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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국무부가 폭로한 러시아의 역정보전 실태
이미 우크라이나에선 21세기형 디지털전쟁 전개 중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거침없었다. 2월1일 모스크바를 찾은 헝가리의 오르반 빅토르 총리와 만난 뒤 푸틴 대통령은 기자회견장에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나타났다. 그는 “서방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러시아 발전을 억제하는 것”이라며 “우크라이나는 서방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말했다. 누가 봐도 러시아를 거대 서방에 맞서는 희생자로, 자신을 서방에 이용당하는 우크라이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으로 연출한 모습이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자신의 입으로 직접 ‘전쟁’을 언급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시키고 거기에 공격용 무기들을 잔뜩 배치하며 극우 민족주의자들에게 돈바스(우크라이나 동부)나 크림 문제를 군사적 방법으로 해결하도록 부추기면서 우리를 무력분쟁으로 끌어들이는 시나리오도 가능하다”고 예상하면서다. 우크라이나 국경에 10만 대군과 공격용 무기체계를 배치한 측이 러시아라는 점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미국과 나토를 향해 나토의 동진 중단, 러시아 국경 인근에 공격용 무기 배치 금지, 유럽 군사 인프라의 1997년 수준 복귀 등을 요구했는데, 1월26일 받은 답변에서 모두 무시됐다고 말했다. 이 요구는 사실상 공동 안보기구로서 나토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푸틴이 말한 1997년은 나토와 러시아가 서로 파트너로 인정하는 ‘상호 관계·협력·안보 기본협약’을 맺은 해다. 그동안 국력과 자신감을 키운 푸틴은 이제 나토를 누르려고 시도한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월1일(현지시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해 러시아에 병합된 크림반도를 무력으로 탈환하려 할 경우 나토와 전쟁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AP 연합

러시아, 세계 최강의 반서구 세력임을 입증

사실 푸틴은 우크라이나에서 총 한 방 쏘기도 전에 이미 서방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다. 러시아 미사일도, 전투기도, 전차도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지 않았지만, 나토는 이미 혼비백산한 상황이다. 러시아는 외교적 해결을 갈구하는 미국에 느긋하게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레토릭으로 요구 조건 수락을 압박하면서 진을 빼고 있다.

러시아는 굳이 재래식 군사력을 동원해 피를 흘리지 않아도 이미 원하는 걸 상당히 얻었다. 지금까지의 압박만으로도 러시아는 유라시아의 최대·최강 반서구 세력임을 입증했다. 미국과 나토가 다루기에 버거운 상대로 자리 잡았다. 냉전 이후 미국이 누려온 일강체제에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나토는 대전차미사일 등을 우크라이나에 지원하고, 2월2일엔 미군 공수부대 등을 폴란드·독일·루마니아 등 유럽 국가로 이동시키기로 했다. 하지만 비회원국인 우크라이나에 대한 직접적인 파병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사태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열망에 대한 러시아의 반발에서 시작된 것인데도 말이다.

이제 러시아는 국제사회의 핵심 행위자로 단박에 부활하고 있다. 푸틴과 러시아 소식이 국제뉴스의 주류를 차지한다. 그동안 국제뉴스에서 ‘G2’로 불리던 미국과 중국의 종속변수 정도로만 다뤄지고, 국제사회 주무대에서 변방 국가로 밀려나고 있었다는 사실은 금세 잊히고 있다.

문제는 러시아의 장점을 말하는 이런 분석도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공작 사무소에서 은밀하게 생산된 역(逆)정보일 수 있다는 점이다. 정보 신뢰를 떨어뜨린 것은 아무래도 러시아의 역할이 크다. 핵보유국인 러시아는 나토를 뛰어넘는 재래식 전력도 강하지만, 이에 더해 세계 최강 수준으로 평가받는 사이버전과 가짜뉴스를 앞세운 역정보전으로 서구를 압박해 왔다. 2016년 미국 대선 개입 의혹도 받을 정도다.

우크라이나 제92기계화여단 소속 장갑차들이 합 1월31일(현지시간) 접경지역의 인근 기지로 이동하고 있다.ⓒAF 연합

‘러시아의 역정보 언술’ 담은 美 보고서 주목

미국은 2006년부터 러시아·중국·북한을 비롯한 적성국이나 국제 테러조직의 역정보전을 감시하고 대응해 왔다. 미 국무부 산하 글로벌대응센터(GEC)는 미국과 미국의 이익을 노리는 외국 정부와 비정부기구의 프로파간다와 역정보에 대응해온 핵심 조직이다. 미 국무부는 1월20일, 그동안 GEC가 수집하고 감시해온 러시아의 사이버전과 역정보전·가짜뉴스전·모략전 등의 전모를 공개하면서 역공에 나섰다. 미 국무부의 ‘역정보전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는 특히 우크라이나를 둘러싸고 사이버전·재래식 군사력에 가짜뉴스를 앞세운 모략전까지 동시에 전개해 왔다.

