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1000명 중 909명 “가장 영향력 있다” 평가…경제 실정에 지난해보다 6.4%P 떨어져
세계 유수의 유력 언론은 매년 주요 인사의 영향력을 평가한다. 미국 주간지 ‘타임’은 ‘가장 영향력 있는 100대 인사 (The 100 Most Influential People)’를, 경제잡지 ‘포춘’과 ‘포브스’는 ‘세계 위대한 리더 50인(The World’s 50 Greatest Leaders)’과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인물(The World’s Most Powerful People)’을 조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시사저널이 매년 실시하는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가 대표적이다. 이 조사는 시사저널이 창간된 1989년부터 매년 실시되고 있다. 이 조사를 보면 지난 29년간 한국 사회가 어떤 질곡을 거쳤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올해 역시도 시사저널은 전문가 1000명에게 지금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지 물었다. 조사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국내 최고 여론조사기관 ‘칸타퍼블릭’에 맡겼다.
결과를 놓고 보면 우리 정치·경제·사회·문화는 여전히 ‘격동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탄핵정국과 장미 대선을 거쳐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최근 국내외 여러 곳으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다. 그런 와중에 2인3각 경기처럼 호흡을 맞춰야 할 정책 부처는 혼선을 거듭하면서 시장의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지난해가 ‘기대’였다면 올해 ‘실망’으로 돌아선 의견도 있다.
뜻밖의 인물이 등장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2018년 지금,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분야에서 한국을 움직이는 사람은 누구일까. 당신이 생각하는 그 인물이 맞을까. 한 페이지를 넘겨보면 그 답이 나온다.
우리 정치권이 대통령제의 폐해를 지적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 ‘권력의 집중화’다. 우리 민주주의 시스템이 대통령 한 사람에게 지나칠 정도로 권력이 집중돼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선거 때마다 거의 모든 대선후보들이 당선되면 권력 분산을 통해 대통령제 폐해를 없애겠다고 다짐했지만, 제대로 지킨 후보는 단 한 명도 없다. 이는 단순히 의지만 갖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그렇게 고착화돼 있다. 막상 품 안에 들어오면 내주기 싫은 게 권력이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수많은 군상(群像)들이 절대반지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그걸 차지하고자 살육(殺戮)을 서슴지 않는 것이 이를 잘 말해 준다. 현재의 우리 민주주의 시스템은 더욱 상황이 좋지 못하다. 1987년 군사독재를 무너뜨린 시민혁명은 대의민주정치 복원과 직접민주주의 실현을 기치로 내걸었다. 하지만 이는 되레 대통령의 권력 집중화로 이어졌다. 의회의 힘이 축소되고 청와대라는 권부(權府)가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모습은 매번 반복됐다. 그 과정에서 측근 몇 명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모습도 비일비재했다. 급기야 전임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비선실세가 국정을 좌지우지한 것도 모자라 국가예산을 사유화하는 사상 초유의 일까지 벌어졌다. 헌법이 정한 삼권분립은 허울뿐이었다. 사법부 수장이 행정부의 대표인 대통령과 재판거래까지 시도했다는 의혹도 점차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현재 한국형 민주주의 시스템이 안고 있는 슬픈 자화상(自畵像)이다.
시사저널은 1989년부터 매년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인물을 조사해 왔다. 여기서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동인(動因)을 꼽으라면 ‘영향력’이다. 그리고 이 영향력은 우리 사회 엘리트층이 주도하고 있다.
1989년 창간 때부터 인물 영향력 평가…국내 최고 권위
지금 대한민국 현실은 어떨까. 올해 역시 대한민국 최고 실력자는 문재인 대통령으로 나왔다. ‘절대지존(絶對至尊)’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Best of the Best)’ 등 어떤 수식어도 아깝지 않다. 실제로 지금까지 시사저널 조사에서 최고 자리는 현직 대통령이거나 차기 유력 대권주자가 차지했다. 이는 그만큼 우리 사회 시스템이 정치 지도자 한 명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올해 조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지목률에서 90.9%를 차지했다. 2위(10.1%)와는 9배 차이가 난다.
이번 조사는 전국에 사는 대한민국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했다. 쉽게 말해 1000명 중 909명이 문 대통령을 뽑았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지난해 수치(97.3%)보다는 다소 떨어졌다. 6.4%포인트 차이다.
이유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시사저널 조사는 매년 8월 실시된다. 지난해는 5월 ‘장미 대선’ 이후 정부가 막 출범했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의 기대감이 컸다. 이뿐만 아니라 정부 출범 후 대통령은 조각부터 각종 공공기관 인사까지 모두 챙겨야 하기 때문에 영향력 면에서 최고 수준이었다. 두 번째는 ‘허니문 효과’다. 5년 주기인 정권의 생태곡선에서 힘이 가장 막강한 시기는 출범 직후다. 아무래도 그 뒤부터는 권력의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지난해보다 지목률이 떨어진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문제는 방향성과 속도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 하락은 속도가 빠르다. 여권이 문제를 심각하게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 4월 판문점 선언 직후만 해도 같은 한국갤럽 조사에서 문 대통령의 국정지지도는 83%에 달했다. 하지만 9월7일 현재 문재인 대통령은 지지도가 처음으로 50% 아래로 떨어졌다. 불과 4개월 만에 반 토막 난 것이다.
