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의 비선실세 게이트가 온 나라를 강타하고 있습니다. '최순실 게이트'는 파면 팔수록 의혹이 더 커져만 갑니다. 국정농단의 핵으로 떠오르면서 '권력서열 1위'라는 말까지 나오는 지금입니다. 하지만 최순실 씨가 과거 언론과 접촉한 흔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먼센스> 1994년 8월호에 실린 최순실씨의 인터뷰는 매우 흥미로운 자료입니다. 이 기사의 원 제목은 이랬습니다. <최태민 셋째딸 최민희씨의 독점고백 "나의 아버지 최태민과 박근혜 사이에 나돌던 소문에 대해 밝힌다"> 여기서 인터뷰에 나선 최민희는 최순실을 대신한 가명입니다.
기사의 이해를 위해 최민희는 최순실로 고쳤습니다. 대신 나머지 기사 내용과 사진 등은 모두 당시 기사 내용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직접인터뷰> 최태민 셋째딸 최순실씨의 독점 고백
박근혜씨의 최측근으로 여론의 질타를 받아왔던 ‘미스터리 인물’ 최태민씨가 지난 5월 1일 협심증으로 사망했다. 그는 세상을 뜰 때까지 자신과 관련된 각종 루머에 시달리면서도 침묵을 지키며 살아왔다. 어렵게 만난 그의 셋째딸을 통해 그간 감추어졌던 최태민씨의 면모를 밝힌다.아버지는 모함과 루머에 시달리다 협심증으로 돌아가셨다.
박근혜씨를 ‘그림자 내조’ 해왔다던 미스터리 인물 최태민씨가 지난 5월 1일 사망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향년 82세였다. 박근혜씨와의 사이에 명쾌하게 해명되지 못한 숱한 소문과 루머만 남긴 채 그는 떠났다. 이제 고인이 된 최태민씨의 입을 통해서는 확증없이 떠돌던 풍문에 대한 확인은 불가능하게 됐다. 기자는 최태민씨의 셋째딸 최순실씨(43세)를 몇차례 찾아갔지만 ‘할 말이 없다’는 말만 듣고 되돌아왔다. 그녀는 ‘아버지에 관한 왜곡된 사실이 있다면 고민의 명예를 위해서도 진실을 밝혀야 하지 않겠느냐’는 기자의 설득에 어렵게 시간을 내주었다. 지난달 20일,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오후 2시에 만나기로 했으나, ‘심경을 밝힐 글을 준비하고 있으니 시간을 오후 5시로 미뤄달라’는 말을 전해왔다. 그리고 그녀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아버지를 두 번 죽게 하고 싶지 않아서 나왔다”며 16절지 6장 분량의 ‘심경 고백서’를 내놓았다. 평범한 얼굴에 안경을 쓴 그녀는 피곤한 기색은 있었지만, 비교적 또박또박하게 곧은 자세로 말을 꺼냈다. 그녀가 준비해 온 글은 감정을 상당히 절제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싸고 또 다시 ‘유쾌하지 못한 과거’들이 들춰지는 것을 그녀는 경계하고 있었다. ‘온당치 못한’ 비난과 모함 속에서 쓸쓸히 눈을 감은 아버지에 대한 연민, 아버지의 말년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었던 세상의 눈초리에 대한 원망도 담겨 있는 듯했다. 최순실씨는 현재 서울 영동에서 9년째 유치원을 경영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나 얼굴이 알려지는 것을 꺼려했다.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마저 투병 중인 마당에 자신이 희망과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유치원의 아이들 뿐이라는 것이다. 만약 자신의 이름과 얼굴이 언론에 보도된다면 틀림없이 학부모들은 어린이들을 퇴원시키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깃들어 있었다. 그럴 경우 어쩌면 유일한 자신의 희망마저 달아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인터뷰는 일문일답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최씨는 가능한 짧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아버님이 돌아가신 게 정확하게 언제입니까.
