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님’에서 ‘피의자’로 전락한 박근혜의 ‘거짓말’
1974년 8월9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하야했다. 미국 최대의 정치 스캔들이었던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진 지 2년이 넘은 시점이었다. 탄핵 직전까지 몰린 닉슨은 결국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길을 택했다.
닉슨이 물러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워터게이트 사건’ 자체가 아니었다. 인정을 하지 않고 거짓 해명을 일삼은 닉슨의 태도였다. 1973년 7월13일 미국 상원 청문회에 출석한 알렉산더 버터필드 부보좌관이 “닉슨은 1971년부터 집무실에서 이뤄진 모든 대화를 비밀장치를 통해 녹음했으며, 워터게이트 사건의 은폐 공작에 관여한 내용도 녹음돼 있다”고 폭로했다. 특별검사와 상원 특별위원회가 녹음테이프를 증거로 제출하라고 백악관에 요구하자 닉슨은 내용이 일부 삭제된 테이프를 공개하며 “비서의 실수로 훼손됐다”고 거짓말하고, 특별검사를 해임하기까지 했다. 결국 1974년 7월24일 미국 대법원의 판결로 테이프 원본이 공개됐다.
이 테이프에서 닉슨이 적극적으로 사건 은폐에 나선 사실이 확인되면서 미국인들의 분노가 끓어올랐다. 거짓말을 한 닉슨에게 남은 카드는 하야뿐이었다.
2016년 대한민국에서도 초대형 게이트가 터졌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로 불리는 이 사건에 현직 대통령인 박근혜 대통령이 연루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됐다. 매주 광화문과 청와대 인근에서 대규모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으며, 4%까지 떨어진 역대 최저 지지율은 한 자릿수에서 좀처럼 오르지 않고 있다.
현재 이 사건은 박영수 특별검사가 임명되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다. 대통령에 대한 조사뿐만 아니라 제3자 뇌물죄, 직권남용, 직무유기 등 수많은 혐의들에 대한 강력한 수사가 예고된 상황이다. 박 특검은 임명 직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국민적 관심이 워낙 집중된 사건이다. 성역 없이 수사할 것”이라는 의지를 보였다. 국회에서도 탄핵이냐 4월 퇴진이냐를 놓고 여야 간 신경전이 한창이다.
하지만 이 사건의 본질은 법적,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는 지적이 많다. 한 검찰 관계자는 “세 번에 걸친 대국민담화에서 나온 거짓말 때문에 국민 여론이 폭발한 것 아닌가. 이번 게이트가 과거 정권에서 발생한 비리 사건보다 파장이 큰 이유는 대통령 본인이 했던 여러 거짓말로 인해 민심이 완전히 등을 돌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법적인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전혀 반성하지 않고 사태를 축소하는 데만 급급한 모습이 여론을 악화시켰다는 분석이다. 시사저널은 박 대통령이 1998년 정계에 입문한 이후부터 했던 발언 중 ‘거짓말’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는 발언들을 찾아봤다. 박 대통령을 둘러싼 의혹과 각종 정책에 관련된 발언들이 주를 이룬다.
■ 정계입문 전부터 국회의원 시절까지의 거짓말
박 대통령을 줄곧 따라다닌 의혹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최태민 목사와의 인연이다. 박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시작된 인연은 당시 중앙정보부의 조사로까지 이어졌다. 동아일보 주말판인 동아마당은 1990년 11월23일자에서 “구국여성봉사단 총재로 있던 최씨의 비리에 대한 중앙정보부 조사보고서를 받아든 박정희 대통령은 보고서 내용에 격분, 김재규 중정부장과 백광현 중앙정보부 안전국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근혜양과 최씨를 직접 불러 ‘신문’을 했으나 근혜양이 ‘사실과 다르다’며 최씨를 적극 옹호했다”고 보도했다. 항간에는 최 목사가 ‘현몽’을 꿨다며 박 대통령에게 접근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동아마당의 보도가 나온 시점에 박 대통령은 육영재단 이사장직을 맡고 있었으며 동생인 박근령·박지만씨와는 육영재단과 어린이회관 운영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었다. 박근령·박지만씨는 어린이회관과 육영재단 운영에 최 목사가 개입해 전횡을 일삼고 있다고 지적했다.
