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조원 규모 KDDX 사업 두고 비방전 이어 법적 다툼까지
재계 절친 김동관·정기선 부회장 외나무다리 격돌도
어디를 가나 ‘K혁신’이 인기다. BTS와 블랙핑크는 K팝의 신기원을 열었고, 드라마 《오징어 게임》과 영화 《기생충》은 K콘텐츠의 영향력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 CJ올리브영은 글로벌 여성 고객에게 K뷰티의 대명사로 각인되고 있다. 여기까지는 일반 대중도 잘 알고 있는 비즈니스 상식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지만 꼭 알아야 하는 또 하나의 산업 영역이 있으니 그게 바로 K방산이다.
방산은 국가안보의 핵심이다. 하지만 한국형 차기 구축함(KDDX) 사업, 항공모함, 구축함, 이지스함 등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가 오가며 한화오션과 HD현대가 이를 두고 갈등을 벌인다는 기사가 이어지고 있다. 대중에게는 쉽게 다가오지 않는 이야기지만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이슈와 논의가 여기에 숨겨져 있다. 방산(防産)은 쉽게 말해 방위산업의 줄임말이다. 즉, 국가 방위에 필요한 무기, 장비를 생산하고 개발하는 모든 산업을 의미한다.
K방산의 새 블루오션, KDDX
KDDX의 전체 이름은 ‘Korea Destroyer Next Generation’이다. 대한민국 해군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차세대 스텔스 유도탄 구축함을 표현하는 용어다. 여기에 ‘한국형’이라는 용어가 붙는 이유는 우리만의 기술로 구축함을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렇다면 구축함은 왜 만들어야 하는 걸까. 이를 위해서는 해양 전력의 핵심인 항공모함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항공모함은 현대전의 핵심 카드로 평가받고 있다. 북한이 미사일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할 때 미국은 늘 막강한 항공모함의 존재를 과시한다. 2017년 11월8일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회에서 연설하며 한반도 주변에 3대의 항공모함이 배치돼 있고, F-35 등 첨단 전투기가 탑재돼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미국 대통령이 자랑할 정도로 항공모함은 해양과 하늘을 모두 방어하는 첨단기지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항공모함은 원톱 주인공이다.
이 항공모함의 경호원이 바로 구축함이다. 항공모함 근처에서 1차 방어선을 유지하는 핵심 역할은 구축함의 몫이다. 대한민국은 성웅 이순신 장군의 후예답게 블루오션, 푸른 바다의 현대전에 강하다. 북한은 틈만 나면 동해와 서해로 미사일을 쏘아댄다. 고유의 구축함이 필요한 상황이다. 2020년부터 2036년까지 개발비 1조8000억원, 건조비 6조원을 들여 구축함을 만들겠다는 것이 KDDX 사업의 핵심이다.
한국형 구축함의 필요성은 간단하다. 구축함은 탄탄한 하드웨어도 중요하지만 정교한 소프트웨어가 훨씬 중요하다. 적의 미사일 요격부터 수중 및 항공까지 상대의 미사일 탐지거리 등을 정확히 도출해야 하기에 핵심기술이 총 집약돼야 한다. 미국 록히드 마틴의 이지스 시스템이 이 분야의 ‘끝판왕’이다. 글로벌 방산 뉴스에서 이지스함이 주연으로 등장하고, 록히드 마틴이 세계 최고의 방산업체로 군림하는 이유다. 대한민국 해군이 보유한 이지스함의 하드웨어는 한국산이지만 소프트웨어는 미국산이기에 우리는 예전부터 선체부터 전투체계, 레이더 등 모든 기술을 국내에서 개발한 첫 국산 구축함의 필요성을 주장해 왔다. 총 7조8000억원의 국민 세금이 투입돼 한국형 차기 구축함 6척을 건조하려는 KDDX 사업은 K방산의 블루오션이 열리는 시작점이다.
이 신기원을 잡기 위해 한화오션과 HD현대가 외나무다리에서 만났다. 두 회사를 사실상 이끌고 있는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과 정기선 HD현대 부회장은 서로의 경조사를 신경 쓰고 챙길 만큼 소문난 절친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해양으로 확장하려는 두 그룹의 전략적 방향성 앞에서 양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한화그룹은 한국판 록히드 마틴을 꿈꾼다.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한 후 한화오션으로 이름을 변경했을 때부터 바다는 한화의 성장 로드맵과 일치한다. 조선업에 강점을 지닌 HD현대와의 경쟁은 불가피하다.
기밀 유출에 관해 서로 얼굴을 붉힐 정도로 고발과 함께 미디어를 통해 비난과 비방을 확대하는 이유는 K방산의 주도권과 혁신이 바로 KDDX 사업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2030년까지 7조8000억원으로 6000톤급 차세대 구축함 6척을 건조하는 사업은 K방산의 경쟁력을 글로벌 시장으로 확장할 수 있는 데뷔전이다. 특수선 수주 잔량이 내년 이후 고갈되는 상황도 두 기업이 물러서지 않는 배경이 된다.
기본적으로 함정은 개념설계를 시작으로 기본설계에서 상세설계 그리고 선도함과 후속함 건조로 나뉜다. KDDX의 개념설계는 한화오션(옛 대우조선해양)이 수행했지만 기본설계는 HD현대중공업이 진행했기에 대립과 갈등은 불가피하다. HD현대중공업 직원의 KDDX 관련 군사기밀 탈취·누설은 개념설계부터 건조까지 이어지는 전체 가치사슬의 주도권을 틀어쥐려는 두 기업의 치열한 경쟁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전투구 아닌 건설적 경쟁 이뤄져야”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과 정기선 HD현대 부회장은 다음 달 초 미국 해군의 함정 유지(Maintenance), 보수(Repair), 정비(Overhaul)를 뜻하는 함정 MRO(유지, 보수, 정비)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미국은 500척이 넘는 함선을 보유하고 있고 MRO 시장에 해마다 20조원의 예산을 투입한다. 조선소 인력이 부족한 미국 함정의 MRO 시장을 차지하기 위해 두 기업이 또다시 경쟁에 나선 모습이다.
참고로, 조선업에서 중국의 성장은 가파르지만 기술력에서 중국은 아직 한국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은 기술 주권 시대를 초래했고 자국의 전략기술은 경제 안보의 필수요건이 되고 있다. 《최초의 질문》의 저자 이정동 서울대 교수는 “전략기술이 있어야 기술 주권을 가질 수 있고 기술 주권이 있어야 경제 안보가 보장된다”고 강조했다. 한화오션과 HD현대의 경쟁은 전략기술, K방산의 전초전이다.
현대전에서 이지스함은 ‘신의 방패’로 불린다. 신의 방패를 호위할 수 있는 구축함 개발 역량은 오직 한화오션과 HD현대만 갖고 있다. 한화오션과 HD현대의 로드맵은 연안을 넘어 대양으로의 진격을 꿈꾼다. 다만, 두 기업이 대양으로 가는 과정에는 국민의 염원이 담긴 8조원에 육박하는 세금이 쓰인다. K방산은 반드시 레드오션이 아닌 블루오션이 돼야 한다. 국민은 이전투구가 아닌 건설적 경쟁을 명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