“지난 5월 1일 오전 8시 30분 경, 집에서 돌아가셨습니다.”-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남시긴 유언은 없었나요.
“당신을 둘러싼 갖가지 악의적인 소문 때문에 가족들이 고통받은 게 미안하다고 했어요. 죽음을 압둔 순간에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게 아니라 오래 전부터 많이 미안했었다고요... 특히 당신 때문에 어머니가 말못할 고통을 당했다는 점을 가장 회한스럽게 생각했어요.”-장례식을 알리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알리고 말고 할 게 없잖아요. 그저 평범한게 가족장으로 치렀습니다.”-박근혜씨에게도 안 알렸나요.
“알리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신문보도를 보고 아셨겠지요. 아버님은 90년 육역재단 분규가 생기기 직전 그곳을 나온 후 박이사장(최순실씨는 박근혜씨를 이렇게 불렀다)과 연락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당신 때문에 박이사장이 큰 고통을 당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겁니다.-사인은 무엇이었습니까.
“협심증이었어요. 옛날 말로 ‘홧병’이지요. 예전부터 혈압이 높으셨어요. 그런데다 육영재단 분규로 일을 중단하고 집에만 계시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를 가만 놔두지 않았어요. 특히 일부 언론이 좀 심하게 아버님을 몰아쳤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홧병이 생겼고... 가족들한테 미안한 마음도 한몫 했을 거에요. 가족들이 육영재단과 관련된 일을 그만하라고 부탁했지만 듣지 않으셨어요. 특히 제가 많이 말렸지요. 그러다가 좋은 꼴 못 보고 그곳(육영재단)에서 물러났으니 가족들 보기가 민망하셨겠지요. 말씀도 못하고 속으로만 그런 고통을 삭이셨어요. 속병만 키우셨던 셈입니다. 더 사실 수 있었는데...” 최순실씨는 아버지의 사인을 말하면서 무언가 속에서 꿈틀하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차마 말 못할 울분 같은 것, 그것은 또 최태민씨와 그 가족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던 사람들을 향한 것이 아니었을까. 간간이 그녀의 눈가가 붉어지곤 했다.사망 전 4개월 동안 바깥출입 자제하고 신병치료에만 전념
최태민씨는 세상을 떠나기 전 4개월 동안은 아무 것도 못하고 신병치료에만 전념했다고 밝혔다. 영동 세브란스병원과 순천향병원을 오가며 통원치료도 하고, 1주일에서 열흘씩 입원 치료를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아버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1912년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나셨어요. 형제가 3~4명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모두 돌아가셨대요. 혼자서 월남하셨기 때문에 당신의 생애는 친척도 없는 쓸쓸한 것이었을 겁니다. 할아버지(최윤성, 90년 독립 유공 훈장 받음)는 독립운동 자금책이었는데,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었답니다. 독립운동을 하신 할아버지 때문에 이미 아버지가 어렸을 적에 재산이 탕진된 상태였다고 해요. 항간에는 저희 아버님이 일제 때 일본 순사로 근무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정부가 훈장을 줬겠어요? 어쨌든 아버지는 월남 후 부산에서 건국대학이라 불리던 건국의숙(후에 동아대학교로 흡수됨)을 마치셨죠. 법과를 전공하셨어요. 공무원이나 회사원은 적성에 맞지 않으셨는지 주로 사업을 했습니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주로 서대문구에 살았어요. 제가 초등학교 시절에 지금의 기상대 부근에 정원이 있는 2층 양옥집에서 살았는데, 기사가 딸린 자가용을 탔던 기억이 있는 걸 보면 아버지 사업은 꽤 잘 되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께서 청렴하고 정직하게만 살았다고 강변하진 않겠어요. 당신도 인간이니까 보이지 않는 실수를 하셨겠지요. 하지만, 아버지를 둘러싼 각종 모함과 뜬소문이 지나쳐도 보통 지나친 게 아닙니다. 다른 건 몰라도 돈이나 권력과 관련된 부분에 대한 소문은 사실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최태민씨는 현재의 부인(75세)과 피난지인 부산에서 연애결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최씨는 호적이 없었고, 가호적법이 만들어지면서 뒤늦게 혼인신고를 했기 때문에 이것을 두고 재혼이니 어쩌지 하는 소문이 난 것 같다고 측근은 해명했다.-어머니 건강도 많이 안 좋으신 걸로 아는데...
