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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 비망록’에 담긴 청와대의 ‘권력 농단’…김기춘 “적에 대하여는 敵愾心(적개심)을 가져야”

고(故) 김영한 민정수석의 비망록이 공개되면서 박근혜 정부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또는 김기춘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은 수석비서관회의를 통해 정권에 해가 되는 세력에 대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보복’에 들어갈 것을 지시했다. 야당 의원과 시민단체는 물론이고 언론, 문화·예술계, 심지어 헌법재판소에도 청와대의 입김이 작용했다. 정권에 반하는 것이라면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았으며 그 방법 역시 집요하고 치밀했다. 그중 하나가 보수단체를 활용하는 방법이다.

 

고 김영한 전 민정수석 비망록 中 일부 발췌


“단체 성향에 따라 보조금·광고 지급”

 

검찰은 현재 보수단체 어버이연합이 청와대의 지시를 받고 집회를 했다는 의혹을 수사 중이다. 시사저널은 지난 4월20일 “” 기사를 통해 청와대가 보수단체를 관리하며 집회를 지시했다는 의혹을 보도한 바 있다. 청와대 정무수석실 산하 국민소통비서관실 소속 허현준 행정관이 집회 지시자로 지목됐는데, 행정관이 독단적으로 집회 지시를 했겠느냐는 의혹의 시선이 적지 않았다. 당시 야당에서는 허 행정관을 넘어 ‘윗선’을 주목하며 청와대에 대한 철저한 진상조사를 촉구했다. 야당의 어버이연합 등 불법자금 지원 의혹 규명 진상조사 TF는 “(행정관의 직속상관인) 비서관과의 회의와 상의는 기본적인 업무 매뉴얼로 행정관의 독단적·자의적 행동이 불가능한 구조가 청와대”라고 지적했다.

 

시사저널의 추가 보도로 보수단체를 관리하는 윗선의 실체가 일부 드러나기도 했다. “”(2016년 5월10일자 보도 참고)에 따르면, 이병기 전 국정원장이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가기 직전에 보수단체 대표들과 회동을 갖고 “돈 지원해 주는 창구를 하나로 해야 쉽게 그 창구에다 (돈을) 넣는다”며 창구 단일화를 요청했다.

 

이는 박근혜 정부가 시민단체에 지원되는 보조금 등 예산을 무기로 보수단체를 관리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증언은 어버이연합 측에서도 나온 바 있다. 어버이연합 핵심 관계자는 “청와대 행정관이 ‘자기 말 안 듣는다’면서 ‘(어버이연합에) 예산 지원하는 거 다 잘라라. 책정된 거도 보류시켜라. 못 준다.’ 이런 식으로 나왔다”면서 “말 그대로 지금 시민단체들 다 청와대 행정관 손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11/26(수)

 (長) 

弘報(홍보) : 보조금 지급 時(시) 단체 性向(성향)에 따라 廣告(광고)도 그와 같이. 국정철학 共有(공유) 언론에 配布(배포) = 先 實態(선 실태) 파악

고 김영한 수석이 2014년 11월26일자에 남긴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 내용이다. 장(長)은 당시 비서실장인 김기춘 실장을 뜻한다. 즉 김 실장이 시민단체에 지급되는 국가 보조금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설정해 준 것이다. 시사저널의 보도처럼 청와대가 보조금·광고비 등을 통해 보수단체를 관리하고 있는 정황이 나온 것이다. 이와 유사한 메모도 눈에 띈다.

 

 

9/11(목)

 고엽제전우회 - 사무실 - 예산반영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는 고엽제 후유증 환자·자녀의 친목 도모와 자활능력 배양 등을 목적으로 설립돼 국가보훈처로부터 단체운영비 명목으로 연간 26억여원의 재정 지원을 받고 있는 단체다. 고엽제전우회는 정치활동을 할 수 없지만 친(親)정부적인 집회를 끊임없이 열어왔다. 2014년 9월의 경우 고엽제전우회는 세월호 반대집회와 이석기 통합진보당 전 의원 규탄집회 등을 개최했다.

 

 

어버이연합 모른다던 朴, 靑 회의서 수차례 논의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4월26일 45개 언론사 편집·보도국장 오찬간담회에서 청와대가 어버이연합에 집회 개최를 지시했다는 시사저널 보도와 관련해 “사실이 아니라고 그렇게 보고를 분명히 받았다”고 말했다. ‘어버이연합을 잘 아느냐’는 질문에는 “제가 아는 것은 보도에, 또 인터넷에 올라와서 어버이연합이 어떻게 했다, 어디 가서 어떤 것을 했다, 그런 것으로다가 아는 정도”라고 밝혔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말과는 달리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는 어버이연합의 움직임이 상세히 보고돼 있다.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 내용은 당연히 대통령에게 보고된다.

