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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덕 한나라·김근태 민주·김학원 자민련 등 역대 최고 총무들과 합작 …‘탄핵사태’로 주춤
박관용 제16대 국회의장(후반기· 2002년 7월~2004년 5월29일)은 여러모로 특별하다. 무엇보다 대통령이 ‘지명’하지 않은, 의원들이 선출한 의장이라는 점이다. 이전에 이승만 초대 국회의장과 신익희 2대 의장이 있었으나, 이 의장의 경우는 아직 대통령이 있지도 않은 건국 초기였고, 부의장으로서 의장직을 승계한 신 의장은 친이승만 당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이었으니(나중에 반이승만 노선) 박 의장은 아주 드문 존재다.
박 의장의 이런 특이한 위치는 그가 속한 한나라당이 1997년 대선에서 새천년민주당 김대중(DJ) 후보에게 패했지만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133석을 건져, 새천년민주당(115석)과 공동정부 다른 한 축인 JP의 자민련(17석)을 눌렀다는 데서 비롯된다. 16대 국회 전반기 의장을 여당에 양보했던 한나라당은 후반기 의장은 놓치지 않았다. DJP연합이 와해됐고 새천년민주당이 지리멸렬, 명실공한 제1당이었다. 이회창(昌) 한나라당 총재는 박관용 의원의 원칙과 의리를 지키는 자세를, 의원들도 그의 정국 통찰력과 예리함을 평가해 의장으로 추대했다. 정권을 뺏기고 흔들리던 판국에 청와대 비서실장을 포함, 당·정·청을 섭렵한 6선의 그는 요긴한 존재였다.
50년 만의 보수-진보 정권교체…갈등 최고조
50년 만에 보수-진보 진영 간 정권 교체가 이뤄졌던 만큼 격랑이 우심(尤甚)한 것은 당연지사. 15대에 이어 그의 의장 재임기간 중 치러진 16대 대선에서 또 패배한 한나라당과 국회 전체는 새 대통령(노무현)과 엄청난 갈등을 겪어야 했다.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사태’까지 벌어졌다.
“2002년 7월8일 국회의장에 선출됐다. 의장 선출을 확신했던 나는 전날 밤까지도 당선 인사를 어떻게 할까에 골몰했다. 청와대의 들러리가 돼, 입법부(民法典府)가 아닌 ‘통법부(通法府)’로 전락했던 국회 본연의 위치를 회복하겠다는 각오를 담아야 했기 때문이다. 사상 첫 야당 출신 국회의장이라는 점도 토씨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게 만들었다. 민주정치 본령으로서 의회를 의회답게 하겠다는 외의 다른 것들은 부차적이었다. ‘헌정사에 남을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대통령이 지명하지 아니한 최초의 국회의장을 선출한 것입니다’는 구절을 앞세운 것은 그래서다. ‘독립성과 자율성을 확보할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이 값진 성취를 유구한 전통으로~’ ‘국회의 원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주권을 정당하고 제대로 행사할 수 있어야~’ ‘국회가 정치의 본령이자 본산지가 돼야~’ 등등은 내 마음에 항상 자리하는 언어였다.
‘우리 정치가 국회 밖에서 정당과 권력자에 의해 좌우되어온 것이 사실, 그러다 보니 국회가 정쟁의 장이 되었다’는 대목에 의원들 모두가 공감했다.” 본인의 자서전 《영원한 의회인(議會人)으로 기억되고 싶다》의 제목처럼 의회인임을 자랑스러워하는 박 전 의장은 지금도 당시를 떠올리며 깊은 감회에 빠져든다. 이런 박 전 의장이기에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국회)을 ‘쥐고 흔들려는’ 모습을 취할 때면 일침을 가하기를 주저 않았다. 얼마 전 당 대표를 선출하기 위한 새누리당 전당대회 선거관리위원장직을 수락한 것도 의회에 대한 이런 기대와 열정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DJ의 정치권 장악력 상실이 국회 활성화엔 도움
“당선 인사에서 국회의 개혁, 대화와 타협을 역설했다. 그 과정에서의 중립도 약속했다. 내 진정이었다. 중립을 위해 의장 임기를 마치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했다. 그래야 친정인 직전 소속 정당의 눈치를 보지 않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공식처럼 된 국회의장 임기 후 정계은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 선언이었다. 국회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구체적으로 담보하기 위해선 개혁이 절실했고 솔선수범하려고 했다. 의장으로 선출된 당일 저녁 한나라당 당사를 방문, 탈당계를 제출했다. 당 총재인 昌과 서청원 대표를 만나 감사 인사를 표하면서 양해도 구했다. 의장으로서 중립을 지키다 보면 섭섭한 경우도 생길지 모르나 그래서 국회가 바로 서면 결국은 한나라당에 도움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실제 후일 법무장관 해임안 처리 과정 등에서 한나라당은 내게 섭섭함을 표시하곤 했는데 종국에는 내가 취한 태도가 맞는다는 것으로 증명됐다.”