“어머니도 오래 전부터 신장병을 앓아오셨어요. 한 15년 전쯤부터요. 게다가 최근에는 당뇨증세까지 보여 건강이 많이 악화됐어요. 아버님 살아계실 때만 해도 어머니가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다니실 정도는 됐어요. 언젠가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갔던 어머니를 보고 의사가 이런 말을 했대요. ‘중환자가 대환자를 모시고 왔군요.’ 그래서 함께 입원하신 적도 있어요. 아버님 사망 후 어머니 체중이 15kg이나 줄었어요. 요즘에는 계단도 못 오를 정도로 상태가 안 좋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당뇨 전문치료기관에서 요양 중이십니다.”-최순실씨는 박근혜씨를 언제 처음 알았습니까.
“대학 1학년 때인 76년에 처음 봤어요. 그때 흥사단에서 행사가 있었는데, 거기 참기한 적이 있죠. 직접 만나본 것은 얼마 안 돼요. 계속해서 지켜보았는데 참 깨끗한 여자라는 느낌이 늘었습니다. 흐트러짐이 없고, 욕심도 없어요. 게다가 물러설 줄도 아는 분입니다. 아버님도 같은 생각이셨던 것 같아요.”-아버지와 박근혜씨를 둘러싼 여러 가지 소문들이 무성합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끊이지 않고 제기되어 온 의문점들도 많고요. 그 부분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 말은 하지 말죠. 마음 같아서는 조목조목 사실을 밝히고 싶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요. 제가 당사자도 아니고, 또 자칫 제가 한 말이 박이사장님에게 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박 이사장님께서 말씀하신다면 몰라도 제가 말하기엔 아직 때가 이릅니다.” 박근혜씨와 최태민씨 사이의 풍문들을 몇 가지만이라도 확인하려 했지만, 그녀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 자신의 아버지를 둘러싼 과거의 일들이 또다시 들춰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순실씨는 더 이상의 내용을 밝히지 않았다. 그녀는 “속시원하게 밝히지 못하는 사정을 이해해달라”며 기자와 헤어졌다. 말은 안했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소문의 핵심에 있었던 아버지를 둔 딸로서, 숨죽이며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곤혹스러움을 읽을 수 있었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박근혜’ 하면 벌써 ‘최태민’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인연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이렇다. 74년 8월 어머니 육영수 여자를 잃은 슬픔과 충격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박근혜씨에게 75년 1월 최태민씨는 간곡한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두 사람은 75년 3월 처음 만났다. 최태민씨는 한달 뒤인 75년 4월 대한구국선교단을 조직했고, 1년 뒤 구국여성복사단으로 개칭했다. 구국여성봉사단의 총재는 최태민이었고, 박근혜씨는 명예총재직을 맡았다. 그 때부터 두 사람과 관련된 일에 잡음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구국여성봉사단은 78년 12월 다시 구국봉사단이라는 이름으로 사단법인체로 전환됐으며, 새마음봉사단이 탄생했다. 79년 10월 26일, 최태민씨는 자신이 믿어 오던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자 활동을 중단 할 수밖에 없었다. 박대통령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이 ‘최태민과 박근혜의 잡음’에 대한 조사보고서를 올릴 때마다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었다. 80년도에 이르러 구시대 청산을 주장하는 신군부 세력들은 사회 전반의 각종 비리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최태민씨에 대한 조사도 진행했다. 그는 보안사령부에서 두 차례 조사를 받았다. 80년 11월 새마음봉사단이 일간지에 해체광고를 낸 뒤 87년 9월 어린이회관 분규가 있기까지 최태민씨는 일반인의 관심권 밖으로 멀어졌다. 