눈에 띄는 것이 러시아 연방정부의 자금을 지원받는 국영 국제방송인 ‘RT’와 인터넷 다국어 매체인 ‘스푸트니크’가 앞장서서 역정보를 확산해 왔다는 지적이다. 신뢰가 생명인 언론을 가짜뉴스 공작과 역정보전 도구로 활용한 것이다. RT는 영어·프랑스어·독일어·스페인어·아랍어 등 다언어로 운영되는 거대한 다채널 미디어 그룹이다. 미국의 CNN이나 영국의 BBC처럼 서구의 호텔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널리 퍼져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이 ‘러시아의 5대 지속적 역정보 언술’이라는 보고서다. 푸틴 대통령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교부 장관을 비롯한 러시아 지도자가 해온 발언을 다섯 분야별로 정리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가장 많이 쓰인 기법이 ‘러시아는 서방의 억울한 희생자’라는 메시지를 발신하면서 피해자 연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푸틴은 ‘서방에서 러시아에 대한 혐오와 공포가 오해를 불러왔다’는 발언을 자주 한다. 2월1일 기자회견에서도 “러시아의 발전을 방해하는 것이 서방의 의도”라고 말했다.

둘째는 역사의 부인 또는 수정을 의도한 발언이다. 푸틴과 러시아 미디어는 소련과 러시아의 과거사를 대대적으로 수정하거나 부정하는 발언과 보도를 끊임없이 해왔다는 것이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인 1939년 8월23일 나치 독일과 손잡고 모스크바에서 스탈린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양국 외무장관이 ‘독소 불가침조약’에 서명한 사실을 애써 축소하며, 조약 직후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으면서도 오히려 폴란드가 2차 대전을 유발했다는 누명을 씌우려 한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러시아는 소련 시절 악명 높은 강제수용소의 실상을 서방이 왜곡했다며 과거사 명예회복을 추구하고, 나토가 구소련의 붕괴를 유도했다는 주장을 퍼뜨린다고 보고 있다. 소련이 공산주의 중앙계획경제와 통제사회 등 자체 모순으로 스스로 붕괴했음에도 푸틴은 이를 무시하고 나토의 기획으로 ‘위대한’ 소련이 무너졌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우크라이나 사태 역시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우크라이나가 오래전부터 러시아의 일부였다며 국가 지위를 부인하는 공작을 벌여왔다는 게 미 국무부의 지적이다.

셋째는 서구 문명에 대한 과도한 비판이다. 푸틴은 서구 문명이 전통 가치를 잃으면서 붕괴가 임박했다고 주장해 왔다. 서구 문명의 대표적인 해악으로 LGBTQI(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퀴어·인터넥스(간성))의 권리 주장, 남녀평등, 다문화주의를 지목한다. 이 때문에 전통과 가족의 가치, 그리고 영성까지 사라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황당하기 짝이 없는 가짜뉴스를 퍼뜨리기 일쑤다. 일례로 푸틴은 “(서방에선) 엄마·아빠를 부모1, 부모2로 부른다”는 발언도 했다. 라브로프 외무부 장관은 “서구 학교에선 예수를 양성애자라고 가르친다”고 발언했다. 이렇듯 지도자도 가짜뉴스와 역정보를 거침없이 퍼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넷째는 자유와 개인의 권리에 대한 크렘린의 무조건적인 거부감과 반감이다. 러시아 매체와 지도자들은 중앙아시아·중동·아프리카의 시민의식 성장과 사회조직 활동을 ‘미국이 지원한 색깔 혁명’ 때문이라고 낙인찍는다. 크렘린은 개인이 권리와 인권을 보유하며, 정부가 민의를 따라야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 때문에 시민사회의 성장과 언론 자유를 주장하고 인권탄압과 부패를 고발하는 것을 대놓고 비판한다. 이런 내부 고발을 서방의 사주 때문이라고 왜곡하기 일쑤라는 것이다. 푸틴의 부패를 고발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왔던 변호사 알렉세이 나발니가 독살당할 뻔하고 투옥까지 된 것도 같은 이유로 해석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다섯째는 크렘린이 푸틴과 권력에 이익이 되지 않는 진실은 숨기고, 불리한 내용은 진위 판별이 헛갈리게 공작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러시아에 등을 돌리고 러시아의 공작을 서방에 폭로한 옛 정보·특수 요원에 대한 독침·방사능 공격이나, 우크라이나 동부의 러시아계 반군이 자행한 말레이시아 항공기 오인 격추 등의 진실을 덮기 위해 집중 공작을 해왔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RT 등 국영방송이 대대적으로 나서 진실을 숨기거나 남에게 뒤집어씌우는 역정보 공작을 펼쳐왔다. 여객기가 우크라이나군의 미사일에 격추됐다고 허위 주장하는 식이다.

이는 의도적으로 진실을 왜곡해 크렘린에 유리한 여론을 조작하려는 검은 목적이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오보(Misinformation)가 아니라 의도적인 역선전(Disinformation)으로 분류해야 한다는 것이 미 국무부의 지적이다. 러시아는 이처럼 미디어, 특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철저히 전쟁 무기화하고 있다.

 

사이버전·역정보전 뒤 본격적인 전쟁 시작

사실 근대 이후 서구 열강에 밀렸던 러시아는 제정 시절부터 모략전·기만전·역선전전 등 비대칭전에 강한 전통이 있다. 이는 소련의 국가정보기관 KGB에 고스란히 계승됐으며, 1991년 소련이 무너지면서 공작 노하우와 인력이 러시아로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영어로 역선전을 의미하는 ‘디스인포메이션’이란 단어 자체가 러시아어인 ‘데진포르마차’가 기원일 정도로 그 뿌리가 깊다.

시대 전쟁은 사전에 사이버전·역정보전으로 상대의 사기와 의지를 꺾어놓고, 판단력을 뒤흔든 다음에 시작하는 게 공식화되고 있다. 지금 우리는 그런 21세기 전쟁을 이미 러시아에서 확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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