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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투자보다 위기 대응 능력 키울 때” 한목소리
절박함 묻어나는 재계 총수들의 신년사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최근 전국 30인 이상 기업 240곳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도 이런 비장함이 묻어난다. 올해 경영계획을 수립한 기업 중 90.8%가 현상 유지(68.5%)나 긴축 경영(22.3%)을 실시하겠다고 답했다. 확대 경영을 택한 곳은 9.2%에 그쳤다. 긴축 경영을 실시하겠다는 기업 중 72.4%는 구체적 시행계획으로 전사 차원에서 원가 절감에 나선다고 응답했다. 이 같은 분위기는 1월2일 개최된 ‘2023년 경제계 신년인사회’에 고스란히 나타났다. 이날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지난해 우리는 유례없이 어려운 경제 환경 속에서도 수출 세계 6위를 달성했고, 대규모 방산 수주, 누리호 발사, K콘텐츠의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면서도 “올해 우리가 마주한 경제 여건은 녹록지 않다. 지정학적 리스크, 공급망 불안, 경제안보 질서 변화에 글로벌 저성장까지 겹쳐 상당히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경제계 신년인사회는 대·중소기업이 함께 힘을 모아 위기를 극복해 나가자는 취지에서 대한상공회의소와 중소기업중앙회가 공동으로 개최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처음 개최된 이날 신년인사회는 예년과 달리 5대 그룹 재계 총수가 대거 참석해 관심을 모았다. 윤석열 대통령도 행사에 참여해 경제인들을 격려하며, 경제 활력 제고에 힘써줄 것을 당부했다. 대통령이 대한상공회의소 주최 경제계 신년인사회에 참석한 것은 2016년 1월6일 박근혜 대통령 이후 7년 만이다. 그만큼 현재 상황을 엄중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재계 총수들의 신년사에도 경제위기에 대한 우려감이 깔려 있다. 대표적인 곳이 삼성전자다.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과 경계현 사장은 이재용 회장 대신 올린 공동 명의 신년사에서 “위기 때마다 더 높이 도약했던 지난 경험을 거울삼아 다시 한번 한계의 벽을 넘어야 한다”면서 “과감한 도전과 변신으로 도약의 전환점을 만들자”고 말했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올해 반도체 시장 불황으로 10년 만에 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신증권은 최근 보고서에서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 부문 영업이익 추정치를 1분기 695억원 적자, 2분기 674억원 적자로 예상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문이 영업적자를 기록한 것은 2009년 1분기(7052억원 적자)가 마지막이다. 국내외 경제 여건이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삼성전자 실적 눈높이가 급격하게 낮아진 것이다. 특히 지난해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와 함께 지속된 글로벌 인플레이션으로 국내 전자업계는 이례적인 불황을 겪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인플레이션, 소비심리 위축, 중국 상하이 봉쇄 등으로 IT제품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며 과잉 재고 현상이 발생했다. 재고가 누적되고 출하량이 줄어들면서 수익성도 급격히 악화됐다. 이 때문에 매출액은 늘지만, 영업이익은 오히려 반 토막에 가까운 저점을 찍는 ‘불황형 흑자’가 올해도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삼성·SK·LG 등 반도체 시장 불황으로 비상
SK하이닉스와 LG전자 등도 비슷한 처지다. 신용분석 기업 에프엔가이드에 따르면, SK하이닉스의 영업이익은 지난해 3분기 60.3% 추락에 이어 4분기 적자 전환이 유력하다. 메모리반도체 매출 비중이 95%에 달하는 만큼 반도체 업황 부진의 직격탄을 맞았다는 분석이다. SK하이닉스는 올 상반기까지 지속될 업황 부진에 대비해 감산 및 투자 축소 등 긴축 경영에 돌입한 상태다. LG전자의 경우 가전·TV 사업의 부진으로 수익이 뒷걸음질할 것으로 예상된다. LG전자의 지난해 4분기 매출 전망치는 22조6723억원, 영업이익은 4698억원이다. 매출은 분기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지만, 영업이익은 전분기(7466억원)에 비해 크게 후퇴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역시 신년사를 통해 쉽지 않은 올해 경영 환경을 예고했다. 그는 1월1일 전체 구성원들에게 이메일로 보낸 2023년 신년 인사에서 어려운 경영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지켜야 할 가치를 전하며 “우리에게 소중한 가치를 되새기며 경영 시스템을 단단히 가다듬는 기회로 삼아 나아간다면 미래는 우리의 편이 될 것”이라고 했다. 전자업계와 달리 현대차는 호실적이 전망된다. 