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STX중공업 인수 쟁탈전 계기로 재벌가 밥그룻 싸움 수면 위로
재벌가 핵분열하면서 동족상쟁 불가피…결국은 각자도생 ? 

재벌가 밥그릇 싸움에는 피도 눈물도 없다. 재계는 지금 오너 3·4세 경영인들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새로운 먹거리 발굴을 위한 치열한 ‘영토전쟁’을 벌이고 있다. 특히 대기업 차기 총수로서 경영 능력을 입증해야 하는 후계자로서는 한 발짝도 물러날 수 없는 상황이다. 선대 때부터 지켜져 왔던 ‘신사협정’은 깨진 지 오래다. 혈육 간 신경전은 예삿일이며, 일부는 법적 다툼도 불사한다. 전문가들은 대기업 오너 일가들이 세대를 거듭하며, 친족 분리 과정에서 이 같은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왼쪽)김동관 한화솔루션 부회장, 정기선 HD현대 사장 ⓒ한화솔루션·HD현대 제공

경영 능력 시험대가 될 조선업 ‘패권경쟁’

선박엔진 업체 STX중공업 인수를 놓고 라이벌 구도를 형성 중인 한화와 HD현대가 대표적인 사례다. 2022년 12월말 한화는 STX중공업 인수를 위한 예비입찰에 참여해 실사를 진행하고 있다. HD현대의 중간지주사인 한국조선해양도 지난해 12월15일 인수의향서(LOI)를 제출하며 일찌감치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배경에는 오너 3세들이 있다. 김동관 한화솔루션 부회장과 정기선 HD현대(옛 현대중공업그룹) 사장이 STX중공업 인수를 위해 진검승부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주목되는 사실은 김동관 부회장과 정기선 사장이 재계에서도 소문난 절친 관계라는 점이다. 각각 1982년생, 1983년생으로 비슷한 나이인 데다, 서로의 경조사를 챙길 만큼 각별하다. 정 사장은 2016년 김 부회장 조모상을 챙겼고, 김 부회장은 코로나19 대유행 당시인 2020년 정기선 사장 결혼식에 직접 참석하면서 남다른 친분을 과시했다. 이들의 아버지인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역시 장충초등학교 동창이며, 친구 관계다. 이렇듯 집안 어른들이 친하게 지내면서 비슷한 또래인 김동관 부회장과 정기선 사장도 가까워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조선업 패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이 펼쳐질 것으로 전망된다. 사실 그동안 한화와 현대중공업은 각각의 사업 영역이 달랐던 만큼 경쟁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한화가 최근 대우조선해양을 거머쥐면서 조선업 진출의 신호탄을 쐈다. 이어 STX중공업까지 품어 선박부터 엔진까지 조선 분야의 ‘수직계열화’를 노리고 있다. 국내 조선업계의 오랜 강자였던 현대중공업은 사업 시너지를 위해 STX중공업 인수전에 뛰어들었는데, 한화라는 복병을 만나게 됐다. 특히 김동관 부회장과 정기선 사장이 이번 인수전을 주도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승부의 결과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그룹 내 계열사들과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는 만큼 인수전에서 패배할 경우 향후 경영 리더십에 상당한 타격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 때문에 STX중공업 인수전이 한화·현대중공업 오너 3세들의 경영 능력 시험대가 될 것으로 재계는 보고 있다.  

희미해진 ‘오래된 묵계’

