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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때 종종 맞닥뜨리는 고민거리가 하나 있다. ‘나’라는 말을 글에 쓸 것이냐, 말 것이냐다. ‘나’라는 단어를 쓰면 문장이 왠지 부자연스럽고 경직돼 보일지 모른다는 느낌에서다. 글의 성격에 따라서는 ‘나는’이라는 표현 대신 ‘필자는’을 쓰기도 하지만 그 또한 어색하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주어가 빠지면 곤란한 문장도 있다. 공적인 담화나 팩트 확인을 해줘야 하는 대화가 그것이다. 이런 표현에서 ‘나’가 생략되면 완결성이 떨어져 허전해지기 마련이다. 이 주어와 관련한 문제는 정치권에서도 빠지지 않고 나타난다. 그중 가장 유명한 일화는 아마도 나경원 전 의원이 불러일으킨 ‘주어 없음’ 발언 논란일 것이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이명박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BBK라는 투자자문회사를 설립했습니다”라고 발언한 데 대해 당시 나경원 대변인이 논평을 내고 “BBK를 설립하였다고만 언급되어 있지 ‘내가’ 설립하였다고 되어 있지 않다. 이것을 ‘내가 설립했다’라고 광고하는 것은 명백한 허위”라고 주장해 큰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다. 이는 지금까지도 나경원 전 의원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과거사로 남아있다. 주어 논란에서는 윤석열 대통령도 자유롭지 못하다. 얼마 전 있었던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이 이 인터뷰에서 대일 외교와 관련해 “100년 전 일을 가지고 ‘무조건 무릎을 꿇어라’고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 발언을 두고 논란이 일자 유상범 국민의힘 대변인이 대통령의 표현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의 주어는 윤 대통령이 아니라 ‘일본’이라고 주장했고, 이 해명은 더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인터뷰를 진행했던 해당 언론사 기자는 유 대변인의 발언이 나온 직후 자신의 SNS에 “말한 그대로 올린다”는 글과 함께 ‘저는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주어가 명확하게 드러난 녹취록 원문을 게시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순방을 앞두고 지난 20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 집무실에서 워싱턴포스트(WP)와 인터뷰하고 있다. ⓒ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순방을 앞두고 지난 20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 집무실에서 워싱턴포스트(WP)와 인터뷰하고 있다. ⓒ연합뉴스
‘나는 대중에게 어떻게 비치는가’와 ‘대중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문장은 얼핏 비슷한 내용처럼 보이지만 받아들이기에 따라 의미가 크게 바뀐다. ‘나’라는 주어와 ‘대중’이라는 주어가 그 차이를 만든다고도 할 수 있다. ‘나는’이 앞서면 자칫 오만과 편견에 빠져들기 쉽다. ‘내가 대중에게 어떻게 비치는가’라는 질문에는 ‘나만 괜찮으면(잘못이 없다는 믿음이 있으면) 대중도 인정해줄 것’이라는 생각이 내장돼 있다. 반면에 ‘대중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고민은 철저하게 대중 중심의 사고에 기반한다. 최근에 큰 물의를 빚은 김남국 의원의 ‘코인 투자 논란’도 그렇다. 김 의원 스스로 ‘대중’이 아니라 ‘나’를 주어로 두고 생각한다면 더 큰 수렁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판단과 평가는 ‘나’가 아니라 ‘대중’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나’의 문제다. 나를 내려놓지 못하고, 민심과 대중이 주어의 자리를 차지하도록 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독재에 대한 거부감이 어느 때보다 강한 시대에서 정치는 궁극적으로 ‘나’를 얼마나 모양 좋게 내려놓느냐의 게임이다. ‘나’를 크게 이긴 사람만이 진짜 주어인 민심에 비로소 가까이 가 닿게 된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유권자 수에 해당하는 4400여만 명의 정치평론가가 있다. 그들은 저마다 ‘나’가 아무리 검정을 초록이라 말해도 그 본질이 검정임을 직감적으로 꿰뚫어볼 만한 능력들을 갖고 있다. ‘나’에 매몰된 정치인은 그 직감의 매서움을 깨닫지 못한 채로 계속 허우적거릴 뿐, 주어의 함정에서 결코 빠져나올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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