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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슬픔과 분노 교차한 김복동 할머니 빈소

‘죄송합니다. 김복동 할머니, 그곳에서만큼은 맘 편히 쉬세요.’ 1월29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특1실엔 슬픔이 가득했다. 전날 향년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신 김복동 할머니를 추모하기 위한 행렬이 이어졌다. 교복 입은 학생부터 점심시간에 짬을 내 들른 직장인, 먼 지역에서부터 아이 손을 잡고 온 부모까지 다양했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비슷했다. 김 할머니의 사진 앞에서 끝내 터지는 울음을 감추지 못했다. 한 남성은 한참을 울다 겨우 몸을 일으켜 나와서는,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몇 번을 돌아보다 다시 두 번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장례가 시작된 이날 오전 11시부터 조문객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첫날 하루 조문객만 1500명이 넘었다. 가시는 길에 ‘무엇이라도 돕고 싶다’며 빈소에 남아 봉사를 자처하는 이도 많았다. 교복을 입은 채 빈소 입구에서 4시간 동안 조문객에게 조화를 건넨 김지윤(19)씨는 “할머니 돌아가실 때까지 (위안부 문제가) 해결된 게 없다”며 “안타깝고 죄송할 뿐”이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빈소 벽 한 편엔 조문객들이 김 할머니에게 남긴 메시지가 가득했다. ‘남은 과제들은 이제 저희가 끝내겠습니다’, ‘me too를 with you로 만들어주신 할머니’ 등의 말들이 적혀있었다.
1월29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 특실에 마련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복동 할머니 빈소를 찾은 시민들이 조문을 하고 있다. / 시사저널 고성준
1월29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 특실에 마련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복동 할머니 빈소를 찾은 시민들이 조문하고 있다. / 시사저널 고성준

‘의인 김복동’ 기억하려는 발길들

27년간 평화‧인권운동가로 활동한 김 할머니가 1월28일 별세했다. 김 할머니는 14세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8년 만에 귀향(歸鄕)한 그는 1992년 자신이 겪은 피해를 세상에 공개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65세였다. 이후 위안부 문제를 알리고, ‘전쟁 없는 세상’과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이 생기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세계 각지를 돌며 목소리를 냈다. 김 할머니는 마지막까지도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했다. 지난해엔 암 수술을 받은 직후에도 휠체어를 타고 나와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했다. 그는 눈을 감기 직전까지 최선을 다해 싸웠다. 병상에서 남긴 마지막 말도 “끝까지 싸워 달라”였다.  시민들은 김 할머니를 단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아니라 ‘운동가’이자 ‘의인’으로 기억한다. 3년째 ‘소녀상 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는 강현경(25)씨는 “수요시위에서 항상 힘 있게 말씀하시던 모습이 기억난다”며 “아흔이 넘어서도 반전과 평화를 위해 활동하시던 모습이 정말 대단하셨다”고 했다. 빈소에 온 유경근 세월호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은 “할머니는 용기를 주신 분”이라며 “할머니들의 수십 년 투쟁을 보며 많은 힘을 받았다. 얘기하는 것부터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 끊임없이 싸우시는 모습은 귀감이었다”고 했다.
2월1일 오전 서울 시청광장 일대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복동 할머니의 노제가 진행되고 있다. / 시사저널 고성준
2월1일 오전 서울 시청광장 일대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복동 할머니의 노제가 진행되고 있다. / 시사저널 고성준
김 할머니 죽음 앞에 비통함과 분노를 느끼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김 할머니와 함께 투쟁해온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는 영정 사진 앞에서 한참 울분을 토했다. 이 할머니는 “끝까지 싸워서 이길 거에요. 잘 가세요”라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빈소를 나와서는 “대한민국은 힘이 없나. (왜 일본에게) 말을 못하나. 왜 (위안부 문제) 해결을 못해주나”라며 “하늘나라에서도 할머니들이 모여서 투쟁하고 있다. 반드시 사과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  

평소보다 규모 커진 수요집회…“내가 김복동이다”

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 이틀 뒤 열린 1372차 수요시위엔 평소보다 2배 정도 많은 인원이 모였다. 시위를 주관한 노혜지씨는 “김 할머니는 수많은 피해자들의 상징이었다”며 “전쟁 없고 성폭력 피해자 없는 세상을 위해 활동한 할머니 뜻을 이어 시위는 계속될 것”이라고 외쳤다. 수요시위 후 전 일본 대사관 앞에서 1인 시위를 한 강한비(16)씨는 “할머니들 돌아가시기만 기다리는 일본 정부나, 문제 해결에 소극적인 한국 정부에 화가 나 추위도 느껴지지 않는다”며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학생 김린(21)씨는 “우리는 살아계신 피해자 할머님의 숫자를 내려 세어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내가 김복동이다’하며 싸워나가면 생존자는 23명이 아니라 점점 늘어나는 것”이라며 더 열심히 싸워나가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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