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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서울·제주·창원·진주·전주에서 동시다발 ‘간첩 혐의’ 압수수색
“北, 명문대 출신 소수정예 포섭에서 소액매수 가능한 노동계로 전환”
전부터 “대규모 간첩단 사건 터질 것” 소문 파다
국가정보원과 경찰이 국내외에서 장기간 추적 수사를 벌여온 간첩단 사건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건 1월9일 국내 언론의 보도를 통해서다. 압수수색영장에 따르면 제주 지역 진보정당 간부 A씨는 2017년 7월29일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서 북한 노동당 대남공작 부서인 문화교류국 소속 공작원 김명성과 접선했다. 그리고 귀국 후에는 지령에 따라 제주에 지하조직 ‘ㅎㄱㅎ’을 결성하고, 지난해 9월에는 노동 부문의 지하조직인 ‘한길회’를 만들었다. ㅎㄱㅎ이 한길회를 지칭하는 것이란 얘기가 나오지만 상부와 산하조직의 명칭이 같을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뭔가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신중론도 나온다. 이들은 ㅎㄱㅎ을 ‘대학원’으로 부르고 김정은을 ‘총회장님’으로 부르는 등 약정된 음어로 소통했다고 한다. 또 지난해 11월까지 활동하면서 북한으로부터 윤석열 정부 비방과 반미 투쟁 확대, 한미 군사훈련 중단 등을 위한 활동을 벌이라는 지시를 받고 이를 이행했다는 것이다. 사실 언론보도가 터지기 전에도 정부 안팎의 대북·방첩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곧 대규모 간첩단 사건이 터질 것’이란 입소문이 번졌다. 이미 지난해 11월9일 국정원과 경찰이 제주와 경남 창원·진주, 전북 전주 등에서 관련 혐의를 받는 조직과 인사들에 대해 동시다발적인 압수수색을 했기 때문이다. 12월19일에는 제주에서 추가 압수수색이 이뤄지면서 곧 간첩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언론보도에 이어 국정원과 경찰이 1월18일 서울 민주노총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면서 상황은 심각하게 돌아갔다. 창원·진주·전주 등 전국 각지의 북한 지하망을 관할하는 상부 조직인 ‘자주통일 민중전위’가 민주노총에 침투한 의혹을 수사하기 위한 것이란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었다. 당초 제주간첩단으로 알려졌던 북한 연계 지하조직이 각 지역과 서울·수도권까지 포함한 전국 규모란 사실이 드러나고 있고, 이에 대한 당국의 수사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번 사건에서 눈길을 끈 건 장기간에 걸친 국정원의 치밀한 수사 진행이다. 한 관계자는 “북한과 연계를 시작한 초기에 대공 용의점을 포착해 5년여 공을 들여온 사건”이라고 귀띔했다. 실제 국정원은 캄보디아 프놈펜과 베트남 하노이, 중국 다롄과 베이징 등 북한과 접선이 이뤄진 해외 주요 거점에 있는 비공개 대북 첩보망을 총가동한 것으로 보인다. 출국 단계부터 용의자들이 들고 나간 가방의 특징을 파악해 이를 북한 공작원이 바꿔치기하는 걸 포착·추적했다. 다롄에서 밤 열차로 베이징으로 이동한 동선과 하노이 시내 동상 인근에서 돌발 상황이 생겨 접선에 실패한 정황 등이 고스란히 수사기록에 담긴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반발하는 민주노총, 당혹해하는 분위기
수사선상에 오른 민주노총 전·현직 간부들의 경우 북한 공작원과 최대 11시간 만나 화선(火線) 입당 방식으로 노동당에 가입한 정황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화선 입당은 본래 전선이나 긴박한 상황에서 간이 방식으로 이뤄지는데, 대남공작에서도 충성 맹세와 함께 자주 벌어진다. 국정원은 또 캄보디아와 베트남 입국 서류에 ‘부부 관광’이라고 방문 목적을 적어낸 사실까지 알아냈다. 여행객을 위장한 근접감시나 해당 국가 정보기관과의 협조 등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증거 확보에 엄청난 공을 들였다는 걸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용의자들은 국정원의 압수수색 닷새 전까지도 북한 문화교류국과 암호 프로그램과 클라우드를 통해 통신을 했다고 한다. 매우 임박한 시점까지도 수사망이 좁혀오고 있다는 점을 모른 상태에서 무모한 활동을 한 정황이 드러난 셈이다. 이는 극도의 보안 속에 지하조직망을 구축하고 은밀하게 활동하던 과거의 간첩단 사건과 차이가 난다. 과거에 대남 지하망의 우두머리급 간부는 ‘정간은폐(정예간부 은폐)’란 원칙에 의해 움직였다. 대기업 직원이나 NGO(비정부기구) 대표로 일하는 등 위장술을 쓰거나 아예 동선을 드러내지 않는 쪽을 택해 조직 보호와 유사시 지하망 재건에 대비한 것이다. 이 때문에 북한이 과거처럼 소수정예의 엘리트 포섭에 많은 공을 들이던 데서 벗어나 노동계와 친북성향 인사들을 대상으로 여러 개 조직을 구축하는 쪽으로 전술을 변화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방첩 관계자는 “1980년대 주사파 운동권의 핵심을 이루던 명문대 출신 위주의 리크루팅이 시대 변화에 따라 어려워지자 노동계를 집중 타깃으로 삼은 것”이라고 말했다. 일정 규모 이상의 간첩단 사건에 등장하는 거액의 공작금이 눈에 띄지 않는 것도 이번 사건의 특징이다. 수사 당국이 주시해온 민주노총 간부 B씨의 경우 베트남에서 북한 공작원과 만난 뒤 국내에서 1만 달러를 환전한 것으로 드러났다. 추가 수사를 통해 더 규명될 수 있겠지만 과거에 비해 북한이 공작금 지출의 고삐를 죄고 있는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이번 사건에 현직 간부가 수사 대상에 오르고 압수수색까지 받은 민주노총은 “국정원이 한 편의 ‘잘 짜인 그림’을 그리려 하고 있다”면서 윤석열 정부를 비난하고 나섰다. 하지만 당장 상황을 반박하거나 적극적인 대응조치를 취하지는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파업 불발과 건설현장 비리 등으로도 압수수색을 받는 와중에 간첩단 사건까지 불거져 당혹해하는 분위기까지 감지된다. 일각에서는 이번 수사를 두고 대공수사권 경찰 이관을 앞둔 국정원의 작품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한다. 윤석열 정부의 국정원이 공안정국 조성의 첨병으로 나선 것이란 주장도 나온다. 공교롭게도 윤 대통령이 민주노총의 파업을 비판하고 불법행동에 대한 엄단을 지시한 직후 상황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수사 관계자는 “오비이락이다. 대공 수사요원들이 장기간에 걸쳐 채증과 꼼꼼한 수사를 해왔기 때문에 결과를 지켜보시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향후 간첩단 수사와 사법적 판단의 향배가 윤석열 정부와 민주노총의 힘겨루기에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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