비친 바 있다. 더불어 출범 때부터 이 문제를 바로잡아 놓겠다고 의지를 드러내 온 문재인 정부에 대해서도 스님은 아쉬움을 드러냈다.안타깝게도 연로하신 피해 할머니들이 한두 분씩 세상을 떠나고 계신데 문제 해결은 진척이 되지 않는 듯합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당시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일본 외무상과 불가역적인 한·일 협정을 맺고 피해보상금 10억 엔을 받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때 협정서 만들기 직전에 윤 장관이 나한테 협정서 원문을 보내왔어요. 나는 그걸 보고 일본이 구체적으로 사과도 않고 불가역적인 합의를 맺겠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도 당시 정부의 모 관계자가 할머니들한테 이해를 좀 시켜 달라고 해요. 내가 못 한다고 했죠. 그런데도 합의를 했고, 일부 할머니들은 그 후에 보상금을 받았어요. 할머니 모르게 가족들이 받기도 했고, 눈과 귀가 어두운 할머니들이 사정을 잘 모르고 받기도 했죠. 그런데 그보다 더 많은 분들이 ‘일본의 사과가 더 중요하다’며 안 받았잖아요. 아베(일본 총리)가 사과해야죠. 말로만 하지 말고 문서화를 해야 해요.”
우리 정부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까요. 잘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일본은 여전히 협정을 폐기할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잖아요. 근데 우리 정부는 한·일 관계가 더 악화될까봐, 외교안보적으로 다른 문제들도 많이 얽혀 있으니까, 더 어떻게 하지 못하고 엉거주춤하는 것 같아요. 처음부터 강조했던 대로 위안부 문제 해결하려고 할머니들 청와대 모셔서 맞이하고 아픔을 나누면서 명분을 지키려 노력하곤 있지만 거기까지만 하고 있어요. 적극적으로 바짝 못 당기고 있는 거죠.”
여든넷의 나이. 무언가 새로 시작하기보다 정리하는 일이 더 많은 월주 스님의 삶에 지금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불교계 국제개발구호 NGO ‘지구촌공생회’ 활동이다. 종교계가 손을 잡고 지구촌 차원의 나눔 운동을 해 보자는 강문규·서경석 목사 제안으로 2003년 10월 정식 출범하기까지, 스님은 2년에 걸쳐 캄보디아·베트남·라오스 등 직접 6개국을 답사하며 현실을 눈에 담았다. “학교와 수도, 전기 등 최소한의 기반 시설이 부족한 그곳에서 사람들은 매일 생존을 위한 ‘또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토끼뿔 거북털》 336쪽) 월주 스님은 “빈곤국가 가난에 비하면 우리의 가난, 북한의 가난은 가난도 아니다”며 “모든 존재가 연결돼 있다는 불교의 연기설(緣起說)이 곧 나만 잘살고 내 나라만 풍요를 누려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라고 강조했다.지구촌공생회는 그간 국제적으로 어떤 활동을 해 왔습니까.
“지금 지구촌에 빈곤국가가 58개국이라고 합니다. 지구촌공생회는 GDP(국내총생산) 2000달러 미만인 이들 국가를 돕는 운동이에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활동이 북한 미사일 발사로 논란에 휩싸이고, IMF 후 몰두했던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 활동도 정부 지원이 활발해진 후부턴 이 지구촌공생회 활동에 더욱 몰두했어요. 종교와 민족과 이념을 초월해 모든 인류는 하나라는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천지여아동근(天下與我同根·천지가 나와 같은 뿌리)’이고 ‘만물여아일체(萬物與我就體·만물이 나와 같은 몸)’라는 불교의 진리관을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15년 넘게 활동하시며 직접 목격한 빈곤국가의 현실은 어땠나요.
“우리나라에도 밥 못 먹고 가난한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왜 다른 나라를 도와주느냐는 지적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가서 보니 우리나라 가난은 가난도 아니었어요. 그들은 가난의 늪에 빠져 그저 방치돼 있어요. 우리처럼 최소한의 사회안전망도 없었죠. 예전에 캄보디아에 가보니, 그곳 사람들 중 수도(水道) 혜택을 보는 이들이 17%뿐이더라고요. 나머지는 다 개울물 길어 먹고 그 물 때문에 피부병을 앓으며 기생충을 끌어안고 삽니다. 직접 가서 목격한 북한의 가난도 이들에 비하면 가난이 아니었어요.”
활동을 꾸준히 하려면 후원이 좀 많이 필요할 텐데요.
