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대쪽’이 대세…당 대표 임명 아니라 ‘임명하게 만들어’
15대 총선이 있던 1996년의 김영삼(YS) 대통령 행보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의 총선 전략은 그런대로 주효했고 국정 장악력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됐다. 하지만 ‘돈과 흑색선전’이 판친 총선 과정과 ‘의원 빼내기’ 등 이후 모습은 ‘문민정부’라는 이름까지 무색하게 할 만큼 흉했다. 이듬해 대선 패배도 1996년의 무리(無理)와 자만(自慢)의 결과일 수 있다.
YS의 눈길은 애당초 ‘이인제’
집권당 총재인 YS가 총선에 올인한 것은 당연하다. YS는 1년 전 지방선거에서 자신과 결별하고 자민련을 이끈 김종필(JP) 총재, 정계은퇴를 했다 복귀한 김대중(DJ) 전 평민당 총재에게 여지없이 패했었다. 또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을 처벌할 수 있도록 한 5·18민주화운동 특별법 추진은 민정계와 TK(대구·경북)의 거센 반발을 초래했다. 때문에 선거 넉 달 전에 당 간판까지 민자당을 신한국당으로 바꿔 달아야 했다. 그래서 ‘새 피 수혈’이라는 명분 아래 현역 의원 42% 물갈이라는 초강수를 뒀는데 이게 먹혀든 것이다. 야당 분열이 결정적 이유였지만 선거 20일 전에 장학로 청와대 부속실장의 37억원 수뢰라는 악재 등을 감안하면 대단한 결과다. 선거 과정의 돈 쏟아 붓기 등 타기(唾棄)할 구악(舊惡) 행태야 어쨌든 결과적으론 선방(善防)했다. YS는 의기양양했다. “내 뭐라캤노.” 언론인 K씨의 “대단합니다”라는 인사에 YS가 내보인 반응이다. 그러나 정치 9단 YS도 이번 총선을 통해 ‘자신감’을 키운 다른 인사가 있다는 사실은 간과했다. 위기를 돌파하는 자신의 ‘뛰어난’ 정치력에 자아도취된 탓인지 모른다. 그 다른 인사란 이회창(昌) 전 총리다. 昌의 정계 입성은 순조로웠다. 신한국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서, 전국구 1번을 달고 치른 총선 성적표가 합격점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상 초유, 여당의 서울 1등’이 새정치국민회의 전국구 14번을 달고 선거를 지휘한 김대중(DJ) 총재를 꺾는 결정적 계기였고, 昌의 대쪽 이미지가 상당부분 기여했다는 평가가 이어져서다. 昌은 이내 주목받는 거물이 됐다. 민주계에 의해 쫓겨나 기댈 곳 막막한 민정계의 지지도 큰 보탬이 됐다. 하지만 이런 상태를 방치할 YS가 아니다. 총선 한 달 뒤 YS는 이홍구 전 총리를 허주(虛舟) 김윤환 후임 당 대표로 임명했다. YS 차남 현철이 미는 이 대표는 유력한 ‘후계자’ 가운데 하나였다. 昌 견제자로서는 제격인 셈이다. YS가 ‘2인자’, 나아가 ‘후계자’를 용납할 리 없다. 하물며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후계자의 조기 등장’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YS가 누구인가. 정치판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고수다. 대권 고지를 밟은 YS에게 남은 과제는 ‘차기’일 것은 당연했다. 취임 초부터 후계구도를 관리했던 YS는 임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여기에 더 집착했다. 레임덕 차단을 위해서도, 퇴임 후 국정 영향력 확보를 위해서도 긴요하니까. 답은 분명했다. 최소한 昌은 아니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것만도 최우선 제척 대상이다.” “YS의 각종 개혁 프로그램을 기안한 게 ‘동숭동 팀’이다. YS가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으로 임명했던 전병민이 주도하는 이 팀은 ‘후계’와 관련, ‘세대교체’를 제시했다. ‘DJ·JP를 포함한 구시대 청산’은 YS 입맛에 딱 맞는 어젠다였다. ‘이인제 서울시장론’도 그 일환이다. YS는 45살 재선 국회의원인 그를 문민정부 초대 노동부 장관에 임명했다. 최연소 장관이다. 그리곤 1995년 첫 민선 경기지사로 만들었다. 