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37화 - 임팔의 아이러니
한국과 인도 임시정부의 군대…뒷걸음친 광복군 잔혹사
미얀마의 옛 수도 만들레이에서 인도 국경도시 임팔에 이르는 지역은 제2차 세계대전의 최대 격전지 중 하나다. 인도 공략에 나선 일본군과 이에 맞선 연합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여 9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곳에는 우리 식민지 역사의 아이러니가 담겨있기도 하다. 일본군에 끌려간 수많은 한인 청년들이 연합군의 총탄에 쓰러졌고, 종군위안부들이 일본군에 의해 무참하게 학살되었다. 또한 ‘임시정부(임정)의 국군’인 한국광복군 대원들이 영국군의 일원으로 참전해 일본군에 맞서 싸운 곳이다. 안타깝게도 같은 민족끼리 서로 적이 되어 총부리를 겨누었던 것이다.
지난 8월, 필자는 방송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만들레이를 찾았다. 일본군 위령탑과 추모비가 군데군데 눈에 띄었지만, 무고하게 쓰러져간 한인들의 자취는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광복군 대원들이 머물렀던 만들레이 왕궁에는 독립운동 유적지 표지석조차 세워져 있지 않았다. 임팔 전투 당시 광복군 공작대원들은 영국군 사령부가 있던 이 왕궁을 중심으로 활발한 첩보전과 선전 활동을 펼쳤다. 이들은 일본군에 포위될 위기에 놓인 영국군 제17사단을 무사히 구해내는 전과도 올렸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광복군은 미군과 협력해 한인 위안부들을 국내로 안전하게 피신시키는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임정 직속으로 창설된 정식 국군으로서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데 앞장섰던 셈이다.
하지만 일제의 갑작스런 항복 선언은 광복군에게는 실로 통탄할 일이었다. 미국 전략첩보국과 추진해 온 국내 진공작전이 무산되었던 것이다. 김구 임정 주석은 “왜적의 항복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써 참전을 준비한 것이 모두 허사가 됐다”고 탄식했다.
비록 참전국의 지위를 얻진 못했다 해도 광복군의 역사적 의미는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자의든 타의든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가 일본 황실을 지키는 근위장교를 거쳐 사단장으로 복무했고, 수많은 한인 청년들이 제국 군복을 입고 연합군에 대항했다. 만일 임정과 광복군이 없었다면 전후에 연합국이 한국을 ‘적대국’으로 대했을 거란 분석이 나오기도 한다. 그만큼 광복군이 갖는 상징성이 크며, 특히 임팔 전투에서 연합군과 공동 작전을 펼친 일은 우리 현대사의 중요한 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한국과 인도 임시정부 군대의 ‘엇갈린’ 운명
공교롭게도 임팔 전투의 현장에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동족끼리 총을 겨눈 또 다른 식민지인들이 있었다. 영국군으로 입대한 인도인들과 일본군에 가담한 ‘인도국민군’ 병사들이 서로 적으로 싸웠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중 200여만 명의 인도 청년들이 영국군으로 참전했는데, 1942년 일본군의 동남아 침략시 6만5000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그러자 일본은 이들을 규합해 인도국민군을 창설하고 수바스 찬드라 보세(1897~1945)를 총사령관으로 앉혔다. 그는 41세의 젊은 나이에 간디·네루에 이어 국민회의 의장에 당선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간디의 비폭력운동에 맞서 “개인이 죽어야 조국이 산다”면서 무력항쟁을 주장했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보세는 독일로 건너가 히틀러에게 인도 해방전쟁에 함께 나설 것을 호소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군사지원 대신 선전용 라디오 방송만 허용할 뿐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보세의 반영(反英) 선전전에 대응해 영국이 소설 《동물농장》으로 유명한 조지 오웰(1903~1950)을 선전요원으로 발탁한 사실이다. 인도에서 태어난 오웰은 미얀마에서 식민지 경찰로 일하다가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후 사회비평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BBC 마이크를 잡은 그는 “파시스트의 지원으로 인도 해방이 임박했다”는 보세의 공세에 맞서 “영국 지배하의 삶이 파시즘 보다 차라리 낫다”면서 인도인들을 설득했다. 기록에 따르면 오웰은 15개월 동안 선전 활동을 하면서도 보세나 인도국민군을 직접 비난하진 않았다고 한다. 식민지에서 태어나 약소민족의 울분에 공감한 때문일 것으로 풀이된다. 주목할 만한 건 그가 “대동아공영권은 식민지 수탈을 위한 허구”라며 일본의 야욕을 고발하고, 또한 일본의 인도 침공을 예견하는 방송을 내보낸 점이다.
