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구·학문에서 우리가 결코 일본에 상대가 될 수 없는 이유

주요 학문 분야에서 일본은 가히 세계 최강의 반열에 올라와 있다. 학계 전문가 외에 일반인들도 알고 있듯이 일본은 기초과학 분야에서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연구 위상을 자랑하고 있으며 그 이외 공학, 심지어 사회과학에서조차 일본은 각 분야의 선두에 위치해 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면 연일 언론을 통해 진부한 레퍼토리처럼 퍼지는 내용은 ‘우리나라에는 창의성 교육이 부실하다’, ‘토론과 유연한 수업 분위기 자체가 결여되어 있다’에 초점이 모아져 있다. 그러면 우리나라 못지않게 주입식 교육과 철저한 도제식 교육을 진행하는 일본이 노벨상을 수상하면 우리나라는 왜 노벨상을 타지 못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이유가 궁색해진다. 올해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로 오스미 요시노리 일본 도쿄공업대 명예교수가 선정되면서 다시 한번 일본은 연구 역량의 위상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 연구 또는 학문에서 가장 뿌리라고 말할 수 있는 기초과학 분야에서 일본은 이미 22명의 수상자를 배출하는 저력을 우리에게 보여줬다. 여전히 세계적인 학문 반열에 오르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겐 연거푸 한숨을 내쉬게 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올해 6월 세계적인 학술지 《네이처》에서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R&D)투자 비중은 대한민국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데도 불구하고 왜 유독 세계적인 석학 또는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는지에 대해 공개적인 의문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우리나라는 학계에서 얼굴을 들기조차 힘든 부끄러운 지경이다. 
지난 10월3일 일본의 오스미 오시노리 교수가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 연합뉴스

 수많은 언론은 이미 ‘기초과학을 육성해야 한다’, ‘거시적인 과학적 리더십을 세워야 한다’, ‘중장기적 연구에 더 많은 지원을 쏟아부어야 한다’ 등 한마디씩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타당한 내용이지만 매번 일본이 노벨상을 수상할 때마다 나오는 동일한 조언이기에 독자들에게 그리고 학문 분야에 있는 연구자들에게 신선한 조언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더 나아가 기초과학을 외면하고 돈 되는 분야인 경영학·법학·의학 분야로만 진학하는 젊은이들의 진로를 심각하게 비판하는 조언 역시 정확히 핵심을 꿰뚫는 비판은 아니다. 노벨상을 떠나서 우리나라가 일본을 따라잡지 못하는 이유는 외부적인 환경 요소, 그리고 국내에 독특하게 퍼진 서구 중심의 교육에 대한 일방적인 사대주의 등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중장기적인 연구를 진행하지 못하는 데 대한 원인을 전적으로 학자들만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강조되는 키워드 또는 정책 방향이 이전 정부와 완벽히 다르기 때문이다. MB 정부 때 가장 강조했던 키워드는 녹색성장과 공정사회 구현이었다. 녹색성장과 공정사회 구현을 강조하면서 관련 분야에 대한 연구비 지원이 대폭 늘어났고 심지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해당 분야 아이디어·논문 공모전 등의 소규모 대회까지 증가하며 관련 분야 연구를 정부는 독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창조경제와 창의성·상상력을 강조하며 녹색성장 또는 신재생 에너지, 공정사회 구현을 연구하는 풍토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정부 차원의 지원과 관심 자체가 창조경제에 포커스를 맞추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학생들을 대상으로 했던 관련 분야 공모전 등도 새 정부가 원하는 키워드로 급격히 교체된다. 국내에서 지원되는 정부 연구비는 무려 19조원에 달한다. 이 중 90%가 넘는 연구비가 새 정부가 강조하는 관련 분야에 집중되니 일본처럼 장기간 연구하고 비인기 분야에 대한 장기적 자원을 투자할 수 있는 학문적 여건은 애초에 형성되기 어렵다. 단적인 예를 들어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립으로 인공지능이 관심을 끌면서 국내에서 기초학문 또는 기초연구에 관한 지원 대신에 한국형 인공지능 계획을 수립하고 각계 정부 부처 및 국책 연구소에서 알파고 관련 정책 보고서를 내놓는 경우가 이런 사례에 해당된다. 