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페미니즘 영화, 낡은 생각을 새롭게 하는 사유의 방식
케이블TV를 보는 시간이 늘어나면 노년층으로 접어드는 걸까 하는 싱거운 생각을 문득 한다. 너무 폭력이 난무하면 고돼서 보기 싫어지고, 너무 로맨틱해도 간지러워서 딴 데를 틀게 되고, 너무 의미심장해도 부담스럽다. 적당한 긴장, 적당한 수수께끼가 있는 스토리를 선호하게 되어 버린다. 그중 재미있게 보고 재방송되어도 다시 보고 있게 되는 영화들에 종종 f등급이라는 표시가 붙은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페미니즘 주제, 여성 감독, 여성 주인공인 영화에 붙인 거란다. 페미니즘을 정의하는 수많은 말들이 있지만, 딱 한마디만 하라면 “낡은 생각을 새롭게 하게 하는 사유의 방식”이라고 하고 싶은데, 영화야말로 그런 정의를 구현하기에 매우 가까운 매체다. 세상을 보는 새롭고 다양한 시선들을 배운다,
소외돼 본 사람만이 소외를 볼 수 있다
최근 한국영화에 여성 감독도, 여성 배우의 설 자리도 몹시 좁아져 있다는 염려를 많이 한다. 사실이다. 그런 중에도 여성 관객의 호응으로 설 자리를 넓혀가는 작은 영화들이 꾸준히 태어나고 있다. 살아보면, 나이 들어보면, 세상은 변하지 않는 것 같아도 변하고 있으며, 변화 쪽에 투자하는 편이 남는 게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좋은 영화를 보는 것은 타인의 삶을 통한 경험이고 성찰이니, 추천하고 싶은 영화 《공동정범》은 페미니즘 영화의 문법에 충실한 영화다. 봄에는 제38회 영평상 독립영화지원상을, 얼마 전에는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대상을 받아 영화로서의 성가를 인정받았다. 영화평론가들은 이 영화의 새로운 문법에 주목했다. 《공동정범》은 용산참사에서 화재를 낸 공동정범으로 지목되어 옥살이를 하고 나온 다섯 사람을 따라가는 이야기다. 다섯 사람은 제각기 피해자이면서도 서로를 원망하고 의심하며 고립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이 겪은 일은 그들 서로가 아니면 나누기 힘든 어둠에 감싸여 있다. 심하다 할 정도로 질기고 가깝게 이들을 따라가며, 감독들은 다큐의 일반적 문법을 깨고 이들에게 개입까지 한다. 서로를 향한 분노와 오해를 드러내고 한자리에 모아 말하게 하고 서로를 들여다보게 한다. 몇 년에 걸친 이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시선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르며 정의는 무엇이고 불의는 또 무언가를 탐구하지 않는다. 상처받고 고립된 마음을 들여다본다. 이러한 시선에 대해 감독 중 한 명인 김일란은 어떤 강좌에서 말한 적이 있다. 망루에 올라간 사람들이 남성들이었으므로 유가족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따라서 유가족의 행동을 저지하고자 배치된 경찰도 여경이었다. 이 여성 경찰의 손을 매섭게 뿌리치는 같은 여성인 유가족을 보며, 유가족의 심정도 여경의 당혹감도 다 이해가 되더라는 김일란은 전형적인 선악이분법과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유가족 여성과 여경의 다툼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말도 없이 망루 투쟁을 하러 간 남편도, (과잉진압으로 비판받았던) 경찰 지휘부도 다 사라지고 유가족 여성과 여경만이 남은 현장이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다. 투쟁 현장을 좀 다른 시선으로 보고 싶었다”고.-김일란, “지금 누가 소외되고 있는지를 본다”(노컷뉴스 2018. 5.16)
누가 소외되고 있는가를 볼 수 있는 이유는 소외된 자리에 있어보았기 때문이다. 사랑과 배려로 소외를 이긴 경험을 나누는 마음에 페미니즘 등급을 붙인 이유다. 영화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