당시 박 대통령은 문제가 커지자 이사장직을 사임했다. 그는 1990년 11월8일 육영재단 이사장직 사퇴 기자회견에서 최 목사의 운영 관여 여부를 묻는 질문에 “내가 누구로부터 조종받는다는 말은 내 인격에 대한 모독”이라고 반박했다.
박 대통령과 최 목사에 대한 의혹이 본격적으로 다뤄지는 시점은 박 대통령이 2007년 대선에 출마했을 때다. 당시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 나섰던 박 대통령은 상대인 이명박 후보와 치열한 네거티브 공방전을 벌였다. 당시 이명박 캠프에서는 박 대통령에 대한 각종 의혹들을 집중적으로 조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 목사와의 의혹도 당연히 포함돼 있었다.
2007년 7월19일 열린 한나라당 후보 검증 청문회에서 박 대통령은 최 목사와의 의혹에 대한 여러 질문을 받았다. 그는 박정희 정권 당시 중앙정보부가 최 목사의 비리를 조사한 것을 아느냐는 질문에 “중정이 조사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답이 별로 확실한 것이 없었고, 실체가 없는 이야기로 끝났다”고 답했다. 또 당시 최 목사가 만든 구국선교단의 명예총재를 맡은 것에 대해서도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이겠다고 생각해서 한 일”이라고 밝혔다. 최 목사에 대해서는 알지만 그가 주변에서 어떤 일을 벌이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는 의미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을 9년 넘게 보좌했던 김정렴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증언은 다르다. 그가 1997년 쓴 《아, 박정희》라는 비망록에는 당시 영애였던 박 대통령이 구국선교단의 일에 직접 움직였다는 일화가 등장한다.
‘육 여사 서거 후 큰따님 근혜씨가 충효사상 선양운동을 시작했는데 이때 최모라는 목사가 구국선교단을 조직해서 가세하였다. 하루는 큰따님으로부터 구국선교단을 지원하고 있는 어느 건설회사와 섬유공업회사의 현안문제를 해결해 주었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2004년 김 전 실장을 직접 만난 고상만 전 의문사진상규명위 조사관은 “김 전 실장이 자신의 책에 완곡한 표현을 넣은 것”이라고 말했다. 고 전 조사관은 “김 전 실장을 직접 만난 자리에서 ‘당시 박근혜 영애가 직접 나를 찾아와 기업체 세 개의 이름을 주면서 기업들의 민원을 해결해 달라고 했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퍼스트레이디였던 박 대통령이 구국선교단의 자금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섰고, 그만큼 두 사람의 관계가 밀접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2007년 경선 청문회에서는 육영재단 운영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도 다뤘다. 이때에는 최 목사뿐만 아니라 최 목사의 딸인 최순실씨에 대한 질문도 나온다. 박 대통령은 당시에도 최순실씨와의 연관성을 묻는 질문에 강하게 부인했다.
문: “최순실씨 관련해서, 이사장 시절 최순실이 운영하던 단체가 어린이회관과 자매결연을 맺었다는데. 어린이회관 운영에 영향을 미쳤나?”
답: “자매결연을 맺을 수는 있다. 같은 어린이 교육이기 때문에. 다른 곳과도 맺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문: “운영에 영향력을 미친 건 아닌가?”
답: “자매결연을 맺었다고 해 운영 관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연으로 끝나는 거다.”
문: “87년 농성 발단이 최순실씨가 《꿈나라》 잡지 편집에 최순실 연구팀이 협조하는 과정에서 본인의 의사를 지나치게 반영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는데?”
답: “자매결연을 맺었으니 협조를 할 수도 있다. 일일이 보고받지는 않는다. 협조해서 잡지를 잘 만드느냐 말을 나눌 수도 있다. 최순실이 이렇게 만들라 저렇게 하라 할 수는 없다.”