이러니 노벨상은커녕 학계에 소중한 발자취를 그릴 수 있는 독자적인 분야에 관한 연구를 한다는 건 국내에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또 다른 외부적 요소로는 국내 연구비 지원 시스템의 병폐를 들 수 있다. 정부 차원에서 다른 국가를 모방하거나 추격하는 것이 아니라 선도할 수 있는 창의적 연구를 창출하라고 강조하면서도 연구개발에 대한 국내 지원은 언제나 해당 연구가 성공적으로 종료되었느냐에만 맞춰져 있다. 그렇다 보니 상대적으로 불확실성이 큰 분야, 연구를 진행해도 명확히 해답을 도출하기 어려운 중장기 연구 분야에는 학자들이 과감히 뛰어들기 어렵다. 국내에서 국민들의 세금으로 지원되는 막대한 연구비를 통해 도출되는 논문 및 관련 특허 등 연구개발 성공률은 무려 98%에 달한다. 성공률이 98%에 이른다는 점은 학자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연구를 마무리했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달리 보면 안정적이고 확실하게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보다 쉬운 연구에 학자들이 안주했다고도 볼 수 있다. 연구 과정 전반에 대한 체계적인 점검으로 국내 연구 지원 제도와 정책이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전환되어야 새로운 연구 분야, 불확실성이 큰 분야에 도전할 수 있다. 물론 노벨상 또는 연구성과가 미국·유럽은 둘째 치고 일본에도 밀리는 이유는 대학 또는 학자들의 탓도 있다. 국내 대학이 외부 언론사의 대학 평가 또는 글로벌화에 치중하면서 현재 국내 대학의 학문적 위상은 완벽히 서구적인 방식으로 전환된 것도 아니고 일본식 가이젠(끊임없는 노력과 개선) 관점의 연구를 지향하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의 국내 선도 대학이 영어 강의, 외국인 학생 비율을 강조하면서 여전히 수업은 교수의 일방적인 강의, 학생과의 자유로운 토론과 논의 과정이 생략된 주입식 교육에 머물러 있다. 미국 아이비 리그 및 유럽의 일류 대학들이 추진하는 자유 토론과 개방적인 논의 속에 발생하는 창의성 교육과 비교할 때 국내 대학이 가야 할 길은 여전히 멀다. 해외 유수의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는 것을 최우선 사명으로 삼다 보니 국내 대학이 교육기관이 아니라 학술지 게재 연구기관으로 단순 전락하고 있는 점도 아쉽다. 대학이 이렇다 보니 산업계 또는 현장에 혁명적인 결과를 제안할 수 있는 연구가 나오는 것은 무망하다. 일본이 무서운 이유는 글로벌화에 휩쓸려 서구 대학의 표준을 따라가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지독하게 연구에 대해 끈기를 갖고 집착해서 주요 학문마다 새로운 이정표를 만든다는 점이다. 세계 유수의 기관에서 발표하는 글로벌 대학 랭킹에 이미 일본의 도쿄대·교토대는 중국의 명문대 그리고 심지어 국내 명문대에도 뒤처져 있다. 국내 상당수 대학이 여전히 박사학위를 ‘미국에서 받았느냐’를 강조하는데 비해 일본 최고의 대학인 도쿄대는 교수의 70%가 일본에서 박사를 받은 학자들로 구성돼 있다. 특히, 일본 주요 명문 대학의 교수들 중 미국에서 박사를 받은 비율은 5%가 되지 않는다. 글로벌화, 영어 중심의 교육에서 뒤처져 있어 갈라파고스에 갇혀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요 학문에서 최고의 성과를 내는 일본은 단기 연구보다 중장기 연구를 선호하고 교육에 있어서도 수박 겉핥기식 글로벌 지향이 아닌 완벽한 논의와 이해를 통한 콘텐츠의 내재화를 강조한다. 자국 대학의 글로벌 랭킹을 걱정하지 않는 일본 학자들의 도도한 자존심과 연구 풍토가 부럽고 또 한편으로 무서울 따름이다. 언론에서 지향하는 거시적인 학문 리더십의 강화, 중장기 연구 지향 등으로 국내에서 노벨상 또는 세계적 석학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에 가깝다. 해법은 다양한 관점에서 그리고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국내 교육과 연구 풍토를 전면적으로 개혁하는 수밖에 없다. 정부가 바뀌더라도 이전 정부의 중요한 정책 키워드를 계승해서 중장기적인 연구를 독려하고 연구 성과가 아닌 연구 과정에 대한 전반적인 감사를 통해 연구의 양적 결과 창출보다 질적 개선에 더 많은 연구비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아울러 국내 대학 및 학자들도 확실하게 서구의 유연성·창의성과 토론을 강조하는 개방형 교육과 연구로 방향을 잡을 것인지, 아니면 일본처럼 글로벌화를 따라가지 않고 완벽한 지식의 내재화를 통한 새로운 지혜 창출로 방향을 잡을 것인지 확고히 결정해야 한다. 지금 국내 대학 그리고 연구 풍토는 겉멋만 잔뜩 들고 내실은 없는 빈 수레에 가깝다. 일본이 여전히 우리나라를 경계하지 않고 한 수 아래로 내려다보는 이유이다. ​ 
저작권자 © 시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