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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당대 지식 체계 기초한 김병익의 《기억의 양식들》

한국의 당대 인문 정신은 ‘창비’와 ‘문지’에 진 빚이 적지 않다. 엄혹한 군부정권 시대 속에서도 민주와 지성의 시대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때로는 부드러운 문화의 힘으로 그들을 극복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 ‘문지’는 저항과 더불어 문화라는 가치를 사람들에게 심어준 가치 있는 존재였다. 591번을 넘어간 ‘문지 시선’과 잡지 ‘문학과 지성’이나 ‘문화와 사회’, 그리고 수많은 문학과 문화 단행본들은 우리 지성의 깊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중심으로서 문지를 창간하고 이끈 김병익 대표의 역할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김 대표가 이번에 내놓은 《기억의 양식들》은 그가 통과했던 시대와 더불어 수많은 고락을 같이했던 도반과 그 긴 길을 정리한 책이다. 스스로 가치를 역설한 기록문화의 멋진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이 기록을 정리하는 것은 스스로 어느 시대의 종언일 수 있는데, 그래서 조금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1938년생인 김 대표는 산수(傘壽)가 지난 지 오래고 곧 미수(米壽)를 바라본다. 당연히 많은 이가 생각날 수밖에 없고, 책 전반에는 그와 다양한 마음을 나눈 문학인이 많다. 책은 기억의 자리들, 형상들, 일구기 등으로 기억이라는 모티브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 기록을 남기는 자신을 마지널리언(marginalian·여백의 글을 쓰는 사람)으로 칭하고, 그 원인을 그가 문학이나 문화 담당 기자를 했던 데서 찾는다. 김 대표는 기자 생활을 하다가 기자협회장을 맡으면서 강제퇴직의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퇴직은 당대 가장 중요한 지성의 토대인 ‘문학과 지성’ 창간이나 ‘문학과 지성사’의 창업으로 이어진다. 문지는 이후 이 시대 문학과 지성사에 금자탑 같은 역할을 한다. 문지가 없었다면 오규원, 김광규, 마종기 등 문지표 시인이나 조세희의 《난쏘공》이나 최인훈의 《광장》 등은 빛을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숨어있는 기억들’에서는 자신이 성장하면서 쓴 시나 부인의 산문 등을 다양하게 소개한다. 김 대표가 단순히 평론가가 아닌 창작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완용, 이광수, 서정주 등 논란의 소지가 있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다루었다는 것이다. 그 인물들의 일면만을 보지 말고, 좀 더 중층적으로 봐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어떤 악한이라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아무리 성자적인 생애를 살았던 사람도 범용한 인간다움을 가지게 마련이며,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존재론적 한계와 함께 어떤 악한도 보기에 따라 훌륭한 미덕도 발휘하게 되는 것이 상례다.” 책의 마지막을 장식한 ‘책, 그 질긴 인연’도 흥미로운 글이다. 2018년 녹색평론에 기고한 이 글에서 이 시대 지성인인 김 대표는 인생에서 책과의 다양한 인연을 정리한다. 출판기자에서 문학평론가로, 편집자에서 발행자로, 또 저자로 변모한 과정은 물론이고 그를 깨웠던 도스토옙스키, 헤세, 토마스만, 카뮈 등과의 만남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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