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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준의 진짜 중국 이야기] 마오쩌둥의 성공과 실패(2)

1949년 10월1일 마오쩌둥(毛澤東)은 베이징(北京) 중심부의 천안문광장 사열대 위에서 전 세계를 향해 후난(湖南)성 사투리 발음으로 외쳤다.


“오늘 중화인민공화국 인민정부가 수립됐다!”


마오가 그렇게 외칠 수 있었던 것은 9월21일부터 30일까지 열린 전국 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중앙인민정부 주석’으로 선출됐기 때문이었다. 마오는 이보다 앞선 1945년 6월19일 열린 중국공산당 제7기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당 주석’으로 선출됐다. 마오는 당과 정부를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현재 중국 최고 권력자 시진핑(習近平)은 국가원수에 해당하는 ‘국가주석’과, 당을 지휘하는 ‘당 총서기’를 겸하고 있다.

 

중국의 마오쩌둥 전 주석과 김일성 주석이 환담하는 모습이 액자에 담겨 있다. ⓒ 연합뉴스·뉴스뱅크이미지

압록강 다리를 건너 한반도로 진군하는 중공군 ⓒ 연합뉴스·뉴스뱅크이미지

 

 

인명손실·경제적 희생 컸던 한국전쟁


중국공산당의 각종 기록들은 김일성의 한반도 통일 기도 전쟁에 중국군이 개입하는 데 대해 당의 고위 지도자 대부분이 “건국 후 불과 1년도 안 된 시점에 전쟁에 개입하는 것은 무리”라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으나, 마오의 주장에 따라 개입했음을 적시하고 있다. 중국 사람들이 “마오는 평생 세 차례의 큰 싸움을 벌여 승리했다”고 말하는 싸움 가운데 하나인 한국전쟁에서 마오는 과연 승리를 거둔 것일까. 


바이두는 마오가 한국전쟁에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투입한 병력 숫자에 대해 투입했다가 교체하는 방식의 이른바 ‘윤전(輪戰)’ 방식으로 연인원 240만 명이 동원됐으며 비전투 요원 50만 명까지 모두 290만 명이 투입됐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 체결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중국군의 인명손실은 사망, 부상 합해서 모두 30만7541명이었다고 1958년 9월20일 발표된 인민지원군 사무처 통계가 공개했음을 바이두는 전하고 있다.


마오는 왜 수립한 지 9개월밖에 안 되는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이 한국전쟁을 벌이게 하고 또 엄청난 수의 병력을 보내 개입하는 결정을 내렸을까. 1894년 일본과의 전쟁에 패한 청나라가 20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 것을 회복하기 위해서였을까. 마오의 결정이 중국의 위상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와 관련해 현재 중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바이두는 “이 전쟁으로 인해 중국이 입은 희생이 컸으나 미국과 대등한 작전을 수행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의 지위를 확보했다”고 긍정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바이두는 마오의 한국전쟁 참전이 중국 경제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남겼음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 중국 정부의 재정지출 가운데 국방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1950년에 41.1%였다가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한 1952년 한 해 동안 전체 재정의 43.0%라는 전무후무한 수준에 달했다고 지적했다. 정전 이후 중국 정부는 대체로 국방비 지출을 30% 선으로 줄이고 70%를 경제 건설에 투입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신생 중국 정부의 경제에 부정적인 결과를 남겼음을 적시한 것이다. 

 

다른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독단적으로 내린 마오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항미원조 전쟁의 승리에 따라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를 지키고 신생 인민정권을 공고하게 만들었으며 미국 제국주의의 전승불패의 신화를 깨면서 미국의 침략확장 기세를 멈추게 했다”는 평가를 얻기는 했지만, 인명손실과 경제적 희생이 너무 컸다는 것이 바이두의 평가인 것이다.


마오는 1953년 7월 한국전쟁 정전협정으로 전쟁이 일단 중단되자 곧바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착수해 1958년까지 소련으로부터 공업 기반 도입과 농업생산 증대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거의 재앙 수준의 참담한 결과로 이어졌다. 부진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결과를 만회하기 위해 마오는 1958년부터 1961년까지 ‘대약진운동’이라는 엄청난 무리를 하는 바람에 1인당 GDP 세계 최하위 수준의 빈곤 국가로 추락했다. 불과 5년 정도의 대약진운동 기간에 2000만~4000만 명의 아사자를 낸 것으로도 추산되고 있다. 

 


실패로 돌아간 마오의 경제정책들


마오는 제대로 된 강철 공장 하나 건설하지 않았으면서도 20세기 말까지 세계 최강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던 영국의 철강 생산량을 “3년 이내에 넘어서겠다”는 비현실적인 목표를 설정하는 선택도 했다. 무리한 목표 달성을 위해 마오는 전국의 시골마을에까지 이른바 ‘토로(土爐)’라는 간이 용광로를 만들게 했다. 그 결과 철강 생산은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 토로에 땔감으로 쓰기 위해 나무를 잘라 목탄을 만드느라 중국 삼림의 15%를 훼손하는 결과를 낳았다.


대약진운동에 실패해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 마오는 또다시 ‘문화대혁명’이라는 정치투쟁에 불을 붙이는 회복하기 힘든 실패의 선택을 한다. 자신의 경제 실정을 계기로 정치적 공격을 하려는 세력들에게 ‘홍위병(紅衛兵)’이라는 이름의 중·고생들을 수백만 명 동원해 폭력과 살인의 유혈이 난무하는 정치투쟁을 벌여 중국을 10년간 경제활동과 교육이 전혀 이뤄지지 않는 국가로 만든다. 

 

1966년 시작해 1976년 마오가 사망함으로써 종결된 문화대혁명은 이상주의자 마오가 산업 생산력이 낮은 농업국가 중국을 최고 수준의 사회주의 국가로 건설하려던 꿈을 철저히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결국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한 지 1년도 채 안 돼 한국전쟁에 개입한 마오의 결정은 철저한 실패로 결론지어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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