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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숭고한 어머니’ 신화는 어떻게 시작됐을까

어머니는 숭고한 이름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서 어머니를 만들었다고도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 어머니는 숭고했을까.  그림형제의 동화 중에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동화가 있다. 가난을 못 이긴 계모가 아버지를 쑤석여 아이들을 숲속에 버리고, 남매는 미리 뿌려둔 흰 조약돌을 따라 돌아오다가 사실을 눈치챈 계모가 조약돌을 숨기고 흰 빵을 주는 바람에 새들이 먹어버려 길을 잃었다. 숲속에서 남매는 마녀의 과자집을 발견하고 배고픈 마음에 먹어치우다가 마녀에게 붙잡혀 사육을 당한다. 마녀는 오빠를 살찌워 잡아먹으려다 동생의 기지로 자신이 대신 죽고 만다. 매우 잔혹한 줄거리다. 가장 잔혹한 대목은 계모가 아이들을 버리는 일, 그리고 마녀(엄마 연배의 나이 든 여성)가 아이들을 잡아먹으려 하는 일.  
영화 《마더》의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제공

 그런데 사실은, 이 동화의 원본에는 계모가 아니라 친모가 등장한다. 게다가 아이들을 버리기로 부모가 합의한다. 가난과 기아에 시달리던 중세 농민들 중엔 영아살해를 하거나 좀 큰 아이를 숲에 내다버리는 일이 제법 있었다고 한다. 친어머니가 아이들을 버린다는 설정은 너무 잔혹하므로 그림형제가 계모로 완화했다는 것이다. 거기에 슬쩍 주저하는 아버지를 부추긴다는 설정도 보태졌나보다. 


그렇다면, 숭고하고 헌신적인 어머니 신화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얼핏 생각해도 원본 이야기가 탄생한 15세기와 그림동화가 채집된 19세기 사이 어디쯤에서일 것이다. 이것이 서양 이야기라면 우리나라에서는 또 언제쯤일까. 아마도 비슷한 시기였을 것이다. 세계적인 대기근이 물러가고 물산이 풍요로워지던 시대. 숭고하고 헌신적인 어머니, 자본이 형성되기 위한 일종의 곳간지기, 가족생계의 분배자, 가족의 중심이자 순종하는 어머니는 근대 가부장제의 핵심이다. 


이 모든 어머니상은 어느 정도는 사실일 것이다. 실제로 어머니는 아이를 낳고 키우고 생명을 보살피고 교육시키느라 헌신해 온 존재다. 하지만, 삶에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 것을 넘어서서 숭고해지고 거룩해지는 일을 어머니라는 모습의 이상으로 삼아버리면, 어디에도 실재하는 어머니는 없어지고 그래야 마땅한 어머니만 남는다. 아무리 수고해도 그것이 당연히 그래야 하는 신화의 한 부분으로 취급된다면, 어디에 행복이 있는가. 자연스러운 것이 의무가 될 때 자연은 죽는다. 

 어머니라는 이름도 그렇게 괴로워졌다. 끊임없이 가부장제의 어머니 노릇을 강요받으며 살아온 어머니들이, 이제 그 완고한 가부장제가 허물어지는 시대에 부동산 투기에 교육 투기에 모든 악의 근원으로 지탄받으며 숭고한 어머니가 되기를 강요당한다. 아이를 같이 내다버린 친부가 동화 속에서 조용히 삭제되듯 사라지고 나서. 


페미니즘은 그 자체로 고정된 지식이 아니다. 삶의 태도이고, 인식의 방법이며, 원칙일 뿐이다. 나에게 페미니즘의 원칙은, 모든 사람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평등하며, 그가 타고난 어떤 지위, 성별, 재산, 기타 등등 때문에 차별을 감수해야 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인권의 원칙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자신의 인격적 사회적 한계 속에서 노력하며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는 존재이지 희생·봉사·헌신해야 하는 존재는 아니다. 사랑하고자 노력하는 일은 어머니가 아니라 인간의 의무이고,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페미니즘의 이상이다. 내 아이를 남의 아이 보듯 했던 있는 그대로의 내 어머니가 나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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