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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청, 통일교에 80개 항목 세 번째 질문서 보내…5월 중 해체 여부 결정
통일교가 추진한 한일해저터널 건설을 위한 토지 구입 문제도 불거져
한일해저터널 구상은 日 대동아전쟁 부산물
지난해 7월8일 아베 신조 전 총리 피격 사건을 계기로 수면 위로 부상한 통일교의 한일해저터널 대프로젝트는, 사실 통일교 문선명 교주가 처음으로 제창한 것은 아니다. 과거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이어서 동남아시아를 하나로 묶는 침략전쟁의 야욕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맨 처음 구상했던 것이다. 1930년대 일본→조선→중국→베트남→캄보디아→태국→말레시아→싱가포르로 이어지는 약 1만km의 철도를 건설하는 ‘대동아종관철도구상(大東亞縱貫鐵道構想)’이 구체화되면서 시작된 것이다. 일본에서 싱가포르까지 하나의 선로를 잇기 위해서는 한일해저터널이 필요했던 것. 물론 이 구상은 1945년 태평양전쟁이 일본의 패전으로 막을 내리면서 전면 중지되었지만, 그 전까지는 일본 정부에서 심혈을 기울여 추진했던 침략전쟁 프로젝트였다. 이런 스토리를 담고 있는 한일해저터널이 또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1981년 11월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 의해서였다. 서울에서 열린 통일교 주최의 ‘과학 통일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문 교주가 갑자기 ‘국제하이웨이 프로젝트’를 제창했다. 그 일환으로 먼저 한일해저터널을 건설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 후 문 교주의 말을 ‘어록’이라고 칭할 만큼 신처럼 떠받드는 통일교 신자들에 의해 한일해저터널 프로젝트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82년 4월, 일본에서 한일해저터널 추진 단체로 ‘국제하이웨이 건설사업단’이 조직되고, 1983년 5월에는 ‘일한터널 연구회’가 도쿄에 설립됐다. 이 단체에는 아소 다로 전 총리, 고가 마고토 전 운수성 장관, 규마 후미오 전 방위청 장관 등 자민당의 고위 간부가 대거 고문으로 참여했다. 1986년에는 사가현 가라쓰시 나고야(名護屋)에서 마침내 ‘일한나고야조사갱도’ 기공식이 열렸다. 이후 470m 정도 굴을 파 나갔고 그러는 동안 한국과 일본인 통일교 신자들이 이 공사 현장을 마치 성지 순례하듯이 견학차 다녀갔다. 통일교 내에 해저터널 전문 투어 프로그램이 있을 정도였다. 2016년 문선명 교주가 사망한 뒤 통일교의 제1인자가 된 부인 한학자씨가 방일해 이 갱도 공사 현장을 시찰한 후엔 더 많은 신자가 몰려들어 한때 관광 명소가 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한일해저터널을 칭하는 ‘일한하이웨이’ 재단에서는 일본 통일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해저터널 공사 비용을 위한 ‘1밀리 운동’을 펼친 것. 1밀리 한 계좌당 5만 엔의 헌금 액수를 책정했다.일본 통일교 신자 상대로 터널 헌금 독려 운동도
그러자 신자들 사이에서는 한 사람당 10계좌, 혹은 100계좌 등 경쟁하듯이 거액의 헌금을 하기 시작했다. 일부 신자의 경우 빚을 내서 헌금하는 이도 있었다. 이로 인해 가족 간에 갈등이 생기고 심지어 가정 파탄에까지 이르는 신자가 속속 나타났다. 그러자 일부 시민단체에서 “경제적 타당성이 없는 한일해저터널 추진은 통일교가 막대한 헌금 모금을 위한 구상이 아닌가?”라며 문제를 제기하자 ‘국제하이웨이’ 재단은 언론의 왜곡된 보도라고 전면 부인했다. 이런 논란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 지난해 7월 나라시에서 선거유세 중 피격당한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사망 사건이었다. 아베를 저격한 이가 다름 아닌 어머니가 통일교 신자였던 야마카미 데쓰야(42)였다. 그의 어머니는 남편의 유산은 물론 아들들의 생활비와 학비까지도 모두 통일교에 헌금으로 바쳤다. 이 때문에 그의 가정은 생계를 걱정할 정도로 극빈자로 전락했고,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결국 야마카미는 일본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르며 통일교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아베에 대해 앙심을 품고 그를 살해한 것이다. 아베 같은 거물 정치인이 통일교를 지원한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어 그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고 경찰 조사에서 밝혔다. 