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과 실재’ 뒤섞인 리얼리티 예능
배우 이필모가 2월9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서수연과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은 비상한 관심을 모았는데, 이들이 리얼리티 연애 프로그램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바로 TV조선 《연애의 맛》이다.
종편 TV조선은 주로 뉴스 시사 프로그램으로 시청자에게 어필해 왔다. 하지만 보도채널이 아닌 종합편성 채널이기 때문에 뉴스 시사 부문에 편중된 상태가 지속될 순 없었다. TV조선은 다양한 부문을 발전시킬 계획을 세웠고, SBS 출신 서혜진 예능 PD를 영입했다. KBS 나영석 PD를 영입해 대박을 터뜨린 tvN과 같은 방식이다.
나영석 PD가 tvN으로 가 자신이 KBS에서 원래 잘하던 걸 보다 심화해 시도했던 것처럼, 서혜진 PD도 TV조선으로 가 자신이 SBS에서 원래 잘하던 걸 시도했다. 바로 리얼리티 관찰 예능이다. 서혜진 PD는 SBS에서 부부 생활을 관찰하는 《동상이몽2》를 히트시켰는데, TV조선에서도 부부를 관찰하는 《아내의 맛》을 기획하고, 연이어 가상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연애의 맛》도 내놨다.
초기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관찰예능이 식상하다는 지적부터 가상연애가 설정 방송 아니냐는 지적, 두 프로그램 모두 여성 차별적이라는 지적 등이 나왔다. 하지만 진정성 있는 이야기들이 나오자 비판은 줄어들고 이 프로그램들은 결국 종편 예능 최대 히트작 대열에 합류했다. 《아내의 맛》에선 매우 놀랍게도 함소원과 진화 커플이 인기를 견인했다. 함소원은 가끔 중국에서 전해지는 인터넷 이미지 정도로 알려진, 우리에겐 거리감 있는 연예인이었고 연하 중국 남성인 진화와 결혼했다는 소식에 대해서도 한국 인터넷에선 부정적인 반응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막상 《아내의 맛》에서 이 부부와 그 가족들이 진솔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선보이자 기존의 냉담했던 반응이 180도 달라졌다.
가상 연애가 진짜 된 사건
《연애의 맛》에선 김종민과 황미나가 진짜 같은 연애를 시작해 인터넷을 달궜다. 과거 연예인들이 등장한 가상연애 프로그램 《우리 결혼했어요》도 실제 연애로 보일 정도의 달달한 모습으로 큰 인기를 누렸었다. 하지만 프로그램 방영 중에 다른 사람과 열애했다는 말이 나오며 결국 ‘예능은 예능일 뿐’이라는 씁쓸한 깨달음과 함께 시청자의 관심이 식었다. 《연애의 맛》은 연예인과 연예인의 만남이 아닌 남성 연예인과 비교적 일반인에 가까운 여성의 만남으로 리얼한 느낌을 더 살렸다. 남성 연예인도 결혼을 고민할 시기의 출연자만 섭외해 두 사람의 만남을 더 절박하게 느끼게 했다. 《우리 결혼했어요》 때처럼 잠시 예쁜 그림 찍고 쿨하게 돌아설 젊은 아이돌 출연자들이 아니었다. 이렇다 보니 인기가 올라갔던 것인데 그 결정판이 이필모, 서수연 커플이었다.