그런 점에서 인수합병(M&A) 시장은 재벌가 각자도생(分别圖生)의 각축장이라고 할 수도 있다. 대기업들이 성장동력 확보 및 사업 다각화 과정에서 집안 형제 혹은 동업자의 사업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지붕 아래 있었던 LG그룹과 GS그룹은 2004년 계열 분리 당시 ‘5년간 각자의 주력 사업과 중복되는 사업에 진출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신사협정을 맺었다. 법적 효력은 없었지만, 구씨와 허씨 가문의 57년간의 동업과 신뢰를 상징하는 오랜 묵계였다. LG그룹을 대표하는 구씨 가문과 GS그룹을 대표하는 허씨 가문의 동업은 1대인 구인회-허만정 회장부터 3대인 구본무-허창수 회장까지 이어졌다. 지난 57년간 불협화음 없이 이뤄낸 동업관계는 재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다. 계열 분리 과정 또한 별다른 잡음 없이 합리적이고 순조롭게 진행된 것이 이를 방증한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두 기업이 맺었던 상호불가침 원칙은 흐려졌다. 점차 겹치는 사업이 많아졌고, M&A 시장에서의 경쟁도 빈번해졌다. GS그룹은 2009년 쌍용(현 GS글로벌)을 인수하면서 상사업에 진출했고, LG상사와도 경쟁관계가 됐다. 아울러 GS건설이 있음에도 LG그룹은 서브원을 통해 건설업을 시작했다. 2011년 수처리 운영 전문업체 대우엔텍 인수전에서 LG전자와 GS건설이 맞붙으면서 경쟁 구도가 또다시 형성됐다. 대우엔텍은 결국 LG전자 품에 안겼다. 2013년에는 웅진케미칼과 STX에너지 인수전에서 LG와 GS의 양자 대결 구도가 펼쳐졌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두 기업은 단 한 번도 신경전을 펼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최소한의 동업자 정신이 이어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로 인해 알려지지 않은 일화도 있다. GS그룹은 2007년 사업 다각화 차원에서 하이마트(현 롯데하이마트) 인수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LG투자증권의 후신인 우리투자증권(현 NH투자증권)은 당시 하이마트 인수를 위해 GS그룹과 경합하던 유진그룹에 수천억원 규모의 지급보증을 섰다. 관련 내용을 보고받은 허창수 회장은 대로했다. GS그룹은 당시 오너 일가를 포함한 그룹의 자산 운용을 우리투자증권에 위탁한 상태였다. 허 회장은 “우리투자증권에 위탁한 물량을 모두 빼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범삼성가로 통하는 삼성과 CJ는 과거 대한통운 인수 과정에서 첨예한 집안싸움을 벌였다. 발단은 2011년 대한통운 인수를 위해 CJ그룹과 컨소시엄을 맺었던 삼성증권이 일방적으로 계약을 철회하면서였다. 그리고 같은 날, 삼성그룹의 다른 계열사인 삼성SDS가 포스코와 손잡고 새롭게 대한통운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당시 CJ는 인수전을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시킨 책임을 물어 삼성을 상대로 법적 대응까지 예고했다. 재계에서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이맹희 CJ그룹 회장의 해묵은 형제 갈등이 배경이 된 게 아니냐는 해석을 내놨다. 실제로 그해 6월 국세청은 이맹희 회장 등 삼성가 형제들에게 이병철 회장 차명재산의 실명 전환과 관련해 상속을 포기하는 것인지 묻는 공문을 발송했다. 삼성 측은 즉각 이재현 CJ 회장 측에 상속 포기 각서를 요구했지만 합의서에 회신하지 않았다. 이후 이맹희 회장은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7100억원 규모의 상속 소송을 제기했으며, 삼성전자는 CJ 측에 맡겼던 물류 계약을 중단하는 등 진흙탕 싸움으로 번졌다. 형제간 계열 분리 이후 사업 영역을 둘러싼 동족상쟁(同族相爭)도 흔한 풍경이다. 최근 침대업계 1·2위인 에이스와 시몬스가 가격 인상을 두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에이스와 시몬스는 창업주 안유수 회장이 설립했으며, 두 회사는 형제 회사나 마찬가지다. 에이스는 안유수 회장의 장남인 안성호 대표가, 시몬스는 차남인 안정호 대표가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두 회사는 지금까지 치열한 경쟁을 해오면서도 서로를 공개적으로 언급하며 대립각을 세운 적이 없다는 점에서 이번 신경전이 형제간 왕위 쟁탈전으로 비화하는 모양새다. 현재 두 형제는 가격 인상이라는 예민한 문제를 놓고 공개적으로 ‘우리가 덜 올렸다’는 식으로 기 싸움을 펼치고 있다. 사실상 선방을 날린 건 시몬스였다. 1월2일 시몬스는 보도자료를 통해 자사의 가격 동결을 발표하면서 에이스는 지난해 제품 가격을 최대 20% 올렸다고 밝혔다. 시몬스는 이어 “경기불황과 인플레이션으로 모두가 힘든 상황에서 당장의 어려움 때문에 소비자와 협력사에 부담을 전가할 수는 없다”며 “다른 방법을 강구해 이 위기를 함께 극복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마디로 매년 가격을 인상한 에이스를 겨냥해 우회적으로 도발한 것이다. 일주일간 침묵을 지킨 에이스는 1월9일 반격에 나섰다. 시몬스가 설명한 가격 인상 폭과 횟수를 조목조목 언급하며 반박했다. 에이스침대는 “당사는 2017년 12월부터 지난해까지 약 5년간 두 차례 가격을 인상했으나 시몬스는 2017년 말부터 여섯 차례 가격을 올렸다”고 밝혔다. 에이스침대는 자사가 이 기간에 인기 매트리스 가격을 30%대 인상한 반면, 시몬스는 65~87% 정도 올렸다고 비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지난해 백화점 매장 매출이 1700억원을 돌파하며 불황에도 업계 2위(시몬스)와의 격차를 확 벌렸다”며 추격자인 시몬스를 ‘저격’했다. 비슷한 일은 과거에도 있었다. 일명 ‘라면 전쟁’이라고 불린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과 그의 동생인 신춘호 농심 회장의 대결이 그렇다. 신격호 회장은 ‘일본 롯데’로 성공한 뒤 1967년 국내로 들어와 롯데제과를 설립했다. 당시 신춘호 회장은 1965년 롯데공업을 세워 롯데라면을 팔았다. 신격호 회장이 라면 사업 진출을 강하게 반대했지만, 신춘호 회장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후 신춘호 회장은 1978년 사명을 농심으로 바꾸며 제2의 창업을 선언했고, 이 과정에서 두 형제는 의절했다. 이 일로 신춘호 회장은 선친 제사에도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2009년 롯데가 ‘롯데라면’을 출시하면서 양측의 신경전이 표면화됐다. 롯데가 라면업계 부동의 1위인 농심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여기에다 롯데라면 판매처 확대를 신격호 회장이 적극적으로 지시했다는 얘기가 전해지면서 신춘호 회장과 정면 대결을 벌이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됐다. 이 외에도 분가 이후 ‘서로의 사업 영역을 지켜주자’는 묵계가 있었지만 롯데제과가 스낵 사업에, 농심이 유통업(메가마트)과 호텔업(호텔농심)에 뛰어들면서 균열이 일었고, 롯데가 37년 만에 자체 브랜드 라면까지 만들면서 갈등이 극에 달했다. 국내 재벌그룹이 그동안 지켜왔던 묵계를 깨고 상대방의 사업 영역까지 넘보는 까닭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두 가지 이유를 꼽았다. 첫 번째는 신성장동력 확보를 위함이다. 특히 2008년 외환위기 이후 선택과 집중을 통해 체질을 개선한 대기업들이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 경쟁적으로 신규 사업에 진출하고 있다. 아울러 기존 사업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연관 사업 다각화 전략을 구사하다 보니 불가피하게 영역이 겹치는 것이라는 게 지배적인 평가다.
ⓒ연합뉴스
ⓒ연합뉴스

