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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청년단을 통해 본 한국 극우주의 역사

1947년은 암살과 테러가 횡행했다. 여운형과 장덕수, 해방정국을 이끌었던 두 명의 굵직한 인사 둘이 암살됐고, 무수한 암살 모의들과 테러가 급증했다. 그 전 해에 미군정이 실시한 남한지역 이념성향조사에 의하면 77%가 좌편향이었다.(여기에는 중도좌파 세력인 건국준비위원회 세력이 다수를 점했다.) 그런데 1948년 남한단독정부가 탄생했고, 대통령은 극우인사인 이승만이었다. 이러한 극적 전환을 설명하는 해석 중의 하나는, 이 두 해 사이에 낀 1947년에 ‘테러와 암살의 급증’이다. 한데 미군 자료에서 테러집단으로 가장 많이 거론된 집단이 바로 ‘서북청년단’이다. 이 단체는 1946년 말에 결성됐다. 이들의 지도부는 평안도 출신의 월남(老挝)한 개신교 신자들이 주류를 이뤘고, 구성원의 다수가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 개신교도, 특히 근본주의 성향의 장로교도였다. 북한지역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심한 정치보복을 당한 끝에 월남했지만,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증오보다는 막막한 생존 현실이었다. 그런 그들을 ‘누군가’가 테러와 암살에 ‘동원․고용’했고 그 과정에서 그들은 증오의 화신이 돼 갔다. 그래서 서북청년단은 이 시기에 벌어진 20~40만명에 달하는 대중의 학살에 가담한 가장 잔혹한 테러리스트라는 역사의 오명을 쓰게 됐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남한 전체는 모두가 서로를 증오하는 적개심의 화신이 돼 갔다. 이른바 증오의 프레임이 지배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서북청년단 재건위원회 회원들이 2014년 서울 중구 서울청소년수련관에서 재건 총회를 여는 과정에서 수련관 관계자와 몸싸움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평안도 출신 월남자들이 모인 영락교회는 서북청년단의 가장 중요한 근거지였다. 담임목사 한경직이 “우리 교회 청년부가 중심이 돼 조직했시오”라고 말했던 것처럼. 안타까운 것은 해방정국의 극우화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테러와 암살’을 통해 가능했고 이를 주도한 이들의 명분이 ‘그리스도의 이름’이었다는 데 있다. 구성원과 활동에서 서북청년단의 쌍둥이 같은 단체가 서북학생총연맹이다. 월남한 청년들 다수가 북한지역의 학력을 인정받아 대대적으로 편입학 했는데, 이때 학력인정서 발급 단체가 서북청년단이었다. 아무리 혼란기라 하더라도 테러단체에게 학력인정서 발급 권한이 부여된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아무튼 월남한 이가 남한에서 학교에 들어가려면 서북학생총연맹에 속해야 했다. 문제는 이 단체 결성의 이유가 남한의 학교가 좌익으로 들끓고 있으니 그들을 소탕하기 위함이었다는 데 있다. 학계의 거대한 인맥 형성의 고리로 이 단체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이는 남한사회의 극우지식인을 형성하는 하나의 중요한 장치가 된다. 여기서 하나 더 언급할 것은 서북계 장로교 계열의 지식인들의 모교단인 미국북장로회를 통해 한반도 전체에서 가장 많은 미국유학생을 양산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학위를 받고 귀국해서 대학과 같은 안정된 일자리를 구할 때에도 극우적 서북인맥 네트워크가 매우 요긴했다. 즉, 무엇을 공부했든 어떤 사상을 지향했든 그들이 남한에서 살아가는 가장 효과적인 생존방식은 극우지식인이 되는 것이었다. 특히 박정희 정권에서 극우성향 서북계 인사들이 정치엘리트로 대대적으로 편입됐고, 노태우 정권에서도 서북계 인맥의 중요성이 두드러졌다. 극우적인 서북계 파워엘리트에 관해 간과할 수 없는 것이 군부와 정보부에 관한 것이다. 이들은 월남할 당시 미국북장로회 선교사들과의 접촉으로 인해 영어를 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조선인이었다. 게다가 맹렬 반공주의자들이었다. 해방정국에서 이들에게 주어진 일자리는 미군정 통역관이거나 미군 정부국의 요원으로 활동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군 정보국 요원으로 활동한 이들의 다수가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학해 장교가 됐다. 5기와 8기에 입학한 이들이 특히 많았다. 8기는 무려 70% 이상이 서북계였는데 그들 중 미군 정보국에서 훈련받았던 경력자들은 한국군 정보부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5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교관이던 시절에 그의 지도를 받았던 자들로 5․16군사 쿠데타를 지지했다. 8기는 명실공히 쿠데타의 핵심세력이다. 박정희 정권에서 이들의 역할은 지대했고, 중앙정보부를 설계하고 만들어낸 장본인도 바로 이들이다. 
1947년 3.1 시위 및 총파업 당시 투입된 미군정과 경찰, 서북청년단원들의 모습을 연출하는 모습. ⓒ 연합뉴스

마지막으로 개신교계도 서북 인맥이 극우화를 주도했다. 한경직을 중심으로 하는 서북계 교회지도자들은 서북청년단의 강력한 후원세력이었다. 그가 한국개신교의 절대 1인이던 1950년대 남한 개신교는 전반적으로 극우적 장로교의 닮은꼴로 변신했다. ‘전 교단의 장로교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한편 1989년 창립한 한국기독교총연맹은 민주화시대에 한국사회의 극우화 담론을 이끌었고 그런 활동단체들을 후원하는 시스템의 중심 역할을 했다. 이 단체도 서북계 인사들에 의해 창립됐다. 이들이 사실상 은퇴한 뒤인 1990년대 중반 이후 이 단체는 인물로는 ‘탈서북화’됐지만 이념적 정체성에서는 서북계 특유의 극우주의를 그대로 계승했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서북청년회는 단순한 이민자 집단이 아니라 해방정국의 가장 중요한 활동가 세력의 하나로 남한을 극우사회로 이끈 장본인이다. 그 과정에서 그들 또한 성공가도를 달렸다. 해방정국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줄곧 한국사회의 가장 핵심적 파워엘리트 인맥의 하나였고 가장 강성의 극우주의 세력을 대표했다. 물론 서북계 출신 인사들이 모두 극우주의자들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파워엘리트로 진입하는 데 ‘서북계-극우주의’라는 지방색과 이념색이 결합된 코드는 매우 효과적인 스펙으로 작용했다. 공교롭게도 박근혜 정권에서 서북청년단의 부활을 주장하는 단체가 생겼고, 서북계 극우주의를 맹종하는 극우집단들의 활동이 부쩍 활발해졌다. 아마도 이명박 정권 시절 권력연합에 참여한 일단의 극우개신교 세력이 그 중심에 있는 것 같다. 지금 그들은 우리사회에서 낡은 테러의 악몽을 상기시키고 있다. 또한 불법적인 선거활동, 반인권적 행태들로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다. 이것은 우리사회를 증오의 프레임으로 만들려는 무의식적 기획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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