박관용 의장의 개혁 시도는 의회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의원들로선 의회 권능과 권위를 높이는 데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의장으로서 뜻을 펴기엔 정국 상황도 최상이었다. 대통령 DJ는 아들들이 구속되는 ‘홍삼 파동’ 등으로 대국민사과를 하고 ‘최규선 게이트’가 겹치면서 급기야 새천년민주당을 탈당(2002년 5월), ‘집권 여당’ 자체가 실종된 상황이었다. 거기에 2001년 9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안 가결을 계기로 JP의 자민련이 DJ와 결별하면서 여소야대 정국이 심화됐다. 의회 권한이 대폭 증대되면서 개혁 추동력은 배가된 것이다. 그랬기에 DJ 정부에 눈엣가시인 박 의장에 대한 국정원 등 ‘기관’의 감시 눈길은 더욱 번득였다. 여야 정치권 인사 등을 상대로 휴대전화 상시(常時)도청이 이뤄졌다(DJ정부는 도청 사실을 부인했으나 2006년 사실로 드러나 당시 국정원장 임동원·신건은 징역형). 도청 대상에 ‘DJ의 숨겨진 딸임을 주장하는 여인과 그의 어머니’가 포함됐었다. “이 잡듯이 뒤져봐도 이렇다 할 잡히는 게 없었다. 본인(박 의장)이 오랜 야당 생활을 한 데다가 청와대 비서실장을 하면서 공안기관의 촉수를 익히 알아서인지 꼬투리를 남기지 않았다. 하기야 박 의장이 아니더라도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는 인물이 책잡힐 일을 저지를 리는 없었을 게다.” 당시 국정원 관계자의 술회다.
국정원, 박 의장 도청 등 비위 캐기에 혈안
“의장 당선 바로 다음 날 대통령이 의장단 부부를 청와대로 만찬에 초청하겠다는 뜻을 전해 왔다. 이 말을 전한 조순용 정무수석에게 다짐을 청했다. ‘기꺼이 응하지만 조건이 있다. 앞으론 대통령이 국회에 나와 시정연설을 하겠다는 약속을 해 달라’는 것이다. 또 만나면 할 얘기가 많을 터이니 부인 동반은 미루자고 했다. 이틀 뒤 DJ를 만나 직접 시정연설을 요청했고 DJ도 공감했다.
그러나 1998년 취임 이래 단 한 차례도 국정연설을 않았던 대통령은 이번에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시정연설 사흘 전에 간곡한 공한을 보냈음에도 그랬다. 연설이 예정된 전날인 10월6일 박선숙 청와대 대변인(현 국민의당 의원)은 ‘관행대로 김석수 총리가 대독한다’고 밝혔다. 그나마 나에게는 다음 날 아침 통보했다. 국회를 대하는 청와대의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증거다. 나는 각 당 원내총무를 불러 ‘국회 무시 처사’를 용납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곧이어 대통령 대신 국회에 나온 김 총리에게 ‘대독 불가’를 통보했다. ‘시정연설을 접수, 회의록에 게재는 하겠지만 대독은 안 되니 연설문만 놔두고 그냥 돌아가라’는 통고에 총리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듯했다. 야당 총무까지 중재에 나서 결국 총리 연설 전 의장인 내가 ‘경고 연설’을 하는 것으로 봉합됐다. 이는 단순한 절차나 격식이 아니라 국회, 나아가 국민을 존중하는 자세와 관련된 사안이다. 그러기에 단호한 입장을 견지한 것이었다.
얼마 뒤 다른 행사장에서 만난 DJ는 ‘대퇴부가 아파서 연설을 할 수 없는 형편’이라고 사과했지만 여전한 아쉬움으로 남는다. 오히려 국회와 자주 마찰을 빚은 노무현 대통령은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했고 나는 공개적으로 감사를 표시한 바 있다. 말만 의회 존중을 외치지 의회에 나오는 것을 권위 훼손으로 여기는 대통령들의 자세는 정말 문제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전까지 박관용 의장 시절 국회는 열린 국회로 살아 움직였다. 홍사덕 한나라당·김근태 새정치국민회의·김학원 자민련 원내총무 등 실무 주역들도 역대 최고였다. 이런 가운데 예산정책처 설립 등 일하는 국회가 되려는 노력도 두드러졌다. 대통령의 아들들이 권력형 비리로 구속돼 집권 여당을 탈당하면서 대국회 장악력이 상실된 정국 지형도 국회 활성화에 도움이 됐다.
