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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대우그룹 창립 50주년’ 맞는 김우중 前 대우그룹 회장

한때나마 ‘김우중’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재계에서 금기시된 적이 있었다. 대우그룹 해체에 대한 국민적 충격이 그만큼 컸기 때문일 것이다. 일부 계열사 노조에서는 ‘체포조’까지 꾸릴 정도였으니 국민적 공분(公憤)이야 오죽했을까. 그만큼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대학 시절 장학금을 대준 인연으로 들어간 한성실업에서 7년간 무역업을 배운 김 전 회장은 만 30세인 1967년 대우실업을 세우고, 31년 뒤에는 재계 수장인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에까지 올랐다. 손대는 부실기업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우량기업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보면서 김 회장은 어느새 ‘샐러리맨의 우상’이 됐다.

 

하지만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고 하지 않던가. 설립 20여 년 후 재계 서열 2위 자리까지 급상승한 대우와 김 전 회장은 추락하는 과정도 급전직하를 거듭했다. 여론이 그를 ‘샐러리맨의 우상’에서 ‘희대의 사기꾼’으로 바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때 한국 경제의 희망 공식처럼 여겨졌던 ‘세계경영’은 그룹이 해체된 1999년 이후 물거품처럼 사라졌고, 자동차·건설·중공업·전자 등 주요 계열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다른 대기업 아래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국 경제사에서 대우그룹은 그렇게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김 전 회장의 세계경영은 쉼 없이 계속되고 있다. 주체만 기업에서 인재로 바뀌었을 뿐이다. 지금도 김 전 회장은 여론의 관심이 부담스럽다. 실패한 경영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부정적 인식 때문이 아닐까. 김 전 회장은 가까운 지인들에게 조심스럽게 “부정축재한 사기꾼으로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다. 나는 지금까지 평생을 조국 봉사의 신념으로 기업 활동을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가 최근 글로벌YBM이라는 ‘청년기업가 양성 프로그램’에 매진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룹 창립 5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김 전 회장은 지나온 세월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몇 안 남은 창업 1세대 기업인인 그가 바라보는 한국 경제는 어떨까.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고 외치던 그의 사자후(獅子吼)가 성장동력이 약해지고 있는 한국 경제의 희망이 되기를 바라는 건 지나친 기대일까. 김 전 회장과의 인터뷰는 3월8일 오후 서울 남대문로 대우재단 빌딩에서 진행됐다.

 

김우중 前 대우그룹 회장 © 시사저널 이종현

그룹 창립 50주년을 맞이했는데 감회가 어떤가.

 

감회라고 할 게 뭐 따로 있겠나? 그룹이 해체된 것도 다 지난 일이다. 사실 50주년 창립 기념행사를 작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주변에서 ‘기왕 50주년이 됐으니 뜻깊게 하자’고 해서 규모를 조금 키웠다. 지금 내가 한국 사회에 강조하고 싶은 건 ‘기업가 정신’이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기업가 정신’이 사라져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최근 정국을 어떻게 보는가.

 

걱정스러운 점은 우리 사회가 ‘최순실 게이트’의 핵심을 정경유착에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이런 것들이 모아져 기업을 경영하기 힘든 환경이 펼쳐진다면 그것 또한 불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돌이켜보면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우리 경제에서 산업 정책, 특히 제조업 정책은 없지 않았나. 금융 정책이네, 벤처네, IT네 하면서 이런 것만으로도 대한민국이 잘된다고 봤는데, 결국은 그런 게 잘못된 것 아닌가. 내가 생각하는 경제 성장의 핵심은 제조업이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한다는 거다.

 

 

올해는 한국 경제가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에 들어간 지 20주년이 되는 해다. IMF 체제가 한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IMF 관리 시스템 자체가 문제가 많았다고 생각한다. 당시도 나는 IMF 관리체제가 2~3년 정도 지나면 우리 사회에 심각한 부작용이 나올 거라고 봤다. 돌이켜보면 지금의 저성장과 청년 실업, 사회 양극화 등 모든 문제가 IMF 관리 시스템의 결과물이다. 독일이나 일본을 봐라. 이들 나라가 위기를 딛고 견실하게 일어날 수 있는 것도 제조업이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다. 최근 미국 트럼프 정부의 경제 정책도 간단히 요약하면 자국에 공장을 유치하겠다는 거 아닌가. 얼마 전 한 언론보도를 보니 해외에 진출한 한국 기업 공장 10%만 국내로 들여와도 취업률 62~63%가 해결된다고 한다. 물론 제조업으로만 먹고살자는 게 아니다. 핵심 분야만 국내에서 하자는 거다. 그런 점에서 IMF 프로그램은 분명 잘못 처방됐다.

 

 

기업 스스로도 제조업 육성에 소홀하지 않았나.