그러다가 90년 10월 28일 서울 능동에 위치한 육영재단과 어린이 회관 안에 있는 고 박정희․육영수 기념사업회의 분규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최태민씨가 표면으로 부상했다. 이날 주최한 숭모회라는 단체는 ‘최태민 목사 규탄’을 이슈로 내세웠다. 최태민씨는 이미 분규가 있기 직전인 8월 말에 기념사업회와 육영재단에서 손을 뗀 상태였다. 이날의 분규로 ‘근혜․근영 자매 불화설’이 전면에 대두됐고, 가족간의 갈등과 불협화음을 염려한 박근혜씨는 급기야 그해 11월 3일 육영재단 이사장직과 기념사업회장직을 사퇴하고 근영씨를 후임으로 결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상의 과정에서 최태민․박근혜씨를 둘러싼 소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당사자인 두 사람은 침묵을 지켰다. 그것만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 소문은 그럴 듯하게 몸을 부풀려만 갔다. <우먼센스>는 90년 최태민씨와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직접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 인터뷰에서 최태민씨는 대부분의 언론 보도들을 부인했다.이제 진실 밝힐 사람은 침묵하고 있는 박근혜씨 뿐
최태민씨는 당시 육영재단 이사장이었던 박근혜씨의 자문역할에 그쳤다고 밝혔다. 그리고 매일 출근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월급을 받는다거나, 막강한 결재권한이 있다거나 하는 말들도 모두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가 박근혜씨에게 자문해 주었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그가 박근혜씨를 처음 만나게 된 과정이 현몽(육여사가 꿈에 나타나 ‘근혜를 잘 보살펴달라’고 부탁했다는 소문) 때문에 박근혜씨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소문에 대해서도 최태민씨는 부인했다. 자신은 위로의 편지를 보낸 적은 있지만 현몽운운한 적은 없다고 밝히면서 “대학교육을 받은 박이사장에게 ‘현몽’ 운운하는 것이 먹혀들겠어요?”라고 반문했다. 그밖에 최태민씨가 최면술을 한다던가, 안수기도로 병을 고친다는 소문 등에도 “근거없다”고 말했다. 최태민씨는 평소 박근혜씨를 ‘대화가 되는 인물’로 평가했다. 개인적으로 자신이 존경한다는 심경도 밝혔다. <우먼센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과 박근혜씨를 둘러싼 수많은 루머에 대해 속시원하게 밝히진 않았다. 자신과 관련된 소문에는 몇 가지 해명이 있었지만, 박근혜씨나 근영씨, 숭모회 등과 관련해서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이제, 최태민씨는 갔다. 그가 생전에 진실이라고 밝힌 부분은 지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의 진실을 밝힐 수 없게 됐다. 박근혜씨에게 몇가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지만 “이미 어느정도 밝힌 적이 있는데, 새삼스럽게 확인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말만 돌아왔다. 그말은 지난해 11월 자신의 에세이집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출간을 계기로 인터뷰했을 때 단편적으로나마 최태민씨와의 관계를 밝힌 것을 지칭한 것이다. 그때 인터뷰에서 그녀는 세상에 알려진 최태민씨와의 관계는 ‘기상천외한 거짓말’이라고 일축했었다. 그리고 최태민씨에 대해서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자신을 도와준 고마운 분’으로 말했다. 취재 중에 느낀 것은 최태민씨와 박근혜씨의 관련된 많은 소문들이 약간은 신빙성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속 시원히 해갈되지 않은 의문점들은 여전히 남아있다. 거듭되는 소문에 환멸을 느낀 두 사람의 침묵도 솝문을 부풀리는 데 일조한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최태민씨는 자신을 둘러싼 잡음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영원히 침묵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20여년을 끌어온 이 이야기들에 대한 진실을 말해 줄 사람은 박근혜 씨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