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명예와 자존심을 돈 받고 판 저자세 외교
자존심의 상실을 돈으로 보상해 달라?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는 상업주의는 눈에 보이는 이익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명예와 자존심의 상실이라는 대가를 요구하기에 모든 것을 돈으로 사고팔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주의적 태도 또는 노동윤리, 역사적 기억, 사람들의 가치관을 돈으로 보상하고 보상받는다면 공적 영역의 타락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협상을 통해 양국이 돈을 주고받아야 할 영역이 있고, 돈으로 보상하거나 보상받지 말아야 할 영역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1960년대부터 이 중요한 기준을 국가 차원에서 허물어뜨리고 역사적 상흔(傷痕)마저 상업주의로 판단해 왔다.그 시작은 박정희 정권의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서 비롯된다. 해당 협정은 해방 이후 외교적·경제적으로 단절된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목적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당시 경제성장에 급급했던 박정희 정권은 일본의 침략과 수탈에 대해 눈을 감은 채 경제협력을 위한 자금으로 10년 가까이 8억 달러의 자금을 일본 정부로부터 받았다. 경제성장이라는 정권 차원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국가적 명예와 자존심을 8억 달러라는 돈과 맞바꿨고, 일본의 침략과 억압에 고통받은 국민의 소리 없는 절규를 외면했다. 박정희 정권의 1965년 한일협정 이후 정확히 50년이 지난 2015년 박근혜 정권이 또다시 국가적 명예와 자존심을 돈을 받고 파는 어리석음을 보였다. 2015년 12월28일 한·일 위안부 합의를 위해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일본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통감하고 위안부 재단에 정부 예산 10억 엔을 출연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박근혜 정부는 일본이 정부 차원에서 책임이라는 표현을 공개적으로 사용한 건 처음이라며 외교적 성과에 대해 자화자찬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끝내 일본이 위안부 강제 동원을 인정하지 않은 점, 그리고 책임 통감의 대가로 10억 엔을 출연하면서 이 기금에 대한 구체적인 명칭을 확정하지 않은 점은 또 다른 논란을 낳았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50년 전 그들이 벌인 행태와 동일하게 10억 엔이라는 돈을 한국에 던져주고 형식적인 사과만 표명했다. 1965년과 2015년 이어진 일본과의 협상 결과는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반복되지 말아야 할 일이 박정희·박근혜 부녀 대통령을 통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기만전술에 휘말린 우리 정부
그렇다면 한국은 10억 엔을 받고 공동 합의문에 무엇을 담았는가.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일본과의 공통 이행사항 선언에서 “위안부 문제는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된 것임을 확인한다”고 밝혔다. 일본이 현금 지원을 약속하면서 지속적으로 요구해 온 대목으로, 한국이 일본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셈이다. 불가역이라는 현학적 표현을 써서 국민을 혼동시키려고 했을지 모르나, 이는 다시는 위안부 문제를 양 국가의 공식적인 안건으로 올리지 않겠다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 정부는 관련 단체와의 협의를 통해 위안부 문제가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하겠다고 강조했지만, 10억 엔에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 이토록 굴욕적인 합의를 맺기도 힘들다. 그동안 일본 정부는 한국에 경제적 협력을 약속하면서 틈만 나면 망언을 일삼았다. ‘위안부의 자발적 참여’를 주장하며 피해 할머니들을 수도 없이 모욕하고 능욕했다. 그런데 이제는 일본 정부의 책임 회피 또는 습관적 망언을 제재할 수단이 없다. 정부 차원에서 최종적·불가역적이라는 수식어를 동원해 문제가 해결됐다고 일본에 확인시켜줬기 때문이다. 일본은 합의 체결 후 곧바로 망언을 재개했다. 2016년 10월 아베 총리는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일본의 사죄 메시지 전달 방안에 대해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밝혀 우리를 분노케 했다. 기시다 후미오 외상은 체코에서 만난 기자들을 통해 “10억 엔을 지급했으니 소녀상 철거를 조속히 이행해 달라”는 요구까지 했다. 2015년 합의 선언을 하면서 일본이 얼마나 비열한 웃음을 지었을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협상에서는 포지션(Position)과 인터레스트(Interest)라는 용어가 있다. 포지션은 말 그대로 ‘상대에게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선언 또는 메시지’이고 인터레스트는 ‘상대에게 말할 수 없는 진짜 속내 또는 의도’라고 협상학에서는 정의한다. 일본은 ‘일본 정부의 책임 그리고 10억 엔’이라는 포지션을 합의문에 담았다. 그러나 이들의 진짜 의도는 다른 데 있었다. 형식적인 책임 선언과 10억 엔이라는 현금을 통해 두 번 다시 위안부 문제로 일본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다. 10억 엔을 지급하면서 불법행위로 인해 지불해야 할 법률 용어인 배상(賠償)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은 점만 봐도 그들의 검은 속내를 알 수 있다. 외교적으로 일본은 미국 정부까지 동원해 한국이 10억 엔을 지급받고도 소녀상을 철거하지 않고 있다며 ‘일본=약속 이행, 한국=약속 불이행’ 프레임을 만들어가고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일본의 압박은 도를 넘어선 상황이다. 외화가 긴급히 필요할 때 두 나라의 통화를 맞교환하는 통화스와프 체결도 부산 총영사관 소녀상 설치 문제를 빌미로 협상을 중단했다. 심지어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인 아소 다로(麻生太郞)는 “소녀상 철거도 이행하지 않는 한국에 돈을 빌려주면 받지 못할 수 있다”며 한국을 신뢰할 수 없는 국가로 몰아붙이고 있다. 박정희 정권의 1965년 한일협정과 박근혜 정권의 2015년 위안부 합의는 경제적 논리에 의해서 어느 정도의 부도덕은 묵인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에서 출발했다. 돈으로 국가의 자존심을 사고팔았기에 애꿎은 소녀상은 지금 갈 곳을 잃은 채 불필요한 외교적 논란에 휘말려 있다. 박 대통령은 여전히 자신의 안위만 걱정한 채 소녀상과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절규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역사적 상흔을 돈을 받고 거래하면 국가의 모든 공적 영역이 타락하고 만다. 정치 및 외교의 의사결정이 언제나 국가의 자존심과 도덕성에 토대를 둬야 하는 이유다. 결과적으로 박 대통령은 국내에서는 국정 농단으로, 국외에서는 무능한 저자세 외교로 우리 국민의 명예와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았다. 소녀상은 지금 일본이 아닌 무능한 박근혜 정권을 향해 절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