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했던 IMF 실체, 보여주고 싶었다”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기분이 어땠나.
“외환위기 당시 비공개 대책팀이 있었다는 기사 한 줄에서 시작된 작품이었어요. 막연하게 ‘IMF 직전 일주일은 얼마나 드라마틱했을까’ 라는 기대심에 시나리오를 읽었어요. 재미있었어요. 일반적으로 말하는 ‘재미’와는 다른 종류의 느낌이었지만요. 아주 편안한 자세로 시나리오를 읽다가 벌떡 일어나게 되고, 인터넷 검색을 자꾸 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21년 전, ‘IMF 사태’는 대한민국의 근간을 흔든 사건이다. 《국가부도의 날》은 IMF 사태를 한국영화 최초로 다뤘다. 영화 《그날 밤의 축제》(2007), 《스플릿》(2016)을 연출한 최국희 감독(42)의 신작이다. 《국가부도의 날》에서 한시현은 가장 먼저 국가부도의 위기를 예견하고 대책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정확한 데이터 분석을 토대로 위기를 예측하고 비공개 대책팀에 투입되지만, 그의 주장은 번번이 윗선의 반대에 부딪힌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무능함과 구태의연한 관료주의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결국 한시현은 IMF와의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IMF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한보 사태로 시작됐고, 이후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기업들이 도산하고 화의신청(기업이 지급불능이나 채무초과 상태에서 파산을 면하기 위해 법원에 신청하는 제도)을 했어요. 주변에서 유학 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지인들 중에는 갑자기 도망가듯 이민을 간 사람도 있고…. 그런 단편적인 기억들뿐이었어요. 당시엔 밖에 나가 있어도 어디서인지 뉴스가 들렸고, 좋지 않은 경제 분위기가 감지됐죠. 이 영화를 하면서 IMF에 대해 정작 중요한 것들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우리 모두가 모를 수밖에 없었죠. 대본을 덮는 순간, 출연 여부를 떠나 이 영화는 반드시 만들어져야 하고 또 반드시 잘 만들어져서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혜수의 영화’라고 할 정도로 완벽히 캐릭터를 소화했다는 평이다.
“사실 출연을 결심하면서 두려움이 많이 들었어요. 각오도 필요했고요. 피해 갈 수 없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었으니까요. 대본의 대부분이 제가 모르는 말이더라고요. 어려운 경제 용어를 유려하게 말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전반적인 당시 경제 상황을 정확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어요. 그래서 개인교습을 받았어요. 경제 상식이 미미한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설명해 줄 분에게 도움을 요청했죠. 영어 대사는 그중 일부였어요. 캐릭터의 감정이 드러나야 하는데, 말에 부담이 있으면 그 진심을 어찌 내보이겠어요.”
실제로 감독이 김혜수라는 배우를 놓고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들었다.
“작품마다 운명이 있는 것 같아요. 정말 좋은 작품이라도 제작 과정이 순탄치 않아 무산되는 경우도 있고, 이 배우를 놓고 시나리오를 썼음에도 연이 닿지 않기도 하죠. 반대로 ‘저 배우는 절대 아니야’ 했는데 너무 잘 소화해 주는 경우도 있지요. 누군가에게 대본이 갔다 왔어도 저는 제가 하고 싶으면 해요. 그 이후엔 소임을 다하는 게 제 역할이죠.”
주연배우로서 감상평도 궁금하다.
“나쁘지는 않았어요. 물론 아쉬움도 있었지만, 어떤 아쉬움인지는 말 안 할래요(웃음). 오래되지 않은 현대사를 짚어보면서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공감하며 유의미한 대화들이 오갈 수 있어 좋았어요. 시사회 당일 조카가 와서 이 영화를 봤어요. 초등학교 6학년은 이 영화를 어떻게 봤을까 너무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안 그래도 아빠한테 이것저것 물어보며 집에 갔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이 영화를 통해 IMF를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들이 ‘우리의 엄마·아빠, 혹은 우리가 꼰대라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순간을 이겨내고 우리를 지켜냈구나’라고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조우진씨와의 연기 케미가 보통이 아니었다.
“정말 좋은 배우예요. 동시에 인간적으로도 좋은 사람이에요. 진중하고 따뜻해요. 연기적으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직관도 아주 좋죠. 스마트한 데다 천재성까지 있어요. 개중에는 혼자만 잘하는 배우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조우진씨는 함께 잘할 수 있는 에너지를 무궁무진하게 발현해 줘요. 실력 있는 배우와 일하는 건 좋은 자극, 좋은 수업이 돼요.”
유아인씨와는 어땠나(두 사람은 2007년 개봉한 영화 《좋지 아니한가》에 함께 출연한 바 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배우예요. 그 또래에서 비교 불가일 만큼 자신만의 정체성이 확고하죠. 아인씨는 안전한 길을 마다하고 이 작품을 택했어요. 그이기에 가능한 행보죠. 그래서 이번 작품을 함께하면서 유아인이라는 배우가 더 좋아졌어요. 젊고, 에너지가 충만하고, 재능이 있고, 연기 이외에도 매력이 많은 배우죠.”
프랑스 국민배우 뱅상 카셀도 출연한다.
“다른 문화권에서 입지를 갖춘 배우와 공식적으로 함께할 기회가 생긴 건, 배우로서 운이 아주 좋은 거죠. 아무리 좋은 배우여도 남의 언어로, 이미 판이 짜인 남의 공간에서 연기를 하는 건 굉장히 힘들어요. 더군다나 영화 속 오가는 대사들이 대부분 경직된 것들인데, 대사의 행간까지 찾아내 빈틈을 메워주더라고요. 갖춰진 배우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번 환기시켜줬죠. 젠틀하고 프로페셔널했지만, 동시에 숨 막히게 긴장된 기류도 느껴져서 좋았어요. 저는 너무 긴장이 돼서 뱅상 카셀의 대사까지 다 외우고 현장에 갔을 정도예요. 완성된 영화를 보고 더욱 놀라운 건, 등장하는 순간부터 끝까지, 심지어 대사가 없는 몽타주까지도 이질감이 없다는 거예요. 단순한 존재감, 카리스마의 차원이 아니죠.”
최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김혜수는 존경스러울 정도로 노력하는 배우”라고 말했다.
“그래서 완벽주의자냐고요? 잘못 보셨어요, 저는 빈틈이 많아요. 친구들 중에도 완벽주의자는 없을걸요(웃음). 저는 타고난 배우가 아니에요. 더 정확히 말하면 배우 하기에 부적합하죠. 한데 일할 때는 예민하게 하는 편이에요. 이 직업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에요. 누구나 다 그렇게 일하기에 특별한 건 아니에요. 그래서 전 일할 때 행복하지 않아요. 불행하다는 의미도 아니에요. 불행하면 이 일을 하지 말아야죠. 제게 이 일은 힘들고 어려워요. 가진 게 없으니 남들보다 더 노력해야 버틸 수 있죠. 연기하는 순간에는 재능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제가 미워지기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