오웰의 예측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나치 독일에 실망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보세는 도조 히데키 총리의 지원을 받아 ‘자유인도’ 임시정부를 세우고 인도국민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마침내 1944년 3월 보세가 이끄는 인도국민군은 일본군과 함께 미얀마에서 인도 임팔로 진격했다. 영국 식민지배를 끝장내고 ‘해방 인도’가 실현되는가 싶었다. 하지만 임팔 전투는 세계 전쟁사상 유례없는 한심한 전쟁이었다. 보급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모하게 진격한 일본군은 약 4만 명이 굶어죽었고, 인도국민군도 엄청난 타격을 입고 퇴각했다. 결국 일본 패망 다음날, 또 다시 망명길에 오른 보세는 대만에서 의문의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보세가 이끈 인도국민군은 한국광복군과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 해외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군대란 점, 독립된 지휘권을 가졌다는 사실, 식민지 출신 군인들이 참여했고 국내 진공작전을 시도한 것까지도 공통점으로 들 수 있다. 아이러니한 일은 임팔전투에서 광복군은 영국군의 일원으로 싸웠고, 인도국민군은 일본군에 가담함으로써 식민지인끼리 서로 총부리를 겨눴다는 점이다. 더 당혹스러운 건 침략자와 손잡은 인도국민군은 인도에서 ‘구국의 군대’로 평가받고 있는 반면 우리 광복군은 국군의 뿌리로 인정받지 못하고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한 사실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인도국민군이 국내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영국군에 속한 동족들을 죽이는 사태가 벌어졌을 터다. 게다가 인도국민군은 추축국 편에 선 ‘전범 군대’였다. 그럼에도 전후 영국 총독부가 인도국민군 지휘관들을 군사 재판에 회부하자 수많은 국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보세와 투쟁 노선을 달리했던 국민회의 지도자들도 “파시스트(일제)와 협력했지만 조국 독립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지녔다”라며 이들을 적극 옹호했다. 얼마 후 국민군 장교들은 모두 풀려나게 되었다. 종교·인종 문제 등 복잡한 정세 탓도 있었겠지만 인도 지도자들은 다른 독립운동 노선을 포용하는 사회적 합의를 이뤄냈던 것이다. 반면 우리는 해방 정국에서 독립운동 세력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고, 김구 주석의 암살에 이어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임정의 국군’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국군의 날’을 광복군 창설일로···반짝 이벤트로 끝내지 말아야
망국의 고비마다 분연히 일어선 의병, 이들과 강제 해산된 대한제국 군인들이 한데 뭉쳐 독립군이 되었고, 또 이들이 광복군으로 이어졌다. 해방 후 미 군정청도 광복군의 정통성을 인정했다. 국방사령부를 통위부라 하여 대한제국군의 맥을 잇게 했고, ‘국군의 뿌리’로 알려진 조선경비대도 대한제국군과 광복군의 계급체계를 그대로 따랐다. 거기에 일본군 최고 계급자인 이응준은 “국군의 적통은 광복군이 되어야 한다”면서 절대 다수인 일본군 출신자들을 제치고 광복군 출신을 통위부장으로 추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해방 이후 70년이 지나도록 광복군은 우리 군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당했다. 참으로 뒤틀린 역사의 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9월17일은 한국광복군이 탄생한지 79주년을 맞는 날이다. 늦었지만 이 정부 들어 독립군과 광복군을 처음으로 국군의 역사에 편입시켰다. 한데 현재 10월1일인 ‘국군의 날’을 광복군 창설일로 옮기자는 얘기는 반짝 나왔다가 주춤해진 상태다. 어디 광복군의 역사가 국군 역사에 포함되는 데서 그칠 일인가. 수십 년 동안 지켜온 기념일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렇다고 반짝 이벤트로 끝낼 일은 더더욱 아니다. 지금부터라도 광복군의 역사적 당위성을 이해시키고, 설득하고, 공유해서 국민적 공감대를 이끌어내도록 힘써야 한다. 내년 광복군 80년 생일은 ‘임정의 국군’이 ‘대한민국의 국군’으로 제자리를 찾는 날이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