노동부 장관 시절 고용보험 도입 등 나름의 업적도 남겼다지만 ‘후계 수업과 경력 관리’를 위해 YS가 공들인 흔적은 역력하다. 그를 서울시장에 내보냈다가 낙선할 경우 입게 될 상처를 우려해 안전한 경기지사로 돌릴 만큼 세심하게 배려했다(전병민은 YS가 민자당 대표가 됐을 때 인연을 맺는다. ‘박철언과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돋보인 기획력으로 YS 눈에 든 그는 YS 대선캠프 ‘최병렬-박관용 전략기획홍보팀’ 핵심으로 활약한다. 하나회 숙청, 공직자 재산등록 등 개혁과제를 입안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정책기획수석에 임명(1993년 2월17일)됐다. 그러나 그의 장인이 독립운동가 고하(古下) 송진우 선생의 암살범이라는 시비가 일자 임명 사흘 만에 사퇴했다. D신문이 거품을 물자 YS는 아예 신설했던 정책기획수석 자리마저 폐지했다. 전씨가 부임하기도 전에 낙마하면서 언론들은 앞다퉈 신임 장관들에 대한 검증에 나섰고 10여 명이 줄줄이 중도하차하는 계기가 됐다. 아무튼 그는 박근혜 대통령 대선캠프에도 기여하는 등 자타가 공인하는 기획통이다).”차남 현철 구속 이후 모든 게 헝클어져
“YS는 임기 3년 차인 1995년 4월 ‘차기 대선에서는 세대교체가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다. 처음으로 후계 구상을 언급한 것이다. 그 이전까지 공보수석실은 ‘대통령이 불편해하신다’며 출입기자들에게 질문 자제를 누누이 당부했었다. 그런데 이번엔 사전 주문을 안 했다. 오히려 YS는 기다렸다는 듯 선선히 구상을 털어놨다. 정국 주도 자신감인지, 국면 전환 노림수인지 ‘후계 논란=레임덕’이라는 그간의 우려는 아랑곳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2개월 뒤의 6·27 지방선거에서 참패하자 ‘임기가 2년5개월이나 남은 시점에서 후계 구도 논의는 바람직하지 않다’며 논의 자체를 차단했다. 하지만 일단 점화된 후계 논의가 꺼질 리 없었다. 가시화(可視化)된 후보군들이 득실거리는 판이라 꺼질 성질이 아니었다. YS가 1996년 총선을 위해 영입한 이회창·이홍구 전 총리, 폭넓은 지지층을 가진 박찬종 등 거물이 뿌리를 내리는 중이었고, 민주계 최형우·김덕룡 의원이 세 규합에 나선 지 오래인 데다, 95년 12월 정부에 둥지를 튼 이수성 총리가 버티고 있으니 잠잠해질 수가 없었다. 그런 마당에 ‘가장 기피하는 이회창 의원’이 ‘차기’로 급부상했으니 청와대로선 속이 탔다. 일단 찬물이라도 끼얹을 필요가 있었다. 그해 10월9일 YS는 일본 경제신문인 니혼게이자이와의 인터뷰에서 ‘국민이 놀랄 만한 세대교체를 실현하겠다’고 말했다. ‘젊은 후보론’을 꺼내든 것이다.昌은 당시 61세. YS가 ‘젊음의 상한선’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으나 50대를 의미하는 것임은 대충 짐작이 갔다. 昌은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이렇게 되면 昌보다 한 살 위인 이홍구 전 총리나 昌과 동갑내기인 최형우 의원도 ‘커트라인’에 걸린다. 1939년생인 박찬종·이수성과 1941년생인 김덕룡 의원 정도가 남는다. 그러나 당시 세몰이 선두는 민주계 좌장인 최 의원이었고, 그래서 많은 이들은 갸웃했다(1997년 3월 YS가 최 의원을 청와대로 불러 ‘대선출마 안 돼’를 통보할 때 제시한 이유가 ‘상도동계’와 ‘나이’였다. 昌을 주저앉힐 명분축적을 위해서도 불가피했던 것. 최 의원이 YS의 결정에 반발하면서 두 사람 간에 고함이 오갔고 때문에 경호원들이 집무실에 뛰어드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YS가 총애하는 최 의원을 배제할 리 없다’는 추론이 강했고, 때문에 ‘昌 제외’ 관측 해석도 제각각이었다.” 당시 청와대나 신한국당 관계자 및 출입기자들의 증언이다.
이들은 ‘고만고만한 잠룡(潛龍)’이 각축을 벌이는 상황에서 YS의 ‘젊은 후보’ 언명까지 나오는 바람에 더욱 헷갈렸다고 회고한다. YS의 ‘이인제 경지지사’에 대한 관심을 짐작은 했으나 ‘점찍은’ 정도임을 간파한 인사는 많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당시 이 지사가 아직은 ‘경량급’으로 간주됐던 게 오판에 적잖이 작용했다는 얘기다.
