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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0~11일 김여정이 우리나라를 ‘남조선’이라 하지 않고 사상 처음 ‘대한민국’으로 호칭한 이유가 12일의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에서 보듯 핵무력에 의한 ‘적대국’ 공격용 명분 쌓기였음이 드러났다. 의도적인 용어 혼란 전술일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김정은 남매가 보지 못한 것도 있다. 수만 명으로 추산되는 한국 내 주사파들이 동요하고 있는 점이다. 1980년대 김일성 주체사상을 처음으로 퍼트리고 1990년대 초 평양에 밀입국해 김일성을 두 번 만났던 김영환씨(60·그 후에 전향해 북한민주화운동을 하고 있음)는 “주사파 중에서 통진당의 이석기같이 철저하게 민족기반적 적화통일 지상론자들은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그는 “다만 같은 주사파라 해도 그동안 정세 변화를 반영해 남과 북을 국가 대 국가로 인식하는 현실파들에겐 덜 충격적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북한이 동해상으로 장거리 탄도미사일을 발사한 지난 12일 서울역 대합실에 설치된 TV 스크린에 관련 뉴스가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이 동해상으로 장거리 탄도미사일을 발사한 지난 12일 서울역 대합실에 설치된 TV 스크린에 관련 뉴스가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평양 지도노선 따르는 주사파, 30%는 멘붕”

1995~2005년 주사파 조직인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을 맡았던 민경우씨(58). 2019년 조국 사태 때 자유주의로 전향 선언한 그의 얘기는 좀 더 구체적이다. “한국 주사파의 30% 정도가 멘붕에 빠졌으리라 본다. 지금까지 평양의 지도노선에 따라 한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김여정이 공식으로 대한민국이라는 표현을 썼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때도 비슷한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주사파는 한반도에 두 개의 코리아를 상상조차 못했다. 평양 지도부의 사전 통지도 없었다. 그땐 70%가 멘붕이었다.” 북한은 김일성이 공산당 정권을 수립한 이래 대한민국을 무력이나 내분에 의한 통일의 대상물로 보았다. 자기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고 한국은 부속물인 남조선에 불과했다. 김정일·김정은이 평양에서 김대중·노무현·문재인 대통령을 차례로 만나 가장 우호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때조차 우리 대통령을 “남조선 대통령”이라고 부른 배경이다. 북한 집권자들에게 조선은 ‘김일성 주체사상’의 나라, 남조선은 그 연장선에 있다. 주체사상에서 파생한 ‘우리민족제일주의’ ‘우리민족끼리’는 지난 수십 년간 한국 내부의 김정일·김정은 추종그룹이나 종북 성향 민족주의자들이 충실히 따랐던 성스러운 이념이었다. 주사파 운동권은 민족주의적 정서에서 출발했으나 결국 “장군님을 뵙고 싶다”로 귀결되었다. 세력으로서 ‘주사파 민족주의’는 1980년대 후반 태동해 학생·노동 운동권을 장악했고 지금은 정치권을 비롯해 사회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이슈별로 거센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문재인, 평양에서 ‘대한민국’이라고 안 해

주사파 민족주의는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부끄러운 불구의 나라로 인식한다. 그들은 자주적 민족주의의 정통성이 북조선에 있다고 믿는다. 순수 혈통 수령님의 우리민족 지도노선을 남조선이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 그런 정신 상태로 어느 날 백두혈통의 입에서 느닷없이 완성된 독립국가를 의미하는 “대한민국”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니 생경하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주사파 민족주의자들은 남조선이란 표현이 제격인 남쪽을 앞으로 대한민국이라고 불러야 할 판이니 난감하다. 2018년 9월 문재인 당시 대통령은 평양을 방문해 군중 연설을 하면서 자신이 대표하는 곳을 ‘한국’ ‘대한민국’이라고 하지 않고 ‘남쪽’이라고 표현했다. 평양 주민들에게 ‘남쪽 대통령’이라고 자기를 소개한 것이다. 김정은 앞에서 참으로 비굴하다는 느낌을 주었는데 절정은 “나는 북과 남 8000만 겨레의 손을 잡고 새로운 조국을 만들어나갈 것”이라고도 한 대목이다. 문 전 대통령은 왜 대한민국을 영원한 조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지, 김정은과 어떤 새로운 조국을 만들고 싶었던 건지, 이번 김여정의 대한민국 호칭엔 어떤 감상이 드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전영기 편집인
전영기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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