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요구하는 기준이 성별 따라 달라져선 안 돼
공적 이미지 관리, 공정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이뤄져야
아이돌 그룹이나 젊은 연예인들의 사생활에 크게 관심이 없는 필자에게도 최근 들어 보이고 들리는 것은 유명 여성들의 잇단 사과다. 아이돌 가수 카리나부터 배우 한소희, 최근에는 양궁 올림픽 3관왕 안산 선수까지,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이유로 모두 대중에게 사과문을 발표한 여성 공인이다.
카리나·한소희 ‘열애설’, 안산 ‘매국노’ 사과
3월5일 걸그룹 ‘에스파’ 멤버인 카리나는 배우 이재욱과의 열애 사실에 대해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자필 사과문을 올렸다. 팬들을 “많이 놀라게 해드려 죄송하고”, 그동안 자신을 응원해준 팬들이 얼마나 실망했을지 잘 알고 있기에 더 미안한 마음이라고 썼다. 20대 초반의 이 젊은 여성이 아무리 아이돌이라 해도 자신의 연애에 대해 팬들에게 이렇게 사과해야 하다니,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알고 보니 카리나와 이재욱의 열애 인정 보도 이후 카리나 팬들이 온라인상에서 분노를 표출했을 뿐 아니라, 카리나 소속사인 SM엔터테인먼트 사옥 앞에 시위 트럭을 보냈던 사건이 있었다.
중국 팬들이 보낸 것으로 알려진 이 트럭에는 “당신은 왜 팬을 배신하기로 선택했습니까? 직접 사과해 주세요. 그러지 않으면 하락한 앨범 판매량과 텅 빈 콘서트 좌석을 보게 될 거예요”라는 협박에 가까운 문구가 써있었다. 또한 열애설 보도 이후 SM엔터테인먼트의 주가는 계속 하락해 열흘 만에 13% 하락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영국 BBC를 통해 해외에도 보도된 바 있다. 한국의 K팝 스타들은 압박감이 크기로 악명 높은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며, K팝 스타의 소속사들은 자신의 스타들을 대중에게 ‘연애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romantically obtainable)’ 아이돌로 마케팅하고 싶어 한다고 보도되었다. 또한 이와 관련해 국내에서도 팬덤에 의존하면서 아이돌과 팬의 관계를 상품과 구매자로만 축소하는 산업구조에 대한 비판적인 담론이 형성되기도 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얼마 후인 3월16일, 배우 한소희 역시 배우 류준열과의 열애설과 관련해 결국 자신의 블로그에 해명 및 사과문을 게시했다. 두 사람의 열애설이 보도되자, 류준열의 전 애인이었던 걸그룹 ‘걸스데이’의 멤버 겸 배우인 혜리가 ‘재밌네’라며 환승연애를 저격하는 듯한 게시물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이에 대해 한소희 역시 인스타그램으로 ‘저도 재밌네요’라며 환승연애가 아니라는 메시지로 반박에 나섰으나, 결국 곧 사과문을 올렸다.
한소희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류준열과의 열애를 인정하고, 교제 시작 시점을 명시해 환승연애가 아님을 주장하며, 혜리를 향한 저격글을 올린 것에 관해 ‘잠시 이성을 잃고 결례를 범한 것 같다’며 ‘여러분(팬들)께 현명히 대처하지 못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했다. 혜리 역시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자신으로 인해 생긴 억측과 논란으로 피해를 본 분들께 사과드리고 혼란스러운 분이 계셨다면 역시 사과드린다고 전했다. 전 애인과 현 애인이 이렇게 사과문 공방을 이어가는 동안 당사자인 남성 배우 류준열은 소속사를 통해 열애를 인정했을 뿐, 자신의 환승연애 논란에 관해 어떠한 사과문이나 입장 표명도 하지 않았다.
