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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주어진 사회적 성(性), 즉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성·남성성을 수행할 뿐
젠더 규범에 대해 생각하고 선택할 기회 필요
게이 동급생을 만나고 놀란 것은 필자가 그동안 한 번도 동성애 관련 이슈를 들어본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첫 수업을 시작으로 편협했던 시야가 확장되는 경험을 했다. 미국 대학에서는 어떤 이론·이슈든 인종·계급·젠더·섹슈얼리티(sexuality) 등의 관점에서 해당 이론·이슈를 분석하고,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인종·계급·젠더·섹슈얼리티에 기반한 위치성(positionality)이 그 사회에서 개인의 삶의 맥락을 형성한다는 것을 배웠다. 동성애자·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 이슈는 ‘섹슈얼리티’ 관점에 포함되어 있었다. 또 레즈비언·게이 교수들의 수업도 수강했으며, 전 세계에서 온 레즈비언·게이 학생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소수자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위치성을 중요시하고, 인권 이슈를 더 이상 묵과하지 않는 것 등이 자연스러워졌다. 보수적인 가정과 기독교 문화권 안에서 성장한 필자에게는 가히 급진적인 변화였다. 그런데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보니 학계에서든 일상생활에서든 여전히 그 누구도 인종·계급·젠더·섹슈얼리티의 관점을 말하지 않았다. 사실 필자 역시 성소수자 이슈에 대해서는 당사자가 아니기에 무언가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페미니스트 교육자라면 강의실에서 그 이슈를 모른 척함으로써 성소수자의 존재를 지우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강의실에서 조금씩 성소수자 이슈를 발화하기 시작했다. 래리와의 일화를 말하기도 했다. 그러자 어떤 학생이 나와 비슷한 실수를 했던 경험을 공유하기도 했으며, 종강 즈음 한 학생이 내게 와서 커밍아웃하며 고맙다고도 했다. 이런 일들로 인해 앨라이(ally·동맹 혹은 협력자라는 의미로,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 및 혐오에 맞서 성소수자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을 의미함)의 중요성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가르칠 때 항상 소개하는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수행성(performativity) 이론’이 있다. 마치 연극배우가 무대에서 연극 공연을 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젠더, 즉 우리를 둘러싼 사회와 문화가 우리에게 기대하고 요구하는 여성성·남성성을 연기·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여자라면 화장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문화에서 여성은 집 밖에 나갈 때 화장을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주어진 젠더를 수행하는 것이다. 자신이 화장하는 것을 진정 좋아하는지, 화장하는 것이 지금 혹은 향후에 자신의 피부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더 나아가 인간이 왜 화장을 해야 하는지 등을 생각해 보고 선택할 기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젠더 규범을 따르지 않는 경우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적으로 처벌(punishment)받기 때문이다. 이때의 처벌이란 반드시 신체적 폭력만이 아니라, 예컨대 화장하지 않고 등교한 여자 대학생에게 누군가가 ‘오늘 얼굴이 그게 뭐냐, 화장 좀 해라’ 등의 말을 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런 사회에서 젠더란 문화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하는 행위다. 또 다른 예로 어떤 남성이 여성의 옷을 입고 밖에 나간다면 놀림거리나 폭력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1년 동안 여자로 살아보는 실험을 했던 독일인 이성애자 남성 크리스티안 자이델은 여성 차림을 하고 집 밖으로 나갔을 때 경험한 언어·신체 폭력에 대해 말한다(크리스티안 자이델, 《지구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2015, 지식너머).생물학적 성과 젠더 역할 간 관계는 임의적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기본값으로 설정되어 있는 이성애도 젠더 수행의 한 예시가 될 수 있다. 이 사회에서 이성 간 호감은 모두 연애로 연결된다. 이성이든 동성이든 나와 성격이 맞아 좋은 친구가 될 사람이 있을 수 있고, 호감을 갖고 더 친해지고 싶고 더 알아가고 싶은 ‘사람’이 이성일 수도 동성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호감 갖는 사람이 이성이라면 그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도 급격히 연애관계로 진행되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한 일인 데 반해, 호감 갖는 사람이 동성이라면 연애관계의 가능성을 차단해 버린다. ‘원래’ 연애란 이성과 하는 것이라고 대다수 사회 구성원이 암묵적으로 학습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흐름이 정말로 ‘원래 그런 것’인지 질문해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연애란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으로도 이어지기 때문에 문제가 더 복잡해질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동안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젠더 규범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해보는 일이다. 이 질문을 할 때 ‘원래 그런’ 젠더란 없으며, 타고난 생물학적 성과 사회에서 부과한 젠더 역할 간 관계는 임의적인 것이라는 주디스 버틀러의 개념에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다. 퀴어(queer)란 본래 ‘이상한, 기이한’으로 번역되는데, 여러 스펙트럼의 성소수자를 폭넓게 지칭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섹스·젠더·섹슈얼리티의 근대적 이해에 도전하는 모든 이론·실천·관점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필자는 얼마 전에 열린 제24회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앨라이로서 다녀왔다. 시청광장 사용을 허가받지 못해 장소 선정이 어려웠고, 축제 당일에도 바로 옆에서 성소수자 혐오 세력이 반대시위를 벌이고 있었지만,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과 망토 등으로 도배한 사람들의 신나는 얼굴과 몸짓은 그 모든 혐오를 압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당사자가 아니라는 핑계로 한발 물러나 있었지만, 여성과 남성이 함께해야 우리 사회에 페미니즘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듯이, 성소수자와 앨라이가 함께해야 변화가 앞당겨진다는 사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퀴어 이슈에 무지했으나 공부하는 과정에서 지식을 쌓으며 차근차근 시야를 넓혀갔던 필자와 같은 경험을 누군가도 하면 좋겠다. 나의 자녀들이 성인이 되어 살아갈 세상은 지금보다 더 확장된 지식과 함께 더 열려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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