이필모가 처음부터 서수연을 만난 것은 아니다. 프로그램 시작 당시엔 14살 어린 이엘린이 이필모의 상대였다. 이엘린은 모델 활동도 할 정도로 외적 조건이 화려했기 때문에 프로그램이 그럴듯한 ‘그림’ 뽑아내는 데는 좋은 캐릭터였다. 하지만 이필모와 맞지 않는다면서 하차하고 서수연과의 만남이 시작됐다. 서수연을 만난 이필모가 비로소 적극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프로그램 인기를 위해 연애감정을 연기하는 거라면 이엘린을 상대로 해도 됐을 텐데, 서수연에게만 그런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이필모의 감정은 진짜 같았다. 그러자 반응이 터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속도가 너무 빨라 시청자를 반신반의하게 했다. 만난 지 몇 주 만에 눈물까지 흘리며 호감을 고백하는 것이 과연 ‘리얼’인지에 의문이 제기됐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만남은 계속 이어졌고 급기야 결혼 발표까지 나왔다. 시청자 반응이 폭발했다. 그리고 올 2월 마침내 결혼식을 올렸다. 이로써 모든 의구심은 종식됐다. 이들의 사랑은 진짜였다. 리얼리티 연애 프로그램에서, 카메라 앞에서 연애하다 진짜로 결혼하는 커플이 등장한 것이다.
한국 방송 역사의 일대 사건이다. 김국진도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결혼에 골인했지만, 그 경우는 연애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일반 리얼리티 예능을 촬영하던 중에 동료와 가까워져 몰래 연애하다 결혼까지 한 사례다. 반면에 이필모는 만남과 열애 과정이 모두 카메라 앞에서 공개되는 가운데 결혼에까지 이르렀다.
가상이 진짜가 된 것이다. 연애 예능은 일주일에 한 번씩 방송된다. 시청자에게 이들의 열애 과정을 납득시키려면 일주일 단위로 감정선과 사건의 스토리가 연결돼야 한다. 하지만 진짜 연애는 하루에도 수많은 일이 터질 수 있다. 그래서 연애 예능과 진짜 연애가 겹쳐지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이필모 커플이 그런 고정관념을 깼다. 가상과 실재가 뒤섞인 《매트릭스》처럼 이제 리얼리티 관찰 예능과 실재의 구분이 모호해졌다. 리얼리티를 향한 시청자의 관심은 더 뜨거워졌다.
현실이 돼 가는 트루먼쇼
반면 리얼리티 예능이 단지 가상의 설정일 뿐이라고 일깨워 준 사건도 있었다. 최근 크게 화제가 된 강남 클럽 ‘버닝썬’ 사태가 그렇다. 빅뱅의 승리는 리얼리티 예능에서 자신이 ‘버닝썬’의 대표이고 직접 운영도 한다고 했다. 그곳에서 불미스러운 사고가 터지자 승리는 말을 바꿨다. 자신은 홍보를 담당하는 이사였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예능에서 승리를 성공한 젊은 사업가 캐릭터로 설정하다 보니 운영하지도 않는 클럽의 사장 행세를 했다는 것이다. 비난이 폭주했다.
《골목식당》에서도 연일 설정 방송 논란이 벌어진다. 막걸리집 사장과 백종원의 시음 대결이 조작이라는 지적이 나왔고, 자극성을 높이기 위해 문제가 많은 업주를 섭외하거나 악마의 편집으로 업주의 문제를 과장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70 정도의 문제가 있는 업주에게 100의 문제가 있는 것처럼 편집한다는 것이다.
이런 설정 방송, 조작 방송, 즉 작위적 리얼리티쇼에 대한 시청자의 반응은 싸늘하다. 과거 국민 예능이라는 말까지 들었던 SBS 《패밀리가 떴다》도 조작 방송 논란에 대해선 시청자의 질타를 받았었다.
반면에 이필모의 결혼으로 진정성이 증명된 《연애의 맛》처럼 진짜 이야기에는 찬사와 관심이 쏟아진다. 그러므로 이필모 결혼 이후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은 더욱 진짜 같은 이야기, 아니 진짜 그 자체인 이야기를 찾을 것이다. 카메라 앞에서 현실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더 많이 볼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연애의 맛》으로 이어진 커플이 《아내의 맛》에서 부부 생활을 보여주고, 아이를 낳으면 육아 예능으로 연결되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트루먼쇼’가 점점 현실이 돼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