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명 호남 출마 리스트’에 비명계 술렁…비명 지역구에 친명 의원 대거 도전
4·10 총선을 앞둔 민주당에는 세 가지가 없다. 통합과 단결이 없고, 중진들의 불출마·험지 출마 선언도 없다. 무엇보다 신뢰가 없다. 최근 민주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계파 갈등과 내홍에는 ‘공천’이라는 두 글자가 자리한다. 민주당에는 문재인 전 대통령이 20대 총선(2016년)을 앞두고 2015년 당대표 시절 만든 ‘시스템 공천’이라는 제도가 존재하지만, 이 시스템 공천이 지금 과연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작동할 것이라는 믿음이 민주당 전체에 없는 것이다.
시사저널 취재에 따르면 시스템 공천에 대한 불신은 계파를 가리지 않는다. 지금 친명(親이재명)계와 비명(非이재명)계를 가리지 않고 민주당 전체가 공유하고 있는 단 한 가지는 바로 ‘공포’다. 친명계는 이재명 대표가 없으면 공천을 받을 수 없다는 공포, 비명계는 이 대표에게 학살에 가까운 공천 불이익을 당할 것이라는 공포를 갖고 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공포의 한가운데에는 시스템 공천에 대한 불신이 자리한다. 지금 이재명 대표를 향해 “2선으로 물러나라”는 외침과 “말도 안 된다”는 주장이 당내에서 엇갈리는 상황의 근원에도 바로 이런 이유가 자리한다.
“좌표 찍히면 경선 통과는 ‘미션 임파서블’”
사실 총선을 앞두고 당내에서 공천 갈등이 벌어지는 일은 자연스럽다. ‘물갈이’가 있어야 ‘새 피 수혈’이 가능한 만큼 공천 배제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첨예한 갈등과 충돌은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이번 총선의 공천과 관련해 민주당에서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묘한 흐름이 관찰된다. 비명계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우려인데, 그 중심에는 이 대표를 지지하는 강성 지지층이 있다.
민주당은 ‘국민 50%·권리당원 50%’라는 국민참여경선 방식으로 총선 공천을 결정한다. 그런데 지금 민주당 권리당원의 상당수는 이 대표를 지지하는 강성 지지층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 객관적 현실이다. 실제 이 대표가 보유한 가장 큰 정치적 자산이자 믿을 구석이기도 하다. 이에 비명계는 이 대표가 인위적으로 컷오프라는 극단적인 공천 배제 방식을 쓰지 않더라도 강성 지지층에게 ‘낙선(비명계)’과 ‘당선(친명계)’의 좌표를 은근히 찍어주면 경선을 통과하는 것은 사실상 ‘미션 임파서블’이라는 우려 섞인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시스템 공천에 대한 불신과 이 대표가 비명계를 대거 배제할 것이라는 의심과 공포, 그리고 경선 과정에 강성 지지층이 대거 동원될 것이라는 우려가 한데 뒤섞인 결과는 ‘원심력 강화’로 나타나고 있다. 이낙연 전 대표의 탈당과 신당 창당은 초읽기에 돌입했다. 김종민·조응천·윤영찬·이원욱 의원이 참여하는 ‘원칙과 상식’ 또한 탈당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임혁백 공관위원장 임명 이후 이뤄졌을 현역 의원 ‘하위 10% 평가자’에 대한 통보도 원심력을 키우는 동력이 될 수 있다. 민주당은 이번 총선부터 하위 10% 평가를 받은 의원들의 경선 득표를 30% 감산(기존 20%)한다. 사실상 하위 10%는 물갈이 대상에 자동 편입되는 셈이다.
특히 ‘이낙연 신당’ 출현은 총선에서 민주당에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태풍의 눈’일지 ‘찻잔 속의 태풍’일지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지만, 출현한다면 야권의 표를 나눠 갖는다는 방향성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표와 지난 대선에서 경쟁했던 이낙연 전 대표가 탈당하는 것은 분당에 가까운 효과를 낼 여지도 존재한다. 이 대표가 불의의 피습을 당해 이 전 대표의 이탈 움직임이 ‘잠시 멈춤’에 들어갔지만, 탈당 후 창당이라는 큰 방향성에는 변화가 없다는 게 여의도 정치권이 공유하는 대세적 전망이다.
이번 총선 공천을 두고 민주당의 갈등이 그 어느 때보다 극심한 데는 ‘성공의 역설’이라는 측면도 작동하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180석이라는 압도적 대승을 거둔 결과 영남을 제외한 전국 대부분의 지역구에 민주당 현역 의원이 있어 집안싸움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 출마 후보군은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하고 많다. 우선 문재인 정부에서 공직을 지낸 장차관급 인사와 청와대 참모진 출신 다수가 출마를 벼르고 있다. 2022년 지방선거에서 고배를 마신 광역·기초단체장 출신들도 이번 총선에서 재기를 노리고 있다. 여기에 이재명 대표의 대선을 도운 ‘원조 친명’을 자처하는 원외 인사들도 수두룩하다. 공천을 위한 내부 경선부터 과열 경쟁 양상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인 셈이다.
‘찐명’ 자처 출마 리스트 논란에 호남 민심 술렁
민주당의 ‘공천 내전’을 상징적으로 잘 드러낸 일이 지난해 12월25일 벌어졌다. 광주 광산갑을 지역구로 둔 이용빈 의원은 이날 민주당 의원들의 단체 메신저 소통 채널인 텔레그램방에 ‘민주당 호남 친명 출마자 추천명단’이라는 이름의 포스터를 올리며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이 의원은 “치졸한 민주당 텃밭 호남의 창피한 현실”이라며 “친명, 진명, 찐명, 비명, 반명 무슨 짓입니까. 당대표와 함께 죽을 각오로 민주당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 피눈물 나게 하지 맙시다”라는 글을 올렸다.