전임 정권과 비교하면 어떨까. 한국갤럽에 따르면, 문민정부인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 71%의 높은 지지율로 출발했다가 이듬해 55%로 떨어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60%에서 34%로, 이명박 전 대통령은 52%에서 27%로 하락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만 42%에서 2년 차에 50%로 올랐다.
이듬해 지지율이 떨어진 것은 시사저널의 조사 결과 역시 같다. 노무현 대통령만 취임 때인 2003년(70.9%)보다 이듬해(75.7%) 올랐을 뿐, 이명박·박근혜 대통령 모두 취임 이듬해 지목률이 떨어졌다.<22페이지 그래프 참조>
이런 이유로 여권에서는 일련의 지지율 하락에 너무 민감해하지 말자고 ‘자위(自慰)’한다. 지지율 하락은 정상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하락의 이유가 경제 실정(失政)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최근 세계 여러 나라들이 ‘경제 실정’을 이유로 정권을 내주는 것을 우리는 숱하게 많이 봤다. 냉전 체제를 거치면서 이념은 더 이상 중요한 이슈가 되지 못한다. 그보다 중요한 요소는 먹거리다. 요사이 유럽 정치권에서 극우정당이 득세하고 있는 것은 난민 증가에 따른 일자리 문제를 이슈로 삼았기 때문이다. 예전 같았으면 이념에 가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경제 실정을 지금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다른 사람 때문에 내 일자리가 없어졌다는 피해의식은 선동주의에 입각한 극우정당의 출현을 부채질하고 있다.
‘경제 실정’에 지지율 떨어지는 文대통령
문재인 정부의 최우선 정책이었던 일자리, 즉 고용수지는 거의 최악이다. 물론 여권의 말처럼 이 문제를 단순히 최저임금제 시행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정책에 대한 시장의 평가는 냉정하다. 경제는 심리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심리가 너무 얼어붙어 있다. 공공과 복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산업에서 상황이 나아지지 않고 있는 것도 여권 전체를 답답하게 만든다. 건설업과 제조업 등 우리 경제의 선행지표들이 좋지 못한 것이 이를 잘 말해 준다.
더군다나 문 대통령의 적극적 지지층인 50대의 민심이반은 결코 간단히 여길 문제가 아니다. 이 세대는 경제에 대한 민감도가 다른 연령대보다 상대적으로 높다. 지난해 촛불 시민혁명에서 문재인 정부에 큰 힘을 실어준 세대가 바로 이들이었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의 버팀목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번 갤럽 조사에서 50대의 지지도가 38%로 떨어져 60대 이상(39%)과 다르지 않게 나타났다. 이러다가는 ‘이러라고 내가 촛불 들었느냐’는 말이 일상 언어가 될 수 있다.
최저임금제 혼선은 시작에 불과하다. 더 심각한 것은 40~50대의 가장 큰 고민인 교육, 부동산 문제다. 현 정부의 대표적 혼선이 바로 이 두 분야다. 부동산 문제와 관련해 여권은 컨트롤타워 없이 정제되지 않은 생각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다.
특정 정책을 편 것이 실패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부처 간 손발이 맞지 않고 있다는 것이 지금의 난맥상을 만들어냈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럴 경우 국민들은 문 대통령의 리더십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밖에 없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국정을 이끌 것으로 기대했던 국민들에게 문 대통령이 유약하고 소심한 이미지로 비치는 것은 지지도 하락을 부채질할 것이 뻔하다. 그럴 경우 문 대통령의 리더십은 빠르게 무너질 수 있다. 그동안 문 대통령의 높은 지지도 때문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던 차기 주자들이 서서히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권력의 원심력은 더욱 커질 게 분명하다.
한국갤럽 조사에서 문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이유가 높은 이유로 응답자의 41%가 ‘경제·민생 문제 해결 부족’을 꼽았다. 최저임금 인상(7%), 부동산 정책(6%), 일자리 문제·고용 부족(6%)까지 감안하면 60%가 경제 관련 이유를 지목했다. 경기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이 49%로 나와 7월(36%)에 비해 두 달 만에 13%포인트나 늘어난 것도 정부를 답답하게 만든다. 그러다 보니 최근 여권 내에서 ‘높은 지지율에 우리 스스로가 취해 있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고개를 들고 있다. 남북관계 진전을 통한 한반도 화해 무드 조성에 문 대통령이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동안 경제문제는 ‘김앤장’으로 불린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간 이견이 심화됐다. 혁신성장과 소득주도 성장을 놓고 우왕좌왕하는 사이를 보수여론이 교묘하게 파고들어 선동적인 이슈를 쏟아내고 있다고 ‘볼멘소리’만 들어놓을 때는 아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경제는 심리이기 때문에 경제 실정이 고착화되는, 다시 말해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쫓아내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생기지 말란 법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