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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인터뷰] ‘보리밭 작가’ 이숙자 “잘못된 사관으로 채색화가 부당한 대접 받았다”

1977년 봄 경기도 포천, 이숙자(당시 35세)는 나지막한 능선에 드넓게 펼쳐진 청록의 보리밭을 보고 감전된 듯 전율했다. 시공이 정지되는 느낌, 그 에피파니(Epiphany·顯現)를 좇아 이숙자는 본격적인 예술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숙자는 1980년 1000여 명이 응모한 중앙미술대전에서 《황맥 들판》으로 대상을 수상한 이후 ‘보리밭 작가’라고 불리게 됐다. 그해 국전에서도 《작업》으로 대상을 수상, 민전(民展)과 관전(官展) 2관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숙자는 숙명여중을 졸업하고 서울사범학교(현 서울교육대학교)를 나와 잠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다. 그러다 1963년 홍익대 동양화과에 입학한다. 동양화에 대한 학제나 교수법이 구비되지 않은 때였다. 존재감 자체가 없었다. 1964~65년 계속된 한일협정 반대 시위는 수업을 불가능하게 했다. 이숙자는 1967년 홍익대학교 동양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1971년 자신의 석사 논문 ‘한국근대동양화 연구-한국화 정립을 위한 기초 조사’는 작가로서의 정체성 확립뿐 아니라 미술 이론가로서의 면모를 갖는 모멘텀이 된다.
보리밭 시리즈로 유명한 이숙자 작가가 10월24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작업실에서 자신의 작품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시사저널 박정훈

채색화 정통성 지키기는 한국화 정체성 지키는 싸움

이숙자는 1969년부터 이경성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논문을 준비하면서 ‘채색화의 역사’를 주제로 정했다. 논문 서론에서 “현대에 와서 동양화가 당면한 최대의 과제는 한국적인 회화, 즉 한국화의 정립이다”라고 썼다. 1920년 창간호부터 1940년 강제 폐간될 때까지 ‘동아일보’에 실린 동양화 관련 기사를 찾아 손으로 옮겨 썼다. 이 과정에서 이숙자는 채색화의 정통성을 발견하고, 한국화에 대한 자각에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갖게 됐다. 이숙자의 스승은 운보 김기창(1913~2001), 천경자(1924~2015), 박생광(1904~1985), 월전 장우성(1912~2005) 등 당대 최고의 작가들이다. 이숙자는 이당 김은호(1892~1979)가 1911년 설립된 서화미술회에서 조석진, 안중식에게 전통 채색화를 배웠고, 순종의 어진을 그렸다는 사실을 두고, 이당이 조선 말기 초상화 기법을 습득했음을 의미하기에 김은호를 연결고리로 광복 이후 채색화는 조선시대의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봤다. 10월24일 일산의 작업실에서 이숙자 작가와 2시간여 동안 인터뷰를 했으며, 이후 우편으로 자료를 받았다. 채색화의 ‘일본화 시비’와 관련해 그의 논리는 명확했다. “김은호가 일본화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장본인이라고 폄하되는 건 잘못됐다”는 것이었다. “첫째, 이당 김은호가 조선 전통의 채색화를 현대에 전하면서 현대 채색화의 정통성을 확실하게 해주고 있다. 둘째, 삼국시대 이래 고려 불화 등에서 영향을 받아 발전시킨 일본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조선 채색화 전통을 새로운 감각의 채색화로 변화·발전시켰다. 이당이 배출한 김기창, 이유태, 조중현, 안동숙 등의 제자들과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박생광, 박래현, 천경자 등에 의해 오늘날 화풍의 채색화로 이어졌다. 셋째, 색은 회화를 이루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다. 조선후기 북화 전통의 조선 채색화가 정통화로서 회화사에 기술되지 않음으로써 현대 채색화가 단절된 상태에서 일제시대 영향으로 새로 정착된 회화로 오인됐다.” 그는 채색화를 일제강점기의 잔재로 보는 것에 대해 “고려 불화나 삼국시대의 고분 벽화의 역사를 지우는 일”이라고 반박한다. 또한 채색화의 전통을 주류미술사에서 제외시키고 수묵화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은 1960~70년대 미술사학계(고고사학계)를 비판했다. “연구의 오류와 잘못된 사관으로 인해 채색화가 부당하게 대접받아 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실제로 1980년대 홍익대 내에서 ‘수묵화 운동’이 10여 년간 지속됐다. 채색, 수묵 구분 없이 그룹전을 같이 하던 작가가 일본 유학을 다녀온 이후 ‘×바리’라는 비난을 받으며 스승들이 그랬듯 또다시 왜색의 올가미를 쓰게 됐다. 학생들 또한 갈피를 잡지 못했다. 1987년 이숙자는 채색화가 단체인 ‘춘추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여러 세미나에서 ‘채색화의 미술사적 위치’(1988), ‘채색화의 정통성’(1990) 등의 글을 발표했다. 1989년에는 《한국 근대동양화연구》를 출간한다. “사대부들의 필수 도구인 지필묵으로 가능한 서화는 취미를 돋는 수준이었다. 조선조 강희안(1417~1464)이나 후기 강세황(1713~1791)의 경우 잘 그리면 천민이라고 얕보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스스로 전문 영역을 배척하고 아마추어로 남으려고 했다. 남화나 문인화 역시 소수의 지식층 양반계급에 의해 수용됐다는 점에서 정통화로서 취약점을 갖고 있다. 역사 기술이 선비, 사대부, 궁중사 등 상류층 중심으로 즉, 궁정사관에 의해 북화 전통 채색화를 제외한 채 회화사에 기술됐다.” 한국 화단에서 ‘동양화 작가’의 정체성은 타자화된 ‘서양화 작가’와의 대비에서 형성돼 왔다. 1960년대에 이미 동양화의 존재감은 없었다. 하지만 장르 간 경계가 무너진 미디엄 포스트 시대에 한국 화단에 대한 작가의 일갈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수묵과의 경계에서 채색의 정통성을 지켜야 했고, 한국 회화의 적자라는 자부심은 한국화 정체성 지키기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필자의 질문은 “우리가 외국 사조를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느냐”로 이어졌다.
ⓒ이숙자 작가 제공
이숙자 작가의 작품 《푸른 보리밭 황소》 ⓒ이숙자 작가 제공
ⓒ이숙자 작가 제공
이숙자 작가의 작품 《이브의 보리밭-몽환》 ⓒ이숙자 작가 제공
ⓒ이숙자 작가 제공
이숙자 작가의 작품 《황맥벌판》 ⓒ이숙자 작가 제공