통일교가 추진하던 한일해저터널 프로젝트에 한국도 직간접적으로 관여해 왔다고 일본 언론들은 보도하고 있다. 1991년 노태우 대통령은 방한한 가이후 도시키 총리에게 해저터널 추진 의향을 나타내 함께하기로 합의했고, 2000년 9월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방일 때 모리 요시로 총리에게 한일해저터널 건설 구상을 제안했다. 이에 모리 총리는 같은 해 해저터널을 한일 공동으로 건설하자고 한국 정부에 역제안하기도 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남북한 문제가 해결되면 경제적 관점에서 검토해볼 수 있다고 밝혔고, 2010년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후쿠다 야스오 총리와 합의한 ‘한일 신시대공동프로젝트’ 21개 항목 중 첫 번째로 한일해저터널 건설을 채택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2021년 부산시장 선거에서 박형준 당시 후보와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한일해저터널 프로젝트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하태경·성일종 국민의힘 의원이 찬성하며 선거운동을 했다. 적어도 오는 5월 즈음이면 통일교의 운명이 정해진다. 일본에서 살아남느냐, 아니면 해체되느냐가 결정된다. 물론 이 같은 판단과 결정은 기시다 정부가 내려야 한다. 하지만 일본 국민은 기시다 정부를 믿지 않는다. 아니 못 믿는다. 왜냐하면 여당인 자민당과 통일교의 운명이 같다고 믿기 때문이다. 1월24일, 중의원 운영위원회의 여야 대표가 호소다 히로유키 중의원 의장을 비공개로 만났다. 호소다 의장과 통일교의 관계를 추궁하기 위해서였다. 작년, 아베의 피격으로 일본 열도가 통일교 문제로 들끓었을 때 호소다 의장은 통일교가 주최하는 공식 행사에서 총 8회에 걸쳐 인사말을 한 적이 있다고 인정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 8회라는 횟수도 영상 증거가 있는 것에 한해 인정한 것이어서 당시 일본 언론의 질타를 받았다. 24일 면담은 바로 이 연장선에서 야당 의원들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기시다 총리, 하야 가능성까지 거론
이날 호소다 의장은 통일교의 선거운동 관여, 국가의 정책 영향 등에 대한 야당 의원들의 질문에 결코 그런 일은 없다고 부인했다. 또한 2019년 10월, 통일교 계열 단체가 주최하는 모임에서 “회의 내용을 즉시 아베 총리에게 보고하겠다”고 인사말을 한 것에 대해서도 “그것은 교단과 아베씨가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립서비스로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베씨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이 같은 호소다 의장의 뻔뻔한 태도에 여론은 언제까지 책임 회피를 할 것이냐며 들끓었다. 기시다 총리에 대한 여론도 마찬가지다. 현재 기시다 총리는 사면초가다. 전임 총리였던 스가 요시히데가 월간지 문예춘추 2월호와의 인터뷰에서 “기시다는 파벌정치와 결별하라! 그러지 못하면 총리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하야를 요구한 것이다. 기시다가 하야한다는 전제하에 차기 총리 후보들의 순위 매김이 일본 언론에 거론되는 실정이다. 고노 다로 전 외무장관, 이시바 시게루 전 방위청 장관, 고이즈미 신지로 전 환경청 장관 등이 현재 총리 후보 하마평에 오르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내각 지지율은 4개월째 하락 추세로 20%대(지지통신)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아베 피격 후 전격적으로 장례식 형식을 국장으로 결정한 이후 기시다 내각에 대한 지지율은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한국과의 관계 재정립도 한국이 굴욕적으로 모든 것을 굽히고 들어오지 않는 한 국내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본 정부가 양보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차제에 과연 기시다 내각이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해체를 명령할 수 있을지, 어쩌면 이를 기점으로 기시다 총리의 위상이 ‘현직’과 ‘전직’으로 달라지는 터닝포인트가 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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