금융정보업체 와이즈리포트에 따르면, 최근 3개월 내 보고서를 낸 증권사들의 실적 전망치(컨센서스)를 집계한 결과 현대차의 올해 연간 영업이익은 10조491억원으로 전망됐다. 증권사들의 예상대로 올해 현대차 영업이익이 10조원을 넘긴다면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이다. 차량용 반도체 수급난이 완화되고 제네시스와 스포츠유틸리티차(SUV) 등 고가 차량의 판매 비중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으로 평가된다. 아울러 미국과 유럽 등 주력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이다. 하지만 현대차 역시 장밋빛 전망만 있는 건 아니다. 북미산 전기차에만 세액공제 형태로 보조금을 주는 IRA 등은 현대차 실적의 변수로 꼽힌다. 현대차의 전기차는 한국에서 전량 생산해 미국으로 수출하는 구조를 갖춘 탓에 보조금 대상에서 제외됐다. ‘미국발’ 금리 인상과 경기 침체 우려도 악재 중 하나다. 국내의 경우에도 이미 캐피털사들의 자동차 할부금리는 최고 연 10%대로 치솟았다. 할부금리가 급등하자 계약한 자동차를 취소하는 사례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이 때문에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신년사에서 “코로나19 여파에 금리와 물가가 상승하고 환율 변동 폭이 커졌을 뿐 아니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은 지정학적 리스크가 더해지며 경제 불확실성이 더욱 커졌다”며 “다가오는 위기를 두려워하며 변화를 뒤쫓기보다 한발 앞서 미래를 이끌며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롯데·신세계·현대백화점 등 유통가 수장들은 신년사를 통해 ‘위기 대응 능력’을 주문했다. 올해는 고물가·고금리·고환율 등 혹독한 경기 침체가 점쳐지는 위기 상황이지만 기본을 지키며 도전과 혁신으로 도약하자는 것이 유통 ‘빅3’ 총수들의 올해 핵심 경영 키워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고객 신뢰’를 확고히 하고 각자 저마다의 성장의 길을 찾아야 생존할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드러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불확실성 속에서 새로운 롯데를 만들자고 신년사를 통해 강조했다. 신 회장은 “전 세계적으로 시장의 변동성과 불확실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영구적 위기(Permacrisis) 시대의 도래는 우리가 당연하게 해왔던 일과 해묵은 습관을 되돌아보게 한다”며 “단순히 실적 개선에 집중하기보다 기존의 틀을 깨부수고 나아가겠다는 의지가 중요하다”고 당부했다.“실적 개선보다 기존 틀 깨부숴야”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위기 대응 능력이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정 부회장은 “불이 나면 누가 불을 냈냐, 누구의 책임이냐 등의 얘기를 하기보다 먼저 불을 끄는 게 우선”이라며 신속한 위기 대응을 강조했다. 그는 이어 “발생한 위기를 진정성 있게 돌아보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대응 방식도 개선해야 한다”면서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는 단어인 ‘위기의식’이 오히려 다가오는 재난을 막아주는 고마운 레이더 같은 역할을 하고, 위기는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오히려 기회가 되기도 한다”고 제안했다. 손경식 CJ그룹 회장은 올해가 글로벌 라이프스타일 기업으로 도약할 기회라고 밝혔다. 손 회장은 “급변하는 국내외 경영 환경은 우리에게 위기이자 아주 큰 도약의 기회”라며 “2년째 최고 실적을 달성하고 있음에도 그룹 시가총액이 정체된 것은 CJ그룹의 경쟁력에 대한 시장의 확신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이어 손 회장은 “새롭게 정립할 2025 중기전략을 성공적으로 실행해 글로벌 라이프스타일 기업으로 도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재계 총수들은 하나같이 올해 경영 환경이 좋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10대 그룹 신년사에서 ‘위기’라는 키워드가 급부상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1월3일 기업 데이터 연구소 CEO스코어가 국내 10대 그룹의 2023년 신년사에 언급된 키워드를 조사한 결과, 가장 많이 언급된 키워드는 고객(35회)이었다. 이어 성장(34회), 미래(34회), 위기(29회), 기술(28회) 등이 사용 빈도 2∼5위를 차지했다. 올해 4위에 오른 위기는 2021년과 지난해 10위권 안에도 들지 못하던 키워드였다. 그러다 올해 4위로 올라선 것이다. 이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미·중 갈등 고조 등 악재 속에 글로벌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 위기가 고조되면서 그룹들의 경각심이 반영된 것이라고 CEO스코어는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