“한때 후원자가 20,000명 가까이 있었어요. 점점 줄어들어 지금은 그때보다 많이 적죠. 그래도 예전에 1만원 냈던 사람이 지금 2만원, 3만원 더 많은 금액을 후원하면서 지금도 후원금 규모만 보면 한창때의 90%는 유지하고 있어요. 학교 짓고 우물 파는 사업에 별도로 후원하는 사람들은 더 많고요. 기독교나 다른 메이저 NGO 단체들에 비하면 약하지만 불교계에서 만들어진 빈곤국가 지원 단체로는 단연 앞서고 있습니다.”
“사실 케냐를 비롯한 아프리카는 불교와 인연이 깊지 않다. 대부분 타 종교를 믿거나 토속신앙을 가진 이들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돕는 일을 중단할 수는 없다. 한국전쟁 직후 폐허가 된 우리나라도 천주교와 개신교를 믿는 신자들이 적었지만, 외국의 여러 나라들이 복구비용과 기술을 지원하지 않았는가. 인류애 실천에 종교의 벽은 없다.”(《토끼뿔 거북털》 360쪽)국제 구호활동을 하시며 “종교를 앞세우지 않는다”고 여러 차례 강조하신 바 있습니다.
“아프리카 케냐에서 지구촌공생회 활동을 하던 한 스님이 처음 종교활동이라는 걸 앞세워 그곳에 학교를 짓겠다고 했을 때 내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한 적이 있었어요. 캄보디아·미얀마·라오스처럼 불교 신자가 전 국민의 90% 이상인 나라에서도 한국식으로 사찰을 짓고 한국 불교를 앞세우면 싫어하더라고요. 케냐는 국민 80%가 천주교 신자인데 더하죠.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 사람들을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게 진정한 포교 아니겠어요. 이게 우리 활동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에요. 내가 가장 많이 강조하는 메시지이기도 하고요.”
또 함께 활동하시는 분들께 강조하는 부분은 없으신가요.
“학교 하나를 지어도 계속 우리 쪽에서 끌고 가려 하지 말고 그쪽에서 자립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터를 만들어주지만, 그 안을 가꾸고 그 터를 더욱 넓혀 나가는 건 그곳 교사들이나 학부모들에게 맡기도록 해요. 자주적으로 시설을 운영하려는 의지가 있는지를 계속 살피고 그 부분을 키워주는 것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에요.”
지구촌공생회는 그간 국제적으로 어떤 활동을 해 왔습니까.
“지금 지구촌에 빈곤국가가 58개국이라고 합니다. 지구촌공생회는 GDP(국내총생산) 2000달러 미만인 이들 국가를 돕는 운동이에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활동이 북한 미사일 발사로 논란에 휩싸이고, IMF 후 몰두했던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 활동도 정부 지원이 활발해진 후부턴 이 지구촌공생회 활동에 더욱 몰두했어요. 종교와 민족과 이념을 초월해 모든 인류는 하나라는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천지여아동근(天與我同根·천지가 나와 같은 뿌리)’이고 ‘만물여아일체(萬物與我就體·만물이 나와 같은 몸)’라는 불교의 진리관을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15년 넘게 활동하시며 직접 목격한 빈곤국가의 현실은 어땠나요.
“우리나라에도 밥 못 먹고 가난한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왜 다른 나라를 도와주느냐는 지적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가서 보니 우리나라 가난은 가난도 아니었어요. 그들은 가난의 늪에 빠져 그저 방치돼 있어요. 우리처럼 최소한의 사회안전망도 없었죠. 예전에 캄보디아에 가보니, 그곳 사람들 중 수도(水道) 혜택을 보는 이들이 17%뿐이더라고요. 나머지는 다 개울물 길어 먹고 그 물 때문에 피부병을 앓으며 기생충을 끌어안고 삽니다. 직접 가서 목격한 북한의 가난도 이들에 비하면 가난이 아니었어요.”
활동을 꾸준히 하려면 후원이 좀 많이 필요할 텐데요.
“한때 후원자가 20,000명 가까이 있었어요. 점점 줄어들어 지금은 그때보다 많이 적죠. 그래도 예전에 1만원 냈던 사람이 지금 2만원, 3만원 더 많은 금액을 후원하면서 지금도 후원금 규모만 보면 한창때의 90%는 유지하고 있어요. 학교 짓고 우물 파는 사업에 별도로 후원하는 사람들은 더 많고요. 기독교나 다른 메이저 NGO 단체들에 비하면 약하지만 불교계에서 만들어진 빈곤국가 지원 단체로는 단연 앞서고 있습니다.”