 

정부의 산업 정책이 제대로 갖춰져 있었으면, 가령 국내에서 제조시설을 유지하는 데 있어 지원책을 폈더라면 이렇게 됐을까. 기업이야 이윤을 추구하는 집단이니 그렇다 쳐도, 정부는 다르지 않은가. 산업 정책이 잘못되면 일자리도 문제가 되고 무엇보다 당장 세금조차 제대로 걷을 수 없는 거 아닌가. 그러기에 제대로 된 산업 정책이 필요한 거다. 정부의 의도를 기업이 알지 못한다고 탓할 수는 없는 거 아니겠는가.

 

1998년 9월10일 전경련 회장에 추대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시사저널 임준선

대우 하면 세계경영이 떠오르는데, 지금 지적한 제조업 육성 정책과 공존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세계경영을 하더라도 제조업의 핵심은 국내에 두고 가자는 게 내 생각이다. 그 당시도 우리 대우는 기술 개발, 핵심 원·부자재 관리는 국내에서 했다. 값싼 노동력을 이용한 조립 가공만 해외에서 했을 뿐이다. 무역 관세를 뛰어넘기 위한 전략이 세계경영이라고 보면 된다.

 

 

가정이지만, 만약 지금까지 대우가 남아 있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사실 아쉬운 게 몇 가지 있다. 당시 나는 지금의 삼성·현대차그룹과 같은 지배구조로 회사를 경영할 생각이 없었다. 아마도 2세·3세 경영은 안 했을 거다. 무엇보다 내가 갖고 있는 계열사 지분이 별로 없었다. 그러니 세습이 될 수 없다. 또 하나는 내가 보기에 지금, 한국 경제의 가장 취약한 부분은 수출 업종이 삼성의 휴대폰, 현대차의 자동차 등 특정 품목에 쏠려 있다는 점이다. 당시 대우는 그런 게 없었다. 다양한 포트폴리오로 기업을 경영해 나갔기 때문에 만약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면, 한국 경제 성장에 기여하지 않았겠느냐는 게 내 생각이다.(동석한 장병주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회장은 “1999년 워크아웃에 들어갔을 때 채권단이 놀란 게 회장님 지분이 별로 없었다는 점이었다. 본인 스스로도 ‘전문경영인’이라고 늘 말씀하셨다”고 설명했다.)

 

 

대통령 탄핵 이후 정국이 어수선하다.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거라고 보는가.

 

과거 1997~98년 IMF 때도 상황은 비슷했다. DJ(김대중 전 대통령)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권이 교체되고 동시에 IMF 관리 체제에 들어갔다. 반(反)기업 정서까지는 아니었어도, 재벌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이 많았다. 거기에 IMF까지 왔으니 어땠겠는가. 그러니 지금 외신에서 우리 경제를 ‘IMF+알파(α)’라고 하고 있지 않나. 또다시 IMF와 같은 위기가 오지 말란 법이 없다. 자칫 정치지형이 여소야대로 가면서 기업을 옥죄는 정책만 나올까 걱정된다. 한번 찾아봐라. 산업을 장려하는 것이 있는지. 그게 진짜 걱정스럽다.

 

 

기업 스스로 자성할 부분도 있지 않나.

 

창업 세대와 2~3세대 사이 정서적인 차이는 분명 있다. 무엇보다 창업주의 기업가 정신이 2~3세대로 넘어오면서 없어지는 게 아쉽다. 내가 창업할 때 기업 하는 사람들은 나의 발전과 국가의 발전을 연결 지어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2~3세대는 자기의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만 기업을 경영하니 어떻겠나.

 

 

대기업 스스로도 중소기업이 성장해야 할 사다리를 걷어차 버린 건 문제가 아니겠는가.

 

동감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세계경영을 계속적으로 한국 기업들에 강조하고 싶다. 어찌 됐건 당시 대우는 해외로 뻗어나갔고 특히 한국 기업이 안 찾아간 곳을 우선적으로 공략했다. 가령, 당시 많은 건설사들이 중동에 진출할 때 나는 직원들에게 거기 가서 경쟁할 필요가 있냐고 말했다. 그랬기에 우리 대우가 리비아나 수단 등 아프리카 쪽으로 간 거다. 지금 재계 젊은 총수들에게 조언한다면 ‘돈은 얼마든지 벌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보다는 일에 대한 성취가 중요하다. 한마디로 자기 만족도를 높여야 한다. 그걸 위해 기업 경영을 하는 거다. 지기 이익만 추구하는 것은 한국 대기업의 역할이 아니다.

 

1996년 6월6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거행된 대우비즈니스센터 기공식에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왼쪽 세 번째)이 시삽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역설적으로 대우가 해체되면서 세계 곳곳에 많은 인적 네트워크가 생겨났다고 들었다.