맹목적으로 서양화 받아들인 게 발단

“당시(1960년대)부터 서양화가 주인 행세를 했다. 한국의 시대적 상황과 필연성이 없는데도 서구에서 일어나는 사조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였다. 문제는 우리 미술이 주인공이 돼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점이다. 일본은 서양화를 수용하는 게 일본화를 더 강하게 하는 수준이었다. 중국은 피카소 작품보다 더 비싼 값을 치르고 혼란기에 나간 자국 근대 작가 작품들을 거둬들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일제강점기 공백 때문에 근대와 현대가 거의 동시에 들어왔다. 무조건적인 수용은 우리 환경에서 무리가 있었다.” 소설가 김훈은 소설 《하얼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국의 근대는 문명개화의 꿈에 매혹됐고 제국주의의 폭력에 짓밟혔다. 이 문명개화는 곧 서구화였고, 한국인이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이미 이룩한 문명은 개화의 추동력에 합류할 수 없었다.” 이숙자는 당시 국내외에 횡행하던 추상표현주의도 거부하지 않았으나, 자신의 작업 방향과는 맞지 않다고 여겼다. 1989년, 근경을 강조하는 이숙자의 ‘보리밭’ 시리즈에 ‘이브’가 등장한다. 《이브의 보리밭》 연작은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마른 몸을 가진 여성 누드의 경직된 자세나 극도로 세밀한 체모의 묘사, 핏기 없는 피부 등이 특징이다. 누군가는 마네킹 같다고 하고, 민담처럼 들려오는 보리밭에서 벌어지는 남녀 간 로맨스에 빗대 ‘토속적 에로티시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기존의 보리밭 시리즈에 대학 시절부터 그리던 누드를 배치한 듯 보이나, 보리밭에 누운 여성 모델의 파격적인 자세로 인해 보리밭은 대상을 받쳐주는 배경으로 밀려난다. 《이브의 보리밭》을 발표하던 1989년 이숙자의 한국화 및 채색화에 대한 논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그는 “국제 미술의 흐름을 외면해도 곤란하지만 맹목적으로 흐름을 따라가는 것도 곤란하다. 전통과 현대의 미술 사조를 이해하면서 작가 개개인의 조형 의지로 근성 있는 노력으로 작품을 다져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브의 보리밭》은 관객을 응시하는 정면성(正反面性)이 가장 큰 특징이다. 작가는 ‘볼 테면 봐라’ 식으로 여성(의 몸)을 향한 남성의 관음증적 시선을 비꼬고 있다. 여성 작가들을 ‘여류화가’로 칭하던 시절에 순결을 강요당하고, 경제적 자립이 어려우며, 결혼을 통해 남성에게 귀속되는 것이 순리인 것처럼 여겨지는 여성상에 의문을 가졌던 것이다. 그는 “나의 작품 속의 이브는 부드럽고 우아하고 상식적인 표현으로 ‘여성적인’ 그런 모습이 아니다”면서 “여성의 숙명을 거부하는 듯한 차가운 시선의 이성적인 그러면서 고독한 모습이다”고 말했다. 《이브의 보리밭》의 강렬한 시각적 메시지는 한국 페미니즘(Feminism·여성주의)의 단초가 됐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 작가 메리 에델슨(Mary Beth Edelson·1933~2021)의 작품 《현존하는 미국의 몇몇 여성 작가들, 1972》(Some Living American Women Artists)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속 예수 자리에 미국 현대미술의 주요 여성 작가인 조지아 오키프를 배치하는 등 패러디 콜라주로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한국화와 채색화에 대한 논리적 체계는 1975년 채색화가들의 단체인 춘추회를 설립하고 대학 강단에 서면서 더 탄탄해졌다. 이숙자는 오랫동안 모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다 1993년부터 2007년까지 고려대 미술학부 교수로 채색화를 본격적으로 가르쳤다. 현재는 고려대 미술학부가 디자인조형학부로 명칭이 바뀐 상태다. 

“나는 더 멀리까지 내 별을 쫓아가고 싶었다”

“이제는 명예욕과 재물욕이 없다”는 작가의 말은 “나는 더 멀리까지 내 별을 쫓아가고 싶었다”로 이해된다. 그는 미국 비트 세대의 소설가 잭 케루악(Jack Kerouac·1922~1969)의 대표작 《길 위에서, 1957》(On the Road, 1957)의 주인공 샐 파라다이스를 인터뷰 말미에 언급했다. 자신이 창립 멤버로 참여했던 춘추회의 경우 운영위원을 맡고 춘추미술상금을 꾸준히 후원하면서 후배들의 성장을 지켜보고 있다.
ⓒ이숙자 작가 제공
이숙자 작가의 작품 《작업(作業)》 ⓒ이숙자 작가 제공
ⓒ이숙자 작가 제공
이숙자 작가의 작품 《시장(市場)》 ⓒ이숙자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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