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식으로든 내가 잘못한 모든 사람에게 온 마음을 다해 용서를 구한다.” 지난해 12월31일 베네딕토 16세 전(前) 교황이 돌아가셨다. 교황이 남긴 유언을 전하는 뉴스를 듣는데 ‘용서’라는 말이 크게 울렸다. 아, 역시 큰 인물은 다르구나. 가톨릭 사제 중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그는, 사제가 된 뒤에 무수한 고해성사를 했으리라. 죄를 고백하는 신자들을 용서하는 데 익숙했을 텐데, 스스로 용서받기를 간청하는 유언을 남기다니.
교황청이 공개한 그의 영적 유언은 95세를 일기로 선종하기 직전에 작성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교황 즉위 1년 뒤인 2006년 미리 작성했다는 것이다. 베네딕토 16세는 여러 면에서 전임자들과 다르게 독특한 교황이었다. 교황으로 즉위하고 8년이 되지 않아 건강 문제로 스스로 물러났는데, 종신직인 교황의 자진 사임은 수백 년 만의 매우 희귀한 일이라고 외신들은 전했다. 2000여 년의 천주교 역사상 스스로 물러난 교황이 5명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는 또 놀랐다. 권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도취되면 빠져나오기 힘든 게 권력이라더니. 돈보다 권력이 무섭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서양미술사를 공부하며 교황을 은근히 풍자한 초상화를 많이 봐서 그런지, 나는 종교권력에 대해 별다른 경외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지금까지 교황을 그린 유명 미술작품들에는 대개 부정적인 묘사가 많았다. 교황청의 권력 다툼을 비꼰 라파엘로의 <레오 10세의 초상>, 벨라스케즈(Vel‘azquez)의 <이노센트 10세> 그리고 벨라스케즈의 교황 초상화를 모방한 프란시스 베이컨의 저 끔찍한 습작 그림을 생각해 보라.
입을 벌리고 비명을 지르는 교황. 그를 둘러싼 새장처럼 생긴 좌대는 권력을 휘두르는 권좌라기보다 최고 권력인 그를 가두는 감옥처럼 보인다. 교황의 얼굴에 공포를 그려 넣은 영국 화가 베이컨의 창의력, 권위에 도전하는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 그가 정규적인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이단아였기에 가능한 모험이 아니었을까. 어느 인터뷰에서 베이컨은 그의 교황 그림은 색채를 연구하기 위한 단순한 습작이라고 말했지만, 마치 고문을 당하는 듯 고통받는 모습으로 교황을 그린 화가의 의도, 그 속에 담긴 어떤 상징성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좀 젊고 활기찬 교황을 보고 싶은데 왜 항상 늙고 늙은 사람들이 교황에 즉위하나? 날라리 가톨릭 신자인 나는 새로운 교황 즉위 소식을 접해도 환호하기보다 시큰둥했고, 교황이 타계해도 그런가 보다며 별 느낌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자신이 알게 모르게 저지른 잘못을 용서해 달라는 그의 마지막 말은 진심이었고, 그의 진심은 나를 포함한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었다. 나도 그처럼 나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고, 나 또한 용서받으며 이 세상을 떠나고 싶다.
2022년에서 2023년으로 넘어가는 연말연초에 세계적인 인물들, 유명한 이들의 사망 소식이 유난히 많이 들려왔다. 지난해 12월30일 축구 황제 펠레도 긴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펠레의 유언은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였다. 마지막 은퇴 경기에서 그는 마이크를 잡고 관중에게 “Love Love Love 사랑 사랑 사랑”을 외쳤다. 브라질 축구 영웅이 남긴 한마디가 내 가슴을 때린다. 사랑하면 이해한다. 이해하면 용서한다.
교황과 축구 황제 중 하나를 고른다면? 사정이 허락된다면 나는 교황의 시신이 모셔진 엄숙한 교황청이 아니라, 산투스의 축구장에 가서 펠레와 마지막 작별을 하려는 추모객들 속에 끼고 싶다. 사랑이 용서보다 위대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