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에르도안, 푸틴과 관계 유지하면서 튀르키예 몸값 올려
서구 사회 향한 ‘몽니’로 국익 추구하며 ‘실리외교’ 진가 발휘

7월11일 나토(NATO) 정상회담에서 마지막까지 거부권을 행사할 것처럼 배짱을 부렸던 튀르키예 에르도안 대통령이 갑자기 입장을 선회해 스웨덴의 나토 가입에 합의했다. 그 대가로 스웨덴을 궁지에 몰면서 압박 카드로 썼던 쿠르드노동당(PKK) 등 테러단체 지원 중단, 비자 문제 완화 등 모든 요구사항은 받아들여졌다. 무엇보다 미국으로부터 보류됐던 26조원 규모의 F-16 전투기를 도입하게 됐다. 이로써 과거 러시아제 S-400 지대공 미사일을 도입해 F-35 프로그램에서 축출되는 등 미국의 전투기 판매 금지 대상에 올랐던 튀르키예는 공군력 강화와 함께 세계 12위권 방산업 발전의 초석을 마련하게 됐다.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왼쪽)이 7월11일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

‘친서방 유턴’에도 러시아와의 경제 협력은 불변

결국 튀르키예는 서방의 품으로 돌아온 것일까. 결론적으로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다. 분명한 것은, 국내외 정세와 흐름을 파악하면서 실익을 챙기는 그야말로 놀라운 상황 판단력과 협상력 그리고 정치력과 독자적 ‘실리외교’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에르도안 대통령은 튀르키예가 나토 동맹국임에도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한 대(對)러시아 제재에는 동참하지 않는 등 친러시아 행보를 보여왔다. 그렇다고 반(反)우크라이나 노선도 아니었다. 전쟁 초기에는 우크라이나에 공격용 드론을 공급해 러시아를 제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런 ‘중간자’ 정체성으로 튀르키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휴전 협상을 주선했고, 흑해를 통해 우크라이나산 식량을 수출할 수 있도록 중재했다. 은근히 에르도안이 대선에서 패배하기를 바랐던 서방세계의 기대를 뒤엎고 뜻밖에도 에르도안은 재선에 성공했다. 그 후 ‘친러시아’ 강화 예상과는 달리 돌연 ‘친서방 유턴’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그간 환율을 떠받치는 데 쓰느라 바닥이 드러난 외환보유고와 85%에 육박하는 인플레이션 그리고 리라 가치 폭락으로 인한 경제난에도 이슬람 샤리아를 근거로 저금리 정책을 고수해 왔던 에르도안 대통령이었다. 그랬던 그가 집착에 가까운 고집을 포기하고 미국의 글로벌 투자은행 메릴린치와 골드만삭스 등을 거친 시장경제 전문가로 경제팀을 꾸려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렇듯 에르도안의 의외의 방향 전환에는 튀르키예 국내 상황이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는 에르도안으로서는 튀르키예 경제 회복이 급선무다. 선거의 공정성에 수많은 의혹을 남긴 가운데 결선투표까지 가면서 52%로 아슬아슬하게 대권을 거머쥐기는 했지만 아직은 안심할 상황이 아니다. 무엇보다 튀르키예의 심장부 이스탄불과 앙카라 지방정부를 야당에 내주었다. 지방선거에서 확실한 승리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5년 후 대선에서 재선할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다. 현재 여야로 확연히 분리된 튀르키예에서 자신에게 확실하게 등을 돌린 48%의 표를 가져와야 한다. 대부분 도시 거주자이며 중산층인 국민에게 어필할 수 있는 분명한 방법은 경제 회복, 친서방으로의 선회 그리고 EU 가입 등이다. 그렇다고 튀르키예가 러시아를 버렸다고 판단하면 오산이다. 오히려 ‘친서방 유턴’이 러시아와의 경제 협력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치밀한 계산과 자신감의 표출로 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관광산업·에너지 등에서 이미 두 나라는 마주 잡은 두 손을 절대 뿌리칠 수 없는 강력한 파트너다.  내년 대선을 앞둔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은 대(對)중동 외교에서 중요한 실책을 저질렀다고 비난받고 있는 탓에 어떻게든 중동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튀르키예를 버리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더구나 튀르키예는 지정학적으로 서방이 러시아에 절대 내줄 수도 없고, 내주어서도 안 되는 마지막 보루다. 지금의 미·중 경쟁 속에 서방과 나토의 결속을 위해서는 튀르키예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는 에르도안은 오히려 러시아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튀르키예의 몸값을 올렸다. 서구 사회에 대한 ‘몽니’로 국익을 추구한 실리외교 결과, 국제무대에서 튀르키예의 입지와 발언권은 한층 강화됐다.
5월5일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왼쪽)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 콘스탄틴 궁전에서 회담하고 있다. ⓒAP 연합
5월5일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왼쪽)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 콘스탄틴 궁전에서 회담하고 있다. ⓒAP 연합

‘오스만 제국의 재현을 꿈꾸는 술탄’

그렇다면 튀르키예공화국 100년을 맞이해 새롭게 출범한 에르도안 대통령이 그리는 튀르키예는 어떤 모습일까. 그가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와 이상은 무엇일까. 튀르키예의 초대 대통령이자 국부(國父) 아타튀르크 무스타파 케말이 지향했던 나라는 정교가 분리된 세속주의 국가였다. 공화국 수립 이래 친서방 정책으로 일관했던 튀르키예는 구(舊)소련(지금의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하고자 나토 가입을 희망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튀르키예는 미국, 영국, 캐나다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대규모 지상군을 파병했고, 서방국가와 안보와 가치를 공유했다. 한국전쟁 참전의 공로를 인정받아 튀르키예는 1952년 나토 가입에 성공했다. 이어 국가적 숙원을 실현하고자 1987년에는 유럽연합(EU)에 가입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EU는 인권 등 요건 미비를 이유로 오늘날까지 확답을 미루고 있다.  튀르키예가 서방에 대한 일방적 구애에 지쳐 있을 때 에르도안이 등장했다. 그는 다른 꿈을 꾸었다. 또 다른 튀르키예를 구상하는 듯 보였다. ‘오스만 제국의 재현을 꿈꾸는 술탄’이 되어 이슬람 세계와 투르크 국가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빅브러더 역할을 했다.  이런 에르도안 대통령이 EU의 문을 세차게 두드린다면 그것은 공화국 이념 실현보다는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한 전략일 수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에게는 가장 강력한 카드가 아직 남아있다. 바로 ‘난민’이다. 현재 튀르키예에는 공식적으로 약 500만, 비공식적으로 1200만 명에 가까운 시리아 등 중동 난민이 있다. 에르도안은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략으로 그들에게 시민권과 투표권을 부여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재선의 영광을 안겨주는 데 기여한 난민들은 머지않아 유럽연합의 굳게 닫힌 문을 여는 황금열쇠가 될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 국제질서를 움직일 ‘키맨’이 될 에르도안 대통령의 행보를 주목해야 할 이유다.  
저작권자 © 시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