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글로벌 콘텐츠 시대와 그 적들
최근 방탄소년단의 일본 아사히TV 방송출연 취소는 전 세계적인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일본 아사히TV 방송출연 취소 사태는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그것은 마치 현재 전 세계의 문화가 국가와 민족 그리고 언어의 차원까지 뛰어넘어 글로벌 콘텐츠로 나아가는 바뀔 수 없는 흐름이 존재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근대적 사고관에 멈춰서 그 흐름에 역행하려는 이들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어서다.
2017년 방탄소년단 지민이 공개 석상도 아닌 일상에서 입었던 ‘광복 티셔츠’. 거기에는 광복을 맞아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의 모습과 원자폭탄이 떨어진 장면 그리고 ‘PATRIOTISM(애국심)’ ‘OUR HISTORY(우리 역사)’ ‘LIBERATION(해방)’ ‘KOREA(한국)’ 등의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일본의 일부 우익이 이를 문제 삼았고, 아사히TV는 여러모로 부담을 느꼈던 모양이다. 결국 출연 취소 결정을 내리고 사과문을 올렸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우익 성향 매체들은 이와 관련된 기사들을 쏟아냈다. ‘광복 티셔츠’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원폭 티셔츠’라 붙인 그 기사들 속에는 “원폭 사진이 인쇄된 티셔츠를 입고 일본인의 신경을 건드린다”며 “자국 역사에 대한 뿌리 깊은 콤플렉스가 나타난다(도쿄스포츠)”는 황당하고 원색적인 비난까지 들어 있었다.
일본을 포함한 전 세계 아미(ARMY·방탄소년단 팬클럽)들이 일제히 SNS를 통해 결집하고, CNN과 BBC 같은 매체에서 이 문제를 대서특필하며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저질렀던 문제들과 여전히 제대로 된 책임과 사과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현 상황들을 알리면서 상황은 우익 성향 매체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특히 아미들은 SNS를 통해 “#LiberationTshirtNotBombTshirt(원폭 티셔츠 아닌 광복 티셔츠)” “#RealReasonWhyJPNTVcancelled(일본 방송국이 방송출연을 취소한 진짜 이유)”라는 해시태그 캠페인을 벌임으로써 오히려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상황들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를 만들었다.
일본 우익들의 의도는 명확하다. 그것은 방탄소년단을 타깃으로 삼아 정치적으로 이용하겠다는 심산이다. 여전히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그것이 정치적 기반인 일본 우익들은 방탄소년단의 티셔츠로 시간을 되돌리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과연 가능한 일일까. 또 그만한 효과를 거둘 수 있을까.
글로벌 콘텐츠의 흐름과 넘어야 할 장벽들
방탄소년단 사태가 터지기 며칠 전인 11월8일과 9일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 샌즈에는 국내 매체들은 물론이고 아시아 각국의 취재진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넷플릭스가 아시아 최초로 멀티 타이틀 라인업 이벤트 ‘See What’s Next: Asia’를 열었기 때문이다. 이 행사는 넷플릭스라는 글로벌 스트리밍 업체의 아시아 출사표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상징적으로 다가오는 건 드디어 글로벌 콘텐츠의 흐름이 아시아권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고, 그 중심에 한류 콘텐츠가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김은희 작가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인 《킹덤》의 1, 2회가 소개됐고 아시아 기자들의 좋은 반응이 이어졌다. 이미 시즌2가 확정돼 제작에 들어가 있는 《킹덤》에 대해 넷플릭스 창립자 겸 CEO인 리드 헤이스팅스는 “한국에서 만들어진 이 작품이 전 세계에서 인기를 끌 것이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는 네트워크로 연결된 현 시대가 많은 걸 바꿔놓았다고 말하면서,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콘텐츠를 개개인의 관심에 따라 선별해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고 글로벌 공유 또한 가능해졌다고 했다.
이미 방영됐던 《미스터 션샤인》이나 《킹덤》 같은 작품이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인들과 함께 공유되고, 방탄소년단이 국적을 뛰어넘는 팬덤을 가질 수 있게 된 건 그 바탕에 인터넷 네트워크가 구축돼 있어서다. 이제 콘텐츠의 국경이 점점 사라지게 됐고, 지구촌이 하나의 문화 공동체가 되는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도도한 흐름에도 넘어서야 할 장애물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 대표적인 장애물들이 근대에 벌어진 역사 문제나 현 한반도를 두고 벌어지고 있는 급변하는 국제정세 같은 사안들이다. 글로벌을 지향하며 미래로 나아가는 힘에 저항하려는 구시대적 사안들이 만들어내는 역행. 이것이 방탄소년단과 일본 우익의 충돌이나, 사드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는 중국 내 한류 문제의 본질적인 이유가 아닐까.
물론 한류를 두고 벌어지는 이런 우여곡절들의 밑바탕에는 경제적인 이유도 깔려 있다. 한류의 흐름이 워낙 거세게 밀어닥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작용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반작용이 근대 시절의 청산되지 않은 잘못된 역사의식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행해진다는 건, 그 구시대적 저항들이 그다지 실효를 거두지 못할 거라는 걸 보여준다. 이를테면 일본 우익 매체들이 마치 굉장히 중요한 지표처럼 말하는 《홍백가합전》 출연 같은 건, 지금 같은 글로벌 네트워크 시대에는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들이다. 《홍백가합전》에 나가는 일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이제 빌보드에 직접 올라가고 미국과 영국의 유명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일이 새로운 일도 아닌 상황이 아닌가.
구시대적 저항들, 하지만 흐름이 막힐까
실제로 일본 우익들이 이렇게 나서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일본 대중 대부분은 “별 관심 없다”는 반응이다. 방송 취소 사태가 벌어졌지만 방탄소년단의 일본 9번째 싱글 앨범 ‘FAKE LOVE/Airplane pt.2’는 발매 5일 차 연속 오리콘 데일리 싱글차트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일본에서 열리는 4개 돔 투어 콘서트는 티켓이 몇 분 만에 전석 매진됐다. 이것은 한때 방송출연이 권력이던 시절이 이제는 지나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방송출연을 안 해도 방탄소년단은 SNS를 통해 지구 반대편까지 영향력을 넓혀왔다. 마치 글로벌 콘텐츠 시대를 이끄는 첨병처럼.
칼 포퍼는 1938년 히틀러가 자신의 고국인 오스트리아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1945년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명저를 낸 바 있다. 물론 그 의미는 조금 다르겠지만 이 표현을 빌려 오면 지금 현재의 상황을 ‘열린 글로벌 콘텐츠 시대와 그 적들’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미래는 글로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근대로 회귀하려는 적들을 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