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사우디와의 관계 탓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팡질팡
“국제사회에서 항상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규범(norm)을 강조하는 미국이 최악의 딜레마에 빠진 상황이다.” 워싱턴의 한 외교 전문가가 최근 사우디아라비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 의혹을 둘러싼 미국 정치권의 분위기를 전한 말이다. 터키 주재 사우디 영사관에서 실종된 카슈끄지가 사우디 정부에 의해 암살당했을 가능성이 커지면서 파문이 일파만파로 확대하고 있다. 혈맹인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도 암살 의혹을 둘러싸고 휘청거리는 모양새다. 유럽을 비롯한 서방국가들도 강력하게 사우디 정부 비난 대열에 합세해 자칫 서방국가들과 중동 산유국들 간 충돌로 확전될 가능성도 있다.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미 “사우디를 향한 어떠한 제재나 위협도 전면 거부한다”면서 일전불사 의지를 표명해 미·중 간 무역전쟁에 이어 세계 경제를 뒤흔들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진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돌발변수가 국제정세와 세계 경제를 휘감고 있는 상황이다.
국내외 비판에 직면한 트럼프 행정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10월13일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힐 것이며 가혹한 처벌이 있을 것”이라고 밝히자 세계 주요 증시를 비롯한 국제유가는 요동쳤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다시 “우리는 사우디가 필요하다”면서 파문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이는 현 사태가 국제정세에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지 그대로 반영한 꼴이 되고 말았다. 가뜩이나 미·중 무역전쟁으로 미국 경제에 먹구름이 끼고 있는 마당에 사우디와의 관계까지 악화한다면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로서는 거의 치명타를 입는 셈이다. 그가 연일 “사우디 무기판매 취소나 제재는 우리에게 상처를 줄 뿐”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다. 특히, 국제유가라는 칼을 쥔 사우디 입장에서는 미국이든 서방국가든 “해볼 테면 해보라”고 배짱을 부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이란을 제재하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사우디의 협조가 절실한 상황에서 관계가 악화하면, 실제로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현실 인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하지만 미국 정치권은 거의 초당적으로 사우디를 비난하고 있다. 민주당은 이미 무기판매 금지 등 강력한 제재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초기 강경 입장에서 발을 빼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서도 크리스토퍼 머피 민주당 상원의원은 “미국 대통령을 홍보요원으로 삼을 정도니 사우디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겠다”고 비꼬았다. 중간선거를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을 최대한 궁지로 몰겠다는 심산이다. 공화당도 언론인 암살 의혹이라는 미국 내 비판 여론에서 자유롭지 못한 분위기다. 트럼프 대통령과 친한 공화당의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도 “카슈끄지는 살해됐다”고 단언하면서 사우디 왕세자를 향해 “독(毒)과 같은 존재”라며 경제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나섰다. 보수와 진보를 불문하고 언론매체들도 사설 등을 통해 진상 규명과 함께 트럼프 행정부의 적절한 조치를 요구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국제사회도 연일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주요 7개국(G7) 외무장관들과 유럽연합(EU) 외무장관들도 성명을 내고 이번 사건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면서, 사우디 정부가 즉각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요구하고 나섰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총재 등도 이번 사태 이후 사우디 방문을 취소했다. JP모건·포드자동차 등 글로벌 대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도 줄줄이 ‘사막의 다보스’라고 불리는 사우디 투자 행사에 불참을 결정해 파문이 확대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사우디가 투자 행사에 불참하는 기업에 투자 계약을 취소하는 보복 조치를 취하면서, 세계 경제의 불안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연일 ‘사우디 감싸기’라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사우디 정부는 이번 사건을 전혀 모른다고 했다”고 파문 진화에 나서고 있다. 이른바 사건 조사를 통해 ‘유죄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무죄’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공화당 소속인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마저 “행정부와는 별개로 의회가 사우디를 상대로 행동에 나서겠다”고 할 만큼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최악의 상황에 몰린 형국이다.
‘꼬리 자르기’ 나선 사우디
카슈끄지의 실종과 암살 의혹 사건이 터키 영토 내의 사우디 영사관에서 발생하면서, 터키 정부도 다소 ‘미묘한(delicate)’ 입장에 처해 있다고 외교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최근 미국 국적 목사가 석방되면서, 미국의 경제 제재가 풀릴 호기를 맞는 가운데 돌발 사태가 터졌다는 것이다. 터키 정부가 친정부 매체 등을 통해 ‘토막 살해 의혹’마저 흘리면서도 정작 사우디와 혈맹관계인 미국과 거래를 시도하고 있다는 의혹도 나돈다. 정작 터키 정부는 공동조사가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사우디 정부의 혐의를 공식적으로 확인해 주지 않고 있다. 결국, 이번 사태는 사우디 정부가 범인으로 ‘대타’를 내세우면서 파문을 봉합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실권이 없는 다른 왕세자나 고위직이 사우디 정부 모르게 정보기관을 이용해 고문하는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사망했다는 시나리오가 이미 나온다.
하지만 이러한 ‘꼬리 자르기’가 먹혀들지는 미지수다. 아무리 ‘대타’를 내놓아도 사우디 정부가 이번 사건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미국이나 국제사회가 사우디를 상대로 경제 제재를 취하는 것은 거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특히, 오는 11월 이란의 원유 수출을 전면 봉쇄할 계획인 미국이 사우디에마저 경제 제재를 가한다면 유가 폭등 등으로 전 세계가 경제적 재앙에 직면할 것이라는 경고가 나온다. 또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사우디와 1150억 달러(약 130조원) 규모의 무기거래 계약을 체결하며 “50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라고 공언해 무기수출도 취소할 수 없는 분위기다. 결국 미국으로서는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 몰라라’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인 셈이다. 따라서 국제사회에서 늘 ‘인권’과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미국의 고민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혈맹관계인 사우디와의 관계에 변화를 주지 않고 세계 경제에도 불안을 야기하지 않으면서, 국내의 비판 여론을 반영해야 하는 묘수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는 사우디 정부가 어느 선까지 이번 사건의 책임을 인정할 것인가가 변수가 될 전망이다. 하지만 대응 조치를 취하려는 국제사회나 미국도 ‘세계 경제 악화’라는 후폭풍을 우려하는 분위기다. 갑자기 터진 돌발적인 이번 사건이 어떠한 결말로 마무리될지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