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외교전 완패로 지지율 하락… 민족주의 자극해 지지층 결집하려는 속내 풀이
부산시에 설치된 소녀상 문제를 두고 강력하게 대응하는 일본 정부의 모습은 미국에는 정중하면서 반대로 중국과 한국을 함부로 대하는 아베의 외교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부산 일본 총영사관 앞에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이 설치되자 일본 정부는 주한일본대사와 부산총영사를 일시 귀국시키기로 했다. 일본 정부의 명령에 따라 나가미네 야스마사 주한일본대사와 모리모토 야스히로 부산총영사는 1월9일 본국으로 돌아갔다. 1월6일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이런 조치를 발표하자 이 이야기는 일본 신문 1면을 장식했다.
한국 정부의 외교적 실책은 일단 접어두더라도 이번 일로 아베 정부가 ‘역사적이고 획기적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며 자랑했던 2015년 12월의 ‘한일합의’는 더 이상 역사적인 일이 아니게 됐다.
사실 상당히 의아한 일이다. 국가 안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사드 배치 문제가 얽힌 중국 정부도 주한대사를 소환한 적은 없다. 대사의 소환은 '단교' 다음으로 높은 수위의 외교적 대응이라 쉽게 명령하지 않는다. 반면 일본이 초강수로 나온 이유는 그럴 수밖에 없는 내부적인 위기감이 있기 때문이다. 소녀상 문제가 있기 직전인 지난해 12월 아베는 러시아와의 외교전에서 대실패를 맛봤다.
기시 노부스케의 일화처럼 푸틴에게 온천을 제공하다
아베는 외교에서 역사적인 업적에 욕심을 냈다. 일본 역대 총리들 중 외교적 성과를 보인 이들은 저마다 에피소드들이 하나쯤 있다. 아베가 존경하는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도 그런 이야기 거리를 갖고 있다. 미일안보조약 개정을 추진하던 기시는 총리로서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골프를 함께 쳤는데 1라운드를 마친 뒤 라커룸에 들어가자 아이젠하워가 이런 말을 건넸다. “이곳은 금녀의 구역이다. 이대로 샤워를 함께하지 않겠는가.” 두 사람은 알몸으로 마주 앉아 함께 땀을 흘렸다. 옷을 입고 로비로 돌아가면서 아이젠하워는 기자들에게 말했다. “대통령과 총리는 싫은 사람도 웃으며 대해야 하지만 골프는 마음에 드는 상대가 아니라면 함께 칠 수 없다.”
이런 훌륭한 일화가 탐나서였을까. 나가토시 산간의 한 온천이 딸린 고급 여관은 일본의 대 러시아 외교의 주 무대가 됐다. 아베의 고향인 이곳에서 푸틴은 숙박하며 화려한 요리와 사케를 곁들였다. 지난해 12월15일 푸틴이 일본을 방문하자 아베는 온천여관인 오타니 산장으로 그를 안내했다. 아마도 아베 총리는 자신의 외조부가 기억났을 지도 모른다. ‘푸틴’이라는 성 대신에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부르며 “새로운 러시아와 일본 관계를 오늘 여기에서 함께 만들어 나가자”고 하는 아베의 말은 진심이었다.
이번 푸틴과의 회담에서 아베가 원했던 건 북방 영토에 대한 진전이었다.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해묵은 논쟁을 해결하면서 역사에 남을 외교적 업적을 추가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오바마 정부와 달리 러시아와 관계를 개선하려는 트럼프 당선인이 등장한 시기에 푸틴을 만나 문제 해결에 나섰다.
그런데 그 결과는 참혹했다. 일본 언론에서 ‘완패’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였다. 회담 이전부터 일본에서는 러시아가 실효 지배하고 있는 4개 섬의 일괄 반환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했다. 1956년 소련-일본 공동선언에서 ‘평화조약 체결 후 인도한다’고 명시된 시코탄과 하보마이 두 개 섬만이라도 우선 인도받는 방안에 관해 이야기가 나왔다. 아베 역시 일본 국가대표의 명예를 걸고 회담에 임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틀 간 푸틴과 나눈 대화 결과 일본과 러시아는 어업과 관광, 의료 등의 분야에서 3조원 규모의 공동경제활동을 하는데 합의했다. 일본이 바라는 영토문제에 관해서는 그 어떤 진전된 합의가 없었다. 3조원대 경제협력만 이끌어낸 푸틴의 완승이었다. 일부 언론은 이를 두고 ‘러시아의 먹튀’라는 표현까지 썼을 정도다.
아베는 꽤나 다급했다. 그 증거는 그의 동선에서 나타난다. 나가토시 여관에서의 회담은 다음 날 16일 도쿄에서 이어졌고 이날 합의문서가 발표됐다. 1박2일의 강행군에도 불구하고 아베는 지친 몸을 이끌고 각 방송사의 보도 프로그램들에 출연해 합의에 대해 필사적으로 해명했다. 여론의 실망을 미리 예견했기 때문이다.
한국에 대한 강경책은 내부 지지율 상승 가져와
아베가 푸틴을 만나고 있을 때 일본 외교부도 묘하게 분주했다. 일러 정상회담을 두고 “다가올 중의원 선거에 대한 사전 준비”라는 말이 돌았다. 북방 영토 문제에 대한 진전된 메시지를 발표한 뒤 아베의 지지도가 상승하면 단번에 의회를 해산한 뒤 중의원 선거를 치른다는 얘기가 떠돌았다. 그렇게 3선이 이뤄지면 아베는 2021년까지 장기집권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 수 있었다.
실제로 이런 스케줄을 예상한 일부 의원들은 해산 총선거를 준비하기 위해 지역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기도 했다. 지난해 하반기까지만 해도 2017년 1월 의회 해산설이 지배적이었다. 보통 1월에 열리는 자민당 전당대회를 3월로 연장한 것도 이런 해석을 뒷받침했다. 그런데 올해 1월5일, 신년 맞이 기자회견에서 아베는 이렇게 말했다. “올해는 (해산 총선거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실제 러·일 정상회담 직후 교도통신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아베 내각의 지지율은 5.9%포인트 하락한 54.8%로 집계됐다. 직전까지 60%를 상회하다가 맞은 치명타였다. 그리고 해산 총선거가 없다고 말한 다음 날인 1월6일 한국 대사 소환 등의 외교적 강경책이 이루어졌다.
일본 정부가 갑작스레 강경책으로 전환한 소녀상 문제는 결국 1개월 전 러시아에 대한 외교전 패배를 만회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과 중국, 그리고 북한과의 외교 문제는 일본 국민의 이목을 모을 수 있는 중요한 재료다. 그리고 경험적으로 이웃국가에 강한 자세를 보일수록 아베의 지지율은 상승했다. 민족주의를 자극해 지지율을 올리는 방법을 아베 정부가 다시 사용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