이 의원이 올린 포스터에는 친명계 원외 인사 12명의 이름과 사진, 출마 예정지가 정리돼 담겼다. 이 의원의 지역구인 광주 광산갑 친명 출마자로는 이재명 대표의 법률특보인 박균택 변호사가 적혔다. 박 변호사는 광주고검장 출신으로 대장동·위례 개발과 성남FC 후원금 의혹 등 이 대표 관련 사건을 담당했다. 이 외에도 친명계로 당 대변인을 맡았던 비례대표 김의겸 의원(전북 군산)을 비롯해 이 대표 특보 정진욱 민주연구원 부원장(광주 동남갑), 이 대표 측근으로 꼽히는 강위원 기본사회위원회 부위원장(광주 서갑) 등이 포함됐다.
타깃이 된 호남 의원들은 불편한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광주 지역의 한 의원은 통화에서 “시스템 공천을 한다더니 이렇게 강성 지지층을 동원해 좌표를 찍는 행동으로 갈라치기에 나서면 당 분열이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지도부가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당의 절대 우세 지역인 호남은 당내 경선이 본선보다 훨씬 치열한 만큼 현역 의원과 원외 인사들 간 기싸움이 시작됐다는 일반적인 분석도 나오고 있지만, 이른바 ‘호남 내전’이 질서를 잃고 격화될 경우 자칫 2016년 총선 당시 텃밭인 호남에서 신당 국민의당에 당한 패배가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국민의당은 민주당에서 이탈한 안철수 대표와 결합해 호남 지역 28석 중 광주광역시 8석 싹쓸이를 포함해 23석을 차지해 3석에 그친 민주당에 참패를 안겼다. 취재에 따르면 지금도 호남의 상당수 민주당 관계자가 친명계를 자처하는 원외 인사들의 과도한 ‘친명 마케팅’에 속앓이를 하고 있다. 자칫 민주당 호남 내전의 여파가 이낙연 신당과 결합하는 시나리오로 흘러간다면, 2016년의 악몽이 재현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낙연 전 대표의 정치적 고향은 호남이다. 그는 호남에서만 4선 의원과 전남지사를 지냈다.
전략통으로 분류되는 민주당 관계자는 “호남이 지금 이재명 대표를 미는 이유는 이재명 개인이 좋아서가 아니라 총선 승리를 위해 분열하면 안 된다는 전략적 판단 때문”이라면서 “야권 분열의 책임이 이 대표에게 있다는 분위기가 대세가 된다면 ‘하나의 호남’의 전폭적 지지가 꼭 민주당을 향할 것이라는 보장은 지금 어디에도 없다”고 꼬집었다.
친명계를 자처하는 비례 의원이나 원외 인사들은 일찌감치 비명계 의원 지역구에 출마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동주 의원은 최근 대표적인 비명계이자 친문계 좌장 격인 홍영표 의원의 지역구인 인천 부평을 출마를 선언했다. 김의겸 의원은 비명계인 신영대 의원 지역구(전북 군산)에서 출마를 준비 중이다. 양이원영 의원은 친이낙연계인 양기대 의원 지역구인 경기 광명을에 나선다. 김병주 의원도 계파색이 엷은 김한정 의원(경기 남양주을)에게 도전장을 냈다. 유정주 의원은 서영석 의원 지역구(경기 부천정)에 출마한다는 계획이다.
민주당의 한 당직자는 “기존에는 비례대표로 초선을 지내면 다음에는 험지 출마를 하는 게 일종의 불문율이었는데 이번 총선 과정에서는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김의겸·이동주 등 친명 비례, 비명 현역 지역구 도전
친명계 원외 인사들이 비명계 의원 지역구에 출마를 선언하는 이른바 ‘자객 출마’도 줄을 잇고 있다. 현근택 민주연구원 부원장은 비명계 ‘원칙과 상식’ 소속인 윤영찬 의원의 지역구(경기 성남 중원)에, 진석범 당대표 특보는 역시 원칙과 상식 소속인 이원욱 의원 지역구(경기 화성을)에 각각 출마한다.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낙선한 전직 기초단체장도 대거 총선에 나선다. 황명선 전 논산시장은 원칙과 상식 소속인 김종민 의원 지역구인 충남 논산·계룡·금산에서 출마를 준비 중이다. 박영순 의원 지역구(대전 대덕)엔 대덕구청장 출신 박정현 최고위원이 출격 대기 중이다. 채현일 전 영등포구청장은 김영주 국회부의장 지역구인 서울 영등포갑에 도전한다.
친명계 후보들의 ‘자객 출마’ 흐름이 거세진 데는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 가결 사태 이후 강성 지지층을 중심으로 비명계를 향한 물갈이 여론이 커진 것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동시에 현역 의원과 맞붙어야 하는 정치 신인들이 경선 통과라는 목표를 위해 강성 지지층에 호소하는 친명 노선을 핵심 전략으로 선택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민주당 관계자는 “민심과 동떨어진 계파 이익을 우선시한 ‘사천(私薦) 공천’은 당내 갈등과 분열을 촉진해 결과적으로 본선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면서 “국민은 현역 교체율 이상으로 공천 내용에 주목한다. 시대의 변화를 반영할 수 있는 인물을 적극 발굴하고 발탁하는 길이 당도 살고 총선 이후 성과도 내는 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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