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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고백 상업주의'의 시대, 공중(公衆) 앞에서 떠벌리는 고백류도 있지만, 고백이란 보통 시적 관계망으로 운용된다. 그러므로 대체로 사밀한 목표를 품고 이루어지지만, 그 효과는 더러 공론이나 제도를 바꿀 정도로 강력하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만일 고백의 흔적과 영향이 정녕 그 포즈만큼 심약하다면, 고백이 시체(時體)의 통속과 감상으로 머무른다면, 그리고 어느 의사소통론자의 주장처럼 고백이 대화의 지경에 이르지 못하는 독백일 뿐이라면, 이처럼 정색을 하고 고백을 추단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단언컨대, 고백은 암적이며, 때로 감상의 파시즘, 정서의 자가당착이나 다름없다. 그 동작은 그 동작에 취하고, 그 이빨은 그 꼬리를 씹는다.
고백은 대화 실패에 대한 전근대적 알리바이
우선 고백은 흔히 '봉건적'이다. 그것은 경진(競進)을 통한 자유로운 대화 공동체 구성을 추구하기보다는 말의 위계 질서를 믿는 사이비 형이상학의 산물이다. 고백주의자는 범벅한 일상에서 오가는 여러 종류의 소통과 교환만으로 사귐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여긴다. 불충분할 뿐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관계의 진정성을 보상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들은 백주의 노상이나 식탁, 노동의 현장이나 공중 목욕탕에서는 허투루 말을 뱉거나 듣는다. 그러면서 튼실하고 심오한 말이 따로 있다고 추정해서 살며시 이를 기대하고 기획한다. 실상 이러한 언어위계주의는 곧 그들의 삶이 내적으로 균열되어 허위 의식에 젖어 있다는 사실을 방증할 뿐이다.
특히 구애 과정에서 대화를 제치고 연인의 상상력을 오롷이 전유하려는 고백을 잠시 연상해 보시라. 나는 아무 꺼림 ·가림이 없이 고백을 막시(邈視)하려는 막가파 대화주의자가 아니지만, 특히 남녀의 연애 감정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고백이 순정의 형이상학을 주술처럼 흩뿌리며 정서의 혼란이나 감정의 과잉에 기생한 뒤 마침내 암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강압하는 모습에 따른 경탄과 혐오를 금치 못한다. 고백의 알리바이는 예의 감상적 형이상학인데, 이것은 감상(感傷)이라는 부드러움이 형이상학이라는 딱딱함과 결합함으로써 가능해지는 일종의 현기증이다.
고백은 대화에 견주어 무엇인가 더 '깊고' '중요하고', 더구나 '참된'것을 발설하는 행위라고 여긴다. 이런 소문은 우리처럼 대화 문화가 허약한 데다가 이념과 주술의 언어관이 양극에서 강고하게 잔존해 있는 사회에서는, 급기야 형이상학의 아우라까지 띤다.
그러나 유독 고백 속에 '더 깊고 중요하고 참된 것'이 있다고 믿는 태도는 대체로 우리 삶의 현실과 다르다. 적어도 역사의 교훈을 살피면, 어떤 종류의 '비상한 고백'도 '범상한 대화'보다 그 관계를 건실하게 만들지 못했다. 더구나 대화를 물리치고 개입하는 고백은 그 대화의 실패, 혹은 일상의 무능에 대한 전근대적 알리바이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고백과 사담이 평가 절상되는 만큼 대화의 공론이 평가 절하되는 것은 심층 근대화의 핵심 과제인 '언어적 근대성'을 위해서도 불길하다. 말이 끝난 곳에 침묵이 살아오르듯, 고백도 대화의 끝에서야 비로소 아름다워진당. 나로 말하자면, 타인의 고백에 무관심하며, 고백으로 나를 증거하거나 남을 설득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질투가 없는 연정' 혹은 '그리움이 없는 고독' 처럼 '고백이 없는 삶', 오직 삶이 삶의 전부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삶이 있을 뿐, 대화를 가로막고 틈입하는 고백은 흔히 무능 ·자기 분열 ·미숙한 감상주의이며, 봉건적 형이상학 ·인식론적 특권주의 ·언어위계주의이ㅡ 겉포장이고, 무엇보다 삶에 대한 불성실이며 반칙이다.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