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Staying Alive》로 한국 미술계의 기형적 구조 짚은 신현진 前 쌈지스페이스 큐레이터

포털사이트 사전을 검색해 보니 영어 단어 ‘큐레이션(Curation)’이 다음과 같이 정의됐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놓은 콘텐츠를 목적에 따라 분류하고 배포하는 일.’ 현대 사회에서 큐레이션은 필수적인 요소다. 콘텐츠가 많아질수록 선별된 양질의 정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근 큐레이션은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마케팅 분야다. 예컨대 소셜커머스에서 큐레이션 마케팅은 대세가 됐다. 하지만 원래 큐레이션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한 곳은 미술 분야다. 미술계에서 큐레이션은 미술관·박물관 등에 전시되는 작품을 기획하고 설명해 주는 ‘큐레이터(Curator)’에서 출발했다. 작품과 작가의 미술사적 가치를 조명하고 이를 토대로 전시회를 기획한다는 점에서 큐레이터는 화려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역할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대부분의 큐레이터가 공공 미술 공간 내지는 상업화랑 소속이다. 해당 전시공간이 요구하는 형식에 얽매이다 보니, 창의적인 활동은 한계가 있다. 
《스테잉 어라이브(Staying Alive)》의 저자 신현진 前 쌈지스페이스 큐레이터 © 시사저널 이종현

큐레이션, 양질의 정보를 선별적으로 제공

 하지만 최근 실험적인 전시공간이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다. 종속되지 않고 상호 보완해 주는 전시·기획은 최근 미술계의 중요한 화두다. 신간 《스테잉 어라이브(Staying Alive)》의 부제(副題)는 ‘우리 시대 큐레이터들의 생존기’다. 이 책이 담고 있는 주제는 ‘생존’과 ‘혁신’이다. 책에서 두 가지는 상호 보완적이다. 살아나려면 바꿔야 하고 기존 패턴을 버리면 살 수 있다는 간단한 논리다. 다수의 대중매체에서 미술 평론을 쓰고 있는 고동연 평론가와 공저한 신현진씨에게 이 책은 자신의 쓰라린 실패기이다. 미국에서 예술행정학을 전공한 그는 귀국 후 1998년부터 2008년까지 ‘쌈지스페이스’와 비영리 전시 기획 단체 ‘SAMUSO(사무소)’에서 제1큐레이터·전시실장 등으로 일했다. ‘가볼 만한 전시를 만드는 40대 큐레이터가 왜 한국에는 10명도 안 되나?’ ‘부잣집 딸들만 큐레이터로 살아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신씨가 책을 기획한 이유는 간단한 물음에서 출발했다. 안타깝게도 그가 바라본 우리 미술계 현실이 그렇다. 40대 이상의 관록 있는 큐레이터는 찾아보기 힘들다. 있다고 해도 내로라하는 집안 자제들이다.  

“제가 귀국을 결정한 것도 한국에 대안공간이 생겼다는 말을 들어서예요. 당시 미국의 대안공간은 미국 예술위원회(NEA)의 예산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바람에 모두가 문을 닫는 분위기였거든요. 그래서 온 건데, 우리나라도 2009년께에 이르자 대안공간의 역할이 사라진 겁니다. 쌈지가 개관 10년도 안 돼서 문을 닫는 거 보세요.”

 
고동연·신현진 지음 다할미디어 펴냄 288쪽 1만5000원


신씨는 스스로 야인의 길을 택했다. 무직 생활 동안 그는 복합 문화 공간 ‘테이크아웃 드로잉’이 발행한 신문에 ‘미술계 비련과 음모의 막장드라마’라는 연재소설을 썼다. 그의 연재소설은 팩트(진실)와 픽션(허구)이 결합된 ‘팩션’이다. 인터뷰 장소에 들어서자마자 그가 대뜸 질문을 던졌다. “가수 조영남씨 사건을 어떻게 보세요?” 신씨는 큐레이터이자 미술 평론가의 시각으로 이번 사건을 이렇게 분석했다.  

“미국 현대미술의 거장 앤디 워홀이나 가수 조영남씨나 자신의 명성을 가지고 작품을 만든다는 것에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워홀이 자신의 작품관을, 대중을 위해 철저히 상업인 작품을 만들되 대량으로 생산하겠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이라면, 가수 조영남씨는 단순 회화에까지 이러한 개념을 집어넣었다는 점에서 똑같을 수 없습니다. 작가가 다른 이의 손을 빌려 작품을 완성할 수 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개념 미술에 한합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순수 회화에까지 남의 손을 빌린다면, 그것은 윤리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봐야죠.”

신현진씨는 책에서 큐레이터 지망생에게 틈새를 찾아 나설 것을 강조한다. 순수예술에 대한 정의가 바뀌는 현대 사회에서 큐레이터의 역할도 예술경영인, 예술행정인으로 확대돼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책에서 등장하는 캔(CAN) 파운데이션은 작가 발굴 및 지원과 미술교육을 기반으로 한 전시공간을 결합시킨 비영리 예술단체다. 캔이 만든 예술창작체험버스는 창작공간이자 교육공간이다. 그렇다고 현실과 동떨어진 전시를 기획하는 것이 좋은 큐레이터의 덕목은 아니다. 그는 “최근 경향을 보면 큐레이터가 일하는 환경도 경제논리와 가까워진다”면서 “생존을 꿈꾸는 큐레이터라면 자본주의의 논리에 적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다양한 큐레이터의 등장은 좋은 작가 등장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다. 그는 “한국 화단에 유명 신진작가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그만큼 혁신 큐레이터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저자인 신씨가 진단한 한국 미술 시장은 1차 시장(신인 작가 발굴)은 위축된 채, 2차(상업 화랑), 3차 시장(경매 시장)만 활발한 기형적인 구조다. 

“1980년대 루시 리파드라는 평론가는 ‘AIR’이라는 대안 전시공간이 마련되자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 부어 큐레이터 역할까지 도맡았습니다. 평소 자신의 미술 철학을 큐레이팅으로 표현해 냄으로써 세계 미술계에는 페미니즘이라는 새로운 영역이 탄생하게 된 겁니다. 우리 미술 시장이 지금보다 한 단계 진일보하기 위해서는 감각 있는 젊은 큐레이터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합니다.” 

 
저작권자 © 시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