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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적 시선으로 음식 문화를 탐구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본인의 감각에 따라 맛을 주관적으로 판단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생각에 의문을 던진다. 누군가가 어떤 음식을 ‘맛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맛을 느끼는 게 본능이라면 인류, 즉 전 세계의 호모사피엔스들이 똑같은 입맛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 미국 사람이나 인도 사람이나 일본 사람이나 같아야지 않나. 그런데 지역이나 민족마다 좋아하는 맛, 싫어하는 맛이 다르다. 맛의 기준은 그 사람이 어느 지역에서 살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한국인이 김치, 떡볶이, 치킨을 좋아하는 것은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미국인이나 동남아시아인도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다면 한국인의 입맛과 유사해진다. 그러니까 맛있다, 맛없다는 판단은 본능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내 기호에 관여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맛 칼럼으로 잘 알려진 황교익씨가 《음식은 어떻게 신화가 되는가》를 펴냈다. 그는 사람들이 특정 음식에 대해 맛있다, 맛없다를 구분하는 것이 개개인의 고유한 입맛에 있다고 여기는 것을 틀렸다고 단언하면서 우리의 기호를 추동하는 ‘어떤 힘’에 주목한다. 음식에 들러붙은 판타지를 거둬들이면 나의 입맛을 교묘하게 조종하고 있는 자본과 정치권력이 보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음식은 어떻게 신화가 되는가》황교익 지음│지식너머 펴냄│332쪽│1만6000원 ⓒ 연합뉴스
《음식은 어떻게 신화가 되는가》황교익 지음│지식너머 펴냄│332쪽│1만6000원 ⓒ 연합뉴스

“맛을 느끼는 것은 본능 아니라 착각”

“자신의 미각을 의심하라는 거다. 동물들은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인지, 먹을 수 없는 것인지 본능으로 분별한다. 인간은 본능을 뛰어넘는다. 사회적 동물인지라 느끼는 맛도 사회적 결과물이다. 자본과 정치권력이 산업국가를 운영하는 데 유리한 음식을 대중에게 제안한, 심하게 말하면 강제한 것일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해야 내 앞에 놓인 음식을 바꿀 수 있다는 의지를 가질 수 있다.” 물론 본능적 영역도 있다. 황씨는 ‘문명의 맛’과 ‘본능의 맛’이 있는데, 인간은 이 두 개가 뒤섞인 상태에서 맛을 느낀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문명의 맛’은 의식하지 않고 여기서 딱 하나만 떼서 ‘본능’이라고만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인류 보편적인 일이지만 ‘사회적 맛’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게 쉽지 않다. 왜냐하면 사회 환경에 의해 ‘어떤 음식이 맛있다’라고 인간에게 세팅되면 우리 몸은 그걸 본능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착각하게 만든 것이다. 내가 커피를 좋아하는 건 커피가 맛있기 때문이지 자본이 값싸게 커피를 사 와서 팔고, 열심히 광고해서 우리가 커피에 익숙해지게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이미 뇌과학, 철학, 인류학에서 논의된 것들이다.” 황씨의 시선은 낯설어서 그의 주장이 때로는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우리가 맛있게 먹는 음식에 ‘딴지’를 거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불편은 매일 우리 앞에 놓이는 일상의 음식이 거대 자본과 정치권력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곧 놀라움으로 바뀐다. “인간 집단이 어떤 음식을 맛있다고 생각할 것인지 판단하는 데 영향을 주는 여러 요소 중 하나가 ‘집단의 구성원에게 넉넉하게 주어질 수 있는 음식인가’ 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 소속 집단에 많이 주어진 음식을 맛있다고 생각하게 돼 있다. 이는 인간의 안정 욕구와 관련이 있다. 많이 주어진 음식을 맛없다고 생각하면 자신이 속한 집단이 큰 혼란에 빠질 수 있다. ‘많이 주어진’이라는 조건은 그 집단이 처한 자연과 사회·경제적 여건 등에 의해 결정된다. 예를 들면 한국인은 오래도록 빵이 아니라 밥을 맛있다고 생각해 왔다. 한국인이 선천적으로 밥을 맛있다고 생각하게끔 태어난 것은 아닐 터인데 말이다. 한반도의 자연은 몬순기후로 밀농사보다 벼농사에 유리하다. 값싼 밀이 수입되어도 국내산 쌀을 사 먹을 만큼은 경제적 여유가 있다. 한반도에서는 밥을 먹기에 적절하니 밥이 맛있는 것이다.”  

‘길들여진 맛’에 대한 도발 수준의 재해석

황씨는 한국의 대표 음식이라 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이 지니는 판타지와 정부가 추진하는 ‘한식 세계화’의 모순도 지적한다. ‘웅녀는 마늘을 먹지 않았다’는 제목으로 오천 년 역사를 지닌 한반도 음식의 역사적 판타지를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비틀고 재해석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찾기도 한다. 한국 음식 문화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설명하는 대목도 눈길을 끈다. “사람이 왔다 갔다 하면 음식도 왔다 갔다 한다. 뒤섞이기 마련이다.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과 일본의 음식이 많이 섞였다. 김치만큼 많이 먹는 단무지가 그렇고 빙수, 붕어빵, 단팥빵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한국 전통음식에 관한 담론을 보면 일제강점기가 없다. 다 조선시대다. 그런데 문화를 이야기할 때 어떤 특정한 시간만 따로 분리할 수는 없다. 우리 삶 안에 그 시간이 들어와 있는 거니까. 그런데 치욕스러운 역사를 들추는 거로 생각하고 묻으려고 한다. 그러면 그때를 살던 민중의 삶이 묻히는 거다.” 황씨는 자신의 직업인 맛칼럼니스트를 일컬어 정치를 이야기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정치인과 요리사의 뿌리가 같다는 것이다. “요리사는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지 않는다. 그 음식을 먹을 사람들이 따로 존재하고, 그들을 먹이기 위해 요리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다 먹고 나서야 요리사가 먹는다. 이는 먼 옛날 부족장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부족장은 사냥물을 나눌 때 자신이 먼저 선택하지 않는다. 맨 나중에, 부족원이 나누어진 사냥물을 다 가지고 난 다음에, 나머지 하나가 부족장의 것이 된다. 한국의 정치인에게서 나는 부족장의 그 위대한 전통을 보지 못한다. 다들 제 몫의 사냥물을 내놓으라고 아귀다툼을 벌인다. 앞에 나서 일을 도모해도 내 몫을 버리는 것이 부족장임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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