문: “최순실씨가 잡지 관여 하게끔 지시했나?”
답: “아니다.”
■ 2012년 대선후보 박근혜의 거짓말
2007년 대선후보 경선에서 패배한 후, 박 대통령은 2012년 18대 대선에 출마한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문재인 민주당 후보와의 양자 대결로 치러진 선거에서 승리하며 당선에 성공했다.
대선 과정에서의 가장 큰 위기는 박 대통령의 ‘역사인식’ 문제였다. 2012년 9월10일 당시 박근혜 후보는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한 자리에서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에 대해서 혹시 사과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느냐. 그 부분에 대해서도 또 어떤 앞으로의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겠느냐”고 답한 바 있다. 이 발언이 알려지자마자 지지율이 하락하고, 각계의 비난이 이어졌다. 결국 박 대통령은 2012년 9월24일 기자회견을 열고 “5·16,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 발전을 지연시킨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이로 인해 상처와 피해를 입은 분들과 그 가족들에게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인혁당 사건 유족들은 “지지율이 떨어지니 내놓은 거짓말”이라며 진정성 없는 사과로 받아들였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강탈했다는 의혹이 있는 정수장학회에 대한 발언도 있었다. 본래 부산의 기업인인 김지태씨가 만든 부일장학회였으나 박정희 대통령 시절 정수장학회로 바뀌며 국가로 넘어왔다. 박 대통령은 1995년부터 2005년까지 이사장을 역임했다. 그는 2012년 7월10일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에서 대선 출정식을 한 후 마련한 기자회견에서 “정수장학회는 노무현 정부 시절에 노 전 대통령이 바로잡아야 한다고 정권 5년 내내 모든 힘을 기울인 일이다. 만약 거기(정수장학회)에 잘못이 있거나, 안 되는 일이 있다고 하면 이미 그 정권에서 해결이 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국정운영백서에 등록된 ‘참여정부 5년의 기록’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수장학회를 ‘장물(贓物)’로 규정했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나는 정수장학재단을 장물이라고 생각한다. 그거 돌려주는 것이 우리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고 역사를 바로잡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대통령이 되고 그걸 어떻게 돌려줄 방법을 백방으로 모색해 봤는데 합법적인 방법이 없었다”고 털어놨다.
박 대통령은 대선 준비 과정에서 친인척 및 측근 비리에 대해 “절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는 대선 출정식에서 “전 어떤 경우든지 (대통령) 이름 팔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거짓말이라고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 대통령 박근혜의 거짓말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고 난 이후에는 주로 공약과 관련한 논란이 많았다. 박 대통령은 대통령선거 기간 동안 “반값등록금을 실현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취임 직후부터 반값등록금은 실현할 수 없는 공약이라는 목소리가 여당에서부터 나왔다. 이 공약은 현재도 성패 여부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대학생과 참여연대 등으로 구성된 반값등록금국민본부는 올해 2월16일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학교육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2014년 2학기 기준으로 국가장학금 혜택을 받는 비율은 41.7%에 불과했다. 학생 전체의 절반도 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정부의 ‘반값등록금 완성’ 주장은 우스운 수준”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정부는 “정부 재원과 대학 자체 노력으로 소득연계형 반값등록금은 완성됐다”고 반박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또 취임 전 가계부채 부담을 줄이겠다는 공약도 내걸었다. 하지만 2012년 963조8000억원이던 가계부채 총액이 2015년 1207조원으로 3년 만에 243조2000억원 늘었다. 올해 3분기 말 가계부채 총액은 1295조8000억원으로, 사실상 올해 1300조원이 넘을 것으로 확실시되고 있다. 4년 만에 300조원 이상 늘어난 셈이다. 임기 5년 동안 김대중 정권 207조원, 노무현 정권 214조원, 이명박 정권 278조원의 가계부채가 늘어났는데, 박근혜 정권에서는 3년여 만에 이를 뛰어넘었다.