“사실 케냐를 비롯한 아프리카는 불교와 인연이 깊지 않다. 대부분 타 종교를 믿거나 토속신앙을 가진 이들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돕는 일을 중단할 수는 없다. 한국전쟁 직후 폐허가 된 우리나라도 천주교와 개신교를 믿는 신자들이 적었지만, 외국의 여러 나라들이 복구비용과 기술을 지원하지 않았는가. 인류애 실천에 종교의 벽은 없다.”(《토끼뿔 거북털》 360쪽)국제 구호활동을 하시며 “종교를 앞세우지 않는다”고 여러 차례 강조하신 바 있습니다.
“아프리카 케냐에서 지구촌공생회 활동을 하던 한 스님이 처음 종교활동이라는 걸 앞세워 그곳에 학교를 짓겠다고 했을 때 내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한 적이 있었어요. 캄보디아·미얀마·라오스처럼 불교 신자가 전 국민의 90% 이상인 나라에서도 한국식으로 사찰을 짓고 한국 불교를 앞세우면 싫어하더라고요. 케냐는 국민 80%가 천주교 신자인데 더하죠.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 사람들을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게 진정한 포교 아니겠어요. 이게 우리 활동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에요. 내가 가장 많이 강조하는 메시지이기도 하고요.”
또 함께 활동하시는 분들께 강조하는 부분은 없으신가요.
“학교 하나를 지어도 계속 우리 쪽에서 끌고 가려 하지 말고 그쪽에서 자립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터를 만들어주지만, 그 안을 가꾸고 그 터를 더욱 넓혀 나가는 건 그곳 교사들이나 학부모들에게 맡기도록 해요. 자주적으로 시설을 운영하려는 의지가 있는지를 계속 살피고 그 부분을 키워주는 것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에요.”
“순수하게 시민활동 하는 사람들 많아져야”
서슬 퍼런 독재정권에서 민주화운동에 나섰고 이후 다양한 시민사회운동에 앞장서 온 월주 스님은 이 모든 투쟁과 설파, 포용의 과정을 ‘깨달음의 사회화’라는 표현으로 집약했다. 혼자만 품고 있는 깨달음은 결코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라는 의미를 갖는다. 1994년 제28대 조계종 총무원장에 취임한 뒤 스님은 본격적으로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이라는 이름의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시민사회 공동체를 위한 운동에 개인의 이해와 욕심이 개입하는 것에 죽비를 들어 강하게 경고하기도 했다.
깨달음의 사회화란 무엇인지 좀 더 설명해 주십시오.
“진리를 깨닫기 위해 우리는 늘 노력해야 하지만, 그것을 깨달아 혼자만 취해 있어선 안 됩니다. 다른 사람도 깨닫도록 돕고 널리 알리며 그로 인해 더 많은 이들을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일해야죠. 내 회고록 제목이기도 하고 내가 깊이 새기며 강조하는 불교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세멱보리 흡여구토각(離世覓菩提子 恰如求兎角). 혜능 대사의 가르침인데, 세상을 여의고 보리(진리)를 찾으려 하면, 그건 곧 토끼의 뿔 혹은 거북의 털을 구하려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즉 ‘세상 속’에서 진리를 깨닫고 전하라는 말씀이죠. 이게 곧 내가 줄곧 얘기해 온 깨달음의 사회화, 그것의 기본 철학입니다.”
과거 ‘운동권 스님’이기도 했는데, 민주화운동, 시민사회운동을 함께했던 분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현재 정치권에 몸담고 있습니다. 이들을 보셨을 때 어떤 마음이 드시는지요.
“운동했던 사람들이 마땅한 대안을 제시하고 정부와 정치권이 이를 받아들여 개혁하도록 하며, 정치가 건강하게 운영되도록 견제하는 역할은 분명 해야 합니다. 하지만 거기까지 해야지, 시민운동 했던 사람들이 이 경력을 정계 진출하는 데 필요한 과정으로 삼는 건 부당한 일입니다. 이렇게 많이들 정계나 관계 요직에 직접 들어가 있는 건 맞지 않아요. 그러면 순수하게 시민활동 하는 사람들이 점점 없어지지 않겠어요. 이건 문제입니다.”
‘나이를 48세로 묶어 놨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10년 전 내가 법문석상에서 한 얘긴데, 내가 지금 여든넷이지만 지금도 늙지 않았다, 발걸음 늦추지 않고 계속 수행하고 봉사하며 산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저분이 여든이 넘었으니 이제 늙었지, 다했지’라고 다들 지레 생각해 버리니까…. 젊음을 지키며 살아가야겠다는 스스로와의 다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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