어쨌든 YS는 이 백가쟁명(千家爭鳴) 형국을 ‘다극화(多極化)를 통한 경쟁 구도-이를 통한 위상 공고화’ 구상이 맞아떨어진 것으로 여긴 듯하다. 그해 12월7일 YS는 CBS 회견에서 “당 대선후보에 대해 당 총재로서 분명한 내 입장을 밝히겠다”고 피력했다. 차기 후보 지명권을 행사하겠다는 의지 과시였다. 그러니 잠룡들은 잡음을 일으키지 말고 처분을 기다리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희망사항일 따름이었다. 1997년 새해 벽두부터 단군 이래 최대의 여신(與信)사기 사건이라는 한보 사태와 여기에 연루된 아들 현철 관련 추문과 구속은 YS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갔다. 아들의 검찰조사라는 상황을 맞닥뜨린, 대국민 사과 담화를 내야 하는 YS는 현직 대통령이었지만 ‘현재 권력’은 아니었다. 권위가 상실된 권력은 더 이상 권력이 못 됐다. 말발이 먹혀들지 않았다. 대선을 9개월여 앞둔 1997년 3월 昌은 당 대표가 됐다. 임명된 게 아니라 ‘임명하도록 시켰다’고 하는 게 적확하다. 경쟁 그룹 내 이홍구 당 대표는 한발 물러섰고, 이수성 총리도 고건에게 자리를 넘겼다. 대통령이 총재로 당을 완전 장악하던 시절의 명목상 대표와는 차원이 다른 ‘대표’가 됐다. 가장 민감한, 결정적 시기에 당을 꿰찼다. 선두 경쟁을 위한 확실한 고지를 마련한 것이다.
총선 善防(선방)과 ‘의원 빼가기’… 無理(무리) 위에 쌓은 자만심이 毒(독)
15대 총선 당시 신한국당은 ‘돈과 흑색선전’으로 융단폭격을 가했다. 흑색선전 자료는 안기부(국정원 전신)가 축적해온 상대방 약점들로서 ‘구전(口傳)홍보’에 활용됐다. 1000억원대라는 자금도 안기부에 비축해뒀던 돈이다(아직도 확실하게 규명되지 않았으나 YS가 재벌 등에게서 받은 당선 축하금으로서, 금융실명제 실시 전 안기부에 맡겨 관리한 자금이라는 게 정설).
이런 것들은 훗날 ‘안풍(安風)’ 재판 때 밝혀졌다. 실제 투입된 자금 규모는 3000억원에서 5000억원 등으로 추계가 엇갈린다. YS는 특히 서울 지역 후보들을 직접 독려하고 자금을 추가 지원하는 등 수도권에 전력을 집중, 개가를 올렸다. 서울 47개 지역 중 27개(DJ의 새정치국민회의는 18개) 석권은 실로 엄청난 성과였다. 이런 유례없는 결과가 선거전 혼탁 논란을 희석시킨 측면도 없지 않다. 거기에 정계은퇴 선언 뒤 재복귀한 DJ의 빈약한 명분도 대여(對與) 공세를 무디게 하는 데 한몫했다.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후일 “부끄러워서 말 못할 정도로 비민주적이고 탈법행위가 있었다”고 고백할 정도였음에도 그랬다.
지지율을 1년 전의 2배인 40%대로 끌어올린 YS의 강공 드라이브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전국구 18석을 포함, 139석을 챙겼던 YS는 과반수(150석) 확보를 위해 ‘의원 빼가기’에 돌입, 157석의 여당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작은 승리’는 YS에게 독(毒)이 됐다. 무엇보다 JP를 영원한 적으로 돌린 것이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던 JP와 DJ가 손을 잡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반(反)YS 공동전선의 터전을 닦아줘 자기 발등을 찍었다. JP는 “총선 8일 뒤 YS와 만나 항의했더니 ‘그들이 오겠다는데 어쩔 수 없다’고 발뺌했다면서, 정치도의를 모르는 뻔뻔스러운 행각이었고 이게 자신과 DJ의 접근을 자연스럽게 만들었다”고 술회했다. 한 달 뒤 두 사람은 ‘신한국당 의원 빼가기 규탄대회’를 공동주최한 데 이어 9월 보궐선거 때는 단일 후보를 내는 것으로 발전한다. 또 과반 의석을 바탕으로 밀어붙인 국회의 연말 노동법 개정안은 진보세력이 결집하는 촉매가 됐다. YS가 정국 주도 자신감에 취해 있을 때 정치·경제·사회 현실은 반대였다. 현철과 철없는 민주계 실세들이 개입한 권력형 비리와 비정(秕政)으로 인한 민심이반이 심각했음에도 YS만 모르는 듯했다. ‘부산 앞바다에 (대선 때 YS를 찍은 자신이 미워 부산 시민 스스로 잘라낸) 손가락이 둥둥 떠다닌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멸치가 흉어(凶漁)여서 멸치 값이 치솟았는데 이것이 YS 부친 때문이라는 황당한 유언비어가 그럴싸하게 유포될 정도였다(청와대 민정비서실이 실제 여부 파악에 나서는 해프닝). 당연히 일반의 반감(反感抵触)은 당·정·청을 통괄하는 YS를 향했고, 나머지 파편은 이홍구 대표가 뒤집어썼다. ‘이회창 의원’은 신한국당에 튼 둥지를 견고히 하면서도 여론의 비난 화살과는 무관하게 되는 행운을 누렸다. YS의 후계구도 계산은 이래저래 크게 빗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