이외에도 경제민주화 공약과 지역균형발전, 대탕평 인사 등의 공약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거나 추진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많다. 대선 당시 박근혜 선대본에 몸담았던 김종인 민주당 의원은 “현 정권의 경제민주화 공약은 평가할 수조차 없다”고 말했다. 대탕평 인사 역시 제대로 지켜지지 못했다는 지적이 대다수다. 사정기관의 한 관계자는 “현 정권에서는 TK(대구·경북) 출신이어야 고위직을 약속받을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청와대에 가려면 TK 출신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는 말도 나온다.
© 시사저널 박은숙
■ 피의자 박근혜의 거짓말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가 불거진 후, 검찰은 수사 과정에서 사실상 박 대통령을 피의자로 규정했다. 특히 최순실씨와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정호성 전 부속비서관 등과 공모해 기업이 미르·K스포츠 재단에 돈을 내도록 압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세월호 7시간 의혹, 공무상 기밀 누설 의혹 등이 박 대통령을 향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태블릿 PC를 통해 최씨에게 연설문과 각종 자료를 미리 건넸다는 의혹이 보도된 다음 날인 10월25일 대국민담화를 통해 “일부 연설문이나 홍보물의 표현 등에서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정 전 비서관이 박 대통령의 지시로 2013년 1월부터 올해 4월까지 180건의 문건을 최씨에 유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중에는 사전에 일반에 공개돼선 안 되는 47건의 공무상 비밀도 포함돼 있었다.
또 박 대통령은 2차와 3차 대국민담화를 통해 “최씨의 이권 개입 사실을 몰랐으며, 단 한 번도 사익을 추구한 적이 없다. 불찰은 주변을 관리하지 못한 것뿐”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검찰수사 내용은 다르다. 박 대통령은 최씨의 딸인 정유라씨의 초등학교 친구 부모의 회사까지 챙길 것을 안 전 수석에게 지시했으며, 재단 출연금 역시 기업들의 자발적 출연이 아닌 청와대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강제적 모금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궁지에 몰린 박 대통령은 대국민담화를 통해 “검찰수사에 성실히 임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변호인으로 유영하 변호사를 선임한 직후부터 태도를 바꿨다. 유 변호사는 “검찰수사 중 어느 것 하나 인정할 수 없으며, 검찰의 조사 협조 요청에 일절 응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결국 검찰의 두 차례에 걸친 대면조사 시도는 이뤄지지 못했으며, 특검에서 대통령을 조사하게 됐다. 또 박 대통령은 11월8일 정세균 국회의장과의 회동에서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총리를 추천해 주신다면 그분을 임명해서 내각을 통할하겠다”고 말했으나, 11월21일에는 “상황이 변화했다. 좀 지켜보자”며 국회 추천 총리 수용안을 철회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결국 ‘피의자’ 신분인 박 대통령이 국회나 검찰의 요구를 들은 것은 하나도 없는 셈이 됐다. 박 대통령은 11월29일 3차 대국민담화에서 “단 한 번도 사익을 추구한 적이 없다”며 여전히 자신은 죄가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박 대통령은 또 “국회에서 진퇴 문제를 결정해 달라”며 거취 문제를 국회에 넘겼다. 야당은 12월9일 박 대통령의 탄핵 표결을 추진한다는 입장이며, 여당은 ‘4월말 퇴진·6월 대선’ 카드를 내놓은 상태다. 한 여당 비박계 중진의원실 관계자는 “본인의 일생 동안 스스로 결정한 일이 하나라도 있는지 의문스럽다. 정치 인생 자체가 모두 ‘허구’로 꾸며진 것 아닌가 하는 실망감이 크다”고 털어놨다.
이번 사태의 원인이 박 대통령의 ‘무능’에 있고, 이제 어느 것 하나 믿을 수 없게 됐다는 의미다. 또한 공직자 그것도 최고위 공직자로서 국민에게 거짓말했다는 것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한 비박계 초선의원은 “박 대통령이 2008년 공천 학살 당시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고 말했는데, 이제 그 말을 대통령에게 해 주고 싶다. 화려한 겉모습에 속은 느낌”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