 

우리 회사의 사훈은 ‘창조·도전·희생’이었다. 특히 당시 한국 대기업 중에서 ‘희생’을 강조한 회사는 대우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 대우가 없어지면서 가장 안타까운 게 대우라는 브랜드 가치가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됐다.

 

 

지난 몇 년간 인재 양성에 열정을 쏟았다고 들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솔직히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고맙다’는 말밖에는 더 이상 할 게 없다. 아까 말한 것처럼 대우 사태는 다 지난 일이니 모든 회한은 가슴에 묻어둬야 하지 않겠나. 구속 수감 이후 건강이 많이 나빠졌다. 그래서 출소 이후 주변에서 더운 나라에 가서 쉬면 건강이 빨리 회복될 수 있다고 해 베트남에 간 거다. 그때 ‘앞으로 뭐할까’라고 생각하다가 떠오른 게 ‘젊은 대학생들을 키워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으로 보내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많이 안정돼 어떤 회사는 1년에 20명씩 보내 달라고 한다. 10년이 지나면 이들이 분명 큰일을 만들 거다. 10년 안에 3000명을 현지로 보내면 이들이 거대한 네트워크가 될 거라 확신한다. 그중에서 ‘제2의 김우중’이 나오지 말란 법이 있나.

 

 

글로벌YBM(Young Business Manager·청년사업가) 사업을 하는 걸 보면, 김 회장께서는 국내 벤처사업가로는 최고령이다. 그만큼 김 회장께서 우리 사회에 남긴 유산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예전에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를 쓸 때도 나는 청년들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지금도 청년들이 잘돼야 우리 사회의 미래가 있다는 것만큼은 확신한다. 처음 40명으로 시작한 글로벌YBM이 190명으로까지 늘어나기까지가 쉽지만은 않았다. 사람을 교육시킨다는 게 참 어렵더라.

 

 

요즘 젊은 층에서 ‘헬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그만큼 이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이 큰 것 아니겠는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 사업도 해 보고 여러 가지 일을 해 봤지만, 우리나라 사람처럼 우수한 인재가 많은 나라를 보지 못했다. 지금이야 혼란스럽지만, 그렇다고 크게 잘못되는 일은 없을 거다. 새롭게 뭉치면 잘될 거다. 올바른 지도자만 나오면 된다. 가는 과정에서 잘못되는 것은 있지만 그건 과정에서 겪는 일일 뿐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자신감을 가지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한다. 기성세대에게는 젊은 사람들에게 많은 기회를 주라고 말하고 싶다.

 

 

만약 50년 전 창업 시기로 되돌아간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한 번도 돈을 벌기 위해 사업한 적이 없다. 자기 돈이 얼마나 있는지 계산할 때, 기업인으로서 한계에 다다랐다고 보면 틀림없다. 나는 한 번도 돈이 얼마나 있는지 생각하지 않았고, 그걸 내 돈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어떻게든 회사 경영을 잘하려고 했지 돈을 벌려고 하지 않았다. 사람을 잘 키우면 모든 것이 잘될 거라고 생각했다.

 

1990년 2월7일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대우 국민차 ‘티코’에 올라타고 있다. © 시사저널 포토

대우는 참 특이한 기업이다. 대우 말고도 해체된 대기업이 많은데 여전히 대우 사람들은 잘 뭉친다. 가족이라는 개념을 만든 것도 대우가 처음이라고 알고 있다. 이러한 대우정신은 어디에서 나오는 건가.

 

대우가족이라는 개념은 ‘같이 노력하자’는 의미다. 돈을 벌기보다 일을 벌이며 얻는 성취감이 중요하다고 봤다. 해외 주재 근무가 많다 보니 직원 가족 간 교류도 많았다. 그런 것들이 쌓여 ‘대우가족’이라는 개념이 생기지 않았나 싶다. 2014년 10월 거제 시민들의 초청을 받아 거제도를 갔다. 시민들이 참 반갑게 맞아주더라. 과거 내가 대우중공업 문제 때문에 1년을 거기서 숙식하며 보낸 적이 있다. 노조원들과 함께 식사하면서 시간을 보내니 자연스럽게 ‘가족’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일본의 경우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마쓰시타정경숙’,, 이나모리 가즈오가 ‘세이와주쿠’ 같은 지도자 양성 기관을 세웠다. 일본 재계 지도자들은 나라를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하는 반면 우리나라는 이런 사례가 많지 않다. 지도자 양성 기관을 만들 생각은 없나.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게 그런 거다. 대학 졸업 후 10년간 그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면 회사에서 분명 훌륭한 인재가 될 거다. 기업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한눈에 보일 거다. 나는 내가 잘 아는 비즈니스 분야, 다시 말해 좋은 기업가를 만드는 일에 여생을 보내고 싶다. 모르는 분야보다는 잘 아는 분야에서 인재를 키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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