 

8/5(화)

치과의사협회 관련 정치자금법 사건→신속, 철저 수사. 청목회사건 判例(판례) 分析(분석)

어버이연합은 2014년 7월경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전·현직 의원 13명이 치과의사협회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며 이를 검찰에 고발했다. 8월5일 당일은 추선희 어버이연합 사무총장이 고발인 조사를 받는 날이었다. 고 김영한 수 석의 메모에는 별도 스크랩한 종이에 추 사무총장의 검찰 조사 시간까지 자세히 기록돼 있다. 또한 검찰에 청목회 사건 판례를 적용해야 한다며 신속하고 철저하게 수사를 진행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10/1(수)

어버이연합 國會(국회) 내 시위 - 국회 告訴(고소)

심지어 어버이연합이 국회에서 기습 시위를 한 것도 보고가 됐다. 국정 전반을 논의하는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일개 시민단체의 세세한 활동까지 논의를 한 것이다.

 

 

11/26(수)

 (長) 

•적에 대하여는 敵愾心(적개심)을 가져야

김기춘 당시 실장은 “단체 성향에 따라 예산 지원을 해 줘야 한다”는 말과 함께 “적에 대하여는 적개심을 가져야 한다”고 발언했다. 김 실장이 말한 ‘적’이란 박근혜 정부에 비판적인 모든 인사를 말한다. ‘적’들을 단죄하는 데에는 보수단체가 적극 활용됐다. 

청와대는 보수단체를 활용해 야당 의원들에 대한 고발에 착수했다. 박지원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2014년 6월25일 박 대통령의 동생 박지만 EG 회장과 이재만 청와대 전 총무비서관, 최순실씨의 남편이었던 정윤회씨 등을 묶어 ‘만만회’라고 지목했다. 청와대는 즉각 대응에 나섰다. 먼저 ‘7/5(토)(長) 박지원 항소심 - 공소유지 대책 수립, 박사모 등 시민단체 통해 告發(고발) 검토’라는 메모가 확인됐다. 야당 탄압에 보수단체를 적극 활용한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뒤이어 ‘7/15(화) 만만회, 박지원 고발’ ‘7/17(목) 만만회 告發(고발)’ 등 청와대는 이 사건을 예의주시하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이를 수시로 논의했다.

 

 

“김기춘, 헌정 문란 중대범죄자”

 

청와대는 박범계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변사체가 유 전 회장이 아니라는 증언이 나왔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발 빠르게 대처했다. ‘7/31(목) 박범계 의원, 告發(고발) - 고발 成立(성립) 여하?’라는 메모가 기록된 같은 날, 보수단체 자유청년연합은 박 의원을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고발했다. 8월1일자 메모에는 ‘(長) 박범계 - 告發(고발) / 허위·명예훼손 전담반’이라는 메모도 발견됐다.

 

이 밖에도 ‘7/13(일) 권은희 내일 告發(고발)’ ‘8/26(화)(長) VIP 모독 장하나 의원 - 중앙지검 告發(고발)(반국가교육척결국민연합)’ 등의 메모가 확인됐다. 특히 김현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대리기사 폭행 사건에 대해서는 비상한 관심을 보이며, 이 사건을 ‘세월호 가족 선동·조종’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9/17(수) 김현 의원, 폭행 件(건) - 세월호 가족 선동·조종’ ‘9/18(목) 대리기사 폭행 - 검찰 告發(고발)’ ‘9/19(금)(長) 대리기사 폭행 사건 - 南部地檢(남부지검) 告發(고발) - 엄정’ ‘9/20(토) 유가족 폭행사건 - 철저 指揮(지휘) - 치아파손’  등의 메모가 이런 정황들을 보여준다.

 

 

광주비엔날레 창설 20주년 기념 특별전에서 홍성담 화백의 《세월오월》 전시가 유보되자, 참여 작가 등이 8월8일 개막식에서 대형 프린트 작품을 펼치며 항의하고 있다. © 연합뉴스

광주비엔날레 창설 20주년 기념 특별전에서 홍성담 화백의 《세월오월》 전시가 유보되자, 참여 작가 등이 8월8일 개막식에서 대형 프린트 작품을 펼치며 항의하고 있다. © 연합뉴스

 

보수단체는 문화·예술계에 대한 탄압에도 활용됐다. 홍성담 화백은 박 대통령을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조종을 받는 허수아비로 묘사한 《세월오월》이라는 작품을 내놨다. 이와 관련해 ‘8/7(목)(長) 우병우팀, 허수아비 그림(光州(광주)), 애국단체 명예훼손 告發(고발)’이라는 메모가 발견됐다. 또한 박근혜 정권 패러디 포스터를 만들어온 이병하 그래피티 작가에 대해서는 ‘10/31(금) 이병하, 엄마부대 告發(명예훼손)’  등 보수단체를 활용해 압박 수위를 높였다.

 

현재 야당은 비망록에 드러난 김 전 실장의 혐의를 헌정을 교란한 중대범죄로 보고 있다. 야당 측은 “박 대통령 심기 경호를 위해 검찰과 경찰, 보수단체까지 동원했다. 보수단체가 고발하게 하고 검경이 수사하면 그걸 기소했다”며 “박영수 특별검사가 김 전 실장의 헌정 문란 중대범죄를 철저히 수사해 줄 것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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