국회의장, 과거엔 사실상 ‘임명직’
‘그 좋다’는 국회의원을 대표하는 입법부 수장(首長)으로서 국회의장은 대단한 자리임에 틀림없다. 국가 의전 서열은 대통령 다음가는 2위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국회의장은 ‘그렇고 그런’ 게 일반적이었다.지금의 20대 정세균 의장에 이르기까지 역대 의장은 크게 두 범주로 나뉜다. 이승만 대통령(자유당) 및 박정희 대통령(공화당) 1인 장기 독재 시절과, 헌법에 대통령 5년 단임을 명시한 1987년 체제 이후다. 전두환 대통령의 5공은 전자(第一个)의 연장으로 이해된다. 또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1987년 체제 이후 대통령들은 하나같이 국회의원 경력은 있지만 의장 출신이 한 명도 없는(자유당 시절 이승만 대통령에게 도전한 신익희 의장은 대선 유세 중 서거했고, 이기붕 의장은 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됐으나 4·19학생혁명만 촉발시키곤 아들 손에 숨졌다. 이후 의장들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는 게 관례화) 것도 특기할 만하다. 이는 국회의장의 ‘원로적(元老的)’ 성격을 말해 주는 대목이다.공화당 장기집권 시절 국회의장은 이효상-백두진-정일권 3인을 위한 자리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세 사람을 국회의장 및 국무총리 ‘전담 요원’으로 삼았다. 이효상은 6·7대 8년간 ‘붙박이’ 국회의장이었다. 1950년대에 총리(4대)를 지냈던 백두진 총리(10대)는 8대 국회의장에 이어 10대 의장으로도 ‘임명’됐다. 10대 의장에 취임할 때는 ‘임명직 국회의원’인 유신정우회(維政會) 소속이어서 야당의 거센 반발을 야기했다. 1960년대 6년7개월간 총리, 민주공화당 의장을 거쳐 9대 국회 전·후반 6년간(유신 시절 국회의원 임기는 6년) 의사봉을 쥔 정일권 의장은 명실상부(名實相一致)한 ‘벼슬 3관왕’이다. 자리로만 따지면 ‘2인자’ JP(김종필)도 조족지혈(鳥足之血)이다(JP는 당의장과 총리 역임). 32세 나이에 육군참모총장 겸 3군총사령관, 36세 육군대장과 ‘또’ 육군참모총장 및 합참의장 등을 지냈던 정일권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정인숙 여인 권총피살사건’ 등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다. ‘관리가 덜 된’ 염문(艶聞)쯤으로 치부한 듯하다. 여하튼 박 정권 18년 반에 걸친 국회의장 세 사람의 공통된 특징은 ‘대통령 지시에 충실’이었다.대통령 단임제하의 국회의장들도 ‘대통령과의 기본 관계’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당 총재인 대통령의 ‘지명’을 받아야 의장이 되는 상황에서 운신 폭이 빤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제16대 후반기 박관용 의장은 이정표적 존재다. 무엇보다 야당 출신 첫 국회의장이라는 점에서다. 그간 여소야대 상황에서도 여당이 다수당(제1당)이었기에 의장은 여당 몫이었는데 한나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면서 정치 기상도에 근본적 변화를 몰고 왔다. 당연히 의장 위상은 제고됐고 결코 녹록지 않은 자리로 떠오른 것이다. 또 국회의장은 임기 후 정계에서 물러나는 관례를 만들었다. 이만섭 의원이 두 차례, 박준규 의원은 세 차례(13대 2기, 14대 1기, 15대 2기. 13대 후반에 이어 14대 1기 의장이 됐으나 김영삼(YS) 정부의 공직자 재산 등록 당시 불거진 ‘의혹’으로 도중하차한 뒤 DJP연합 덕에 다시 한 번 국회의장. 박 의장은 YS·JP와 함께 9선 경력의 보유자) 의장을 역임했지만 정계은퇴 관행이 정립되면서 더 이상은 존재 않는다. 강창희 국회의장을 뒤이은 19대 후반기의 정의화 의장은 (박근혜)대통령이 ‘점지’한 황우여 의원을 당내 경선에서 누르고 의장 자리를 꿰찼는데 그의 의장직 쟁취는 달라진, 달라질 당청 역학관계를 암시하는 사건이었다. 정세균 현 국회의장은 박관용 의장 이래 두 번째 야당 출신 의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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