재계 핵분열로 치열해진 밥그릇 싸움

두 번째는 재계 오너 일가들의 핵분열이다. 창업 1세대에서 2세대로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활발한 계열 분리가 일어났는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밥그릇 싸움이 벌어졌다.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대기업집단 지정 현황에 따르면 6명의 창업주에서 시작된 대기업들이 친족 분리 이후 오너 2·3세들에 의해 17개로 쪼개졌다. 이병철 창업주가 설립한 삼성은 현재 삼성(손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CJ(손자 이재현 CJ그룹 회장), 신세계(손자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로 분화됐다. 이 외에 현대가(현대차, 현대중공업, 현대백화점, HDC, KCC, 현대해상보험, 한라), LG가(LG, GS, LS), 금호가(금호아시아나, 금호석유화학), 롯데가(롯데, 농심), 한진가(한진, 메리츠금융) 등이 있다. 이들 기업은 대체로 계열 분리 전후로 집안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최근 잇따라 오너 3·4세들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3차 핵분열도 가속화할 것이며, 영역 다툼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1990년대 이후 국내 대기업의 역사는 계열 분리의 역사와 궤적을 같이한다. 창업 1세대에서 2세대로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분열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재계에서는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중후반까지가 1차 분리였다면, 2010년부터 현재까지가 2차 핵분열이라고 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대기업들이 계열 분리를 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영역을 침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새롭게 등장한 오너 3·4세 후계자들은 자신의 경영 능력을 입장하기 위해 신사업을 발굴하고, 기업의 새로운 동력을 찾아야 한다”며 “세대를 거듭할수록 선대의 유지와 가족 관계는 느슨해질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각자도생의 길을 택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시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