또한 3월19일, 올림픽 3관왕인 양궁선수 안산 역시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사과문을 게시했다. 발단은 3월16일 그가 ‘국제선 출국(일본행)’이라는 일본식 한자가 적힌 전광판 사진과 함께 ‘한국에 매국노 왜 이렇게 많냐’는 메시지를 인스타그램에 올린 일이었다. 그가 올린 전광판은 광주의 한 쇼핑몰 내 일본 테마 거리 입구 사진이었다. 이 게시물은 온라인에 급속도로 퍼지며 누리꾼들의 반응을 이끌어냈고, 다음 날인 3월17일 해당 쇼핑몰 내 한 식당의 사장이 악플과 별점 테러를 받고 있다며 인스타그램에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3월19일 오전, ‘자영업연대’의 이종민 대표는 안산이 자영업자 전체를 모욕하고 명예를 훼손했다는 내용으로 그를 고소했다고 밝혔다. 이 대표는 “자영업자의 피해를 신경 쓰지 않는 일부 무책임한 사람들의 안일한 태도에 경종을 울리고자 고소를 제기했다”며 안산의 책임 있는 사과와 보상을 요구한다고 했다. 같은 날 안산은 자신의 언행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으신 해당 업체 대표, 점주들, 관련 외식업에 종사하는 모든 분과 국민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인스타그램에 사과문을 게시했다.
이와 관련해 온라인상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매국노라는 표현은 좀 심했다는 의견과 최근 들어 일본어로만 돼있는 간판이 증가해 불편했는데 이 사안이 과연 사과까지 할 일인가 하는 의견 등이 대립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자영업자 사이에서도 논란이 일고 있다. ‘당신이 뭔데 자영업자를 대표하는 단체처럼 행동하냐’ ‘누가 그 칭호(자영업연대 대표)를 줬냐. 난 동의한 적 없다’며 자영업연대의 대표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모든 자영업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 ‘안산 선수가 간판을 찍은 것도 아니고 한국인으로서 못 할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무슨 고소를 하냐’며 안산을 옹호하는 의견도 보인다.
안산의 경우는 앞의 두 연예인 사례와는 달리 과거 2021년 도쿄올림픽 3관왕 획득 당시, 국내 남성 네티즌들이 그의 숏컷 헤어스타일과 여자대학 재학 중인 것을 문제 삼으며 ‘페미’라고 낙인찍고 수많은 혐오글을 양산했던 역사가 있기에 조금 더 민감하다. 현재 각종 SNS에서는 2021년과 같이 안산을 옹호한다는 여성 및 자영업자들의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의 맥락 속에 위치
맥락은 조금씩 다르지만 카리나, 한소희, 안산의 사례에서 공통적인 점은 이들이 모두 여성이라는 것이다. 연애하는 당사자는 여성과 남성 모두인데, 유독 여성인 카리나와 한소희에게 더 비난 여론이 몰렸기에 그들만이 사과문을 올렸을 것이다. 이 현상은 유독 여성의 섹슈얼리티에만 더욱 심한 규제가 가해지는 가부장적인 우리 사회의 맥락 속에 위치시켜볼 수 있다. 예컨대 몸가짐이 조심스럽고 얌전한 것을 의미하는 단어인 ‘조신하다’는 말은 남성에게는 사용되지 않는다.
안산을 고소한 이종민씨는 ‘안 선수가 매국노라는 표현 대신에 (중략) 거리에는 일본어 간판이 난무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해 주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입장문에 밝혔다. 유독 여성에게만 ‘쿠션어’ 즉, 상대방이 듣기 좋은 말로 돌려 말할 것을 요구하는 맥락에서 나왔다고도 볼 수 있다. 여성에 대한 쿠션어 요구는 여성은 부드럽고 순해야 하기 때문에, 여성이 직설적이고 강한 주장을 하는 것을 불편하다고 느끼는 성차별주의적 고정관념에 기반한 행태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여성에게만 과도하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고, 여성 공인의 사생활 혹은 사소한 언행 하나에도 주의를 기울이며 사과를 요구하는 이런 불합리한 관행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는 기준이 성별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 될 것이다. 각 개인의 선택과 행동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며, 공적인 이미지 관리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성별에 따른 이중 잣대에 의문을 제기하고 변화를 촉구할 때, 우리 사회가 좀 더 성숙하고 포용적인 사회가 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