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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섭 (서울시 중랑구 면목3동)
‘비밀 움켜쥔 손’ 흥미 만점
읽을거리와 과학·실용 기사에 인색한 <시사저널>이 인간의 진화를 다룬 ‘인류의 비밀을 움켜쥔 손’[제501호]을 기획한 것은 낯설고도 반가운 일이었다. 기사 내용도 알차고 미술 구성도 깔끔했다. 특히 인간만이 엄지를 가지고 있어 진화의 신비를 창조할 수 있었다는 내용(왼쪽아래 사진)은, 재미와 정보를 두루 전달해 주었다. 그러나 옥에 티도 없지 않았다. 기사 내용 대부분이 존 네이피어 박사의 <손>(한국어판은 <손의 신비>)에 기초한 것 같았는데, 그같은 사실이 본문에만 잠깐 언급되어 의아했다. 그같은 사실을 알려주었더라면, 독자들이 그 책을 통해 더 많은 지식을 섭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주은미 (서울시 서대문구 홍제동)
정보통신부가 시골 우체국에 간 까닭은
제501호 ‘컴퓨터 배우러 우체국 가세’를 읽고 정보화 사회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음을 체감했다. 특히 서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우체국이 지역 정보화에 앞장서고 있어 반가웠다. 한국 사회는 IMF 체제를 맞아 말로는 환골탈태를 부르짖고 있으나, 말해 비해 실천은 미흡한 편이다. 기득권층은 자신들이 누리는 특혜를 잃지 않으려 애쓰고, 재벌들은 되도록이면 구조 조정이라는 소나기를 적게 맞으려고 꾀를 부리고 있다. 이런 와중에 정보통신부가 소외되고 있는 농어촌 지역에까지 컴퓨터를 통한 정보 활용법을 가르치고 있다니 정말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지배하게 될 것은 전자 상거래와 인터넷이다. 만약 21세기 들어서도 그것들을 활용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사회적·문화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다. 정보통신부가 노력과 지원을 좀더 쏟아부어 ‘컴맹’과 ‘기계痴’를 더 많이 구제해 주기 바란다.
강선화 (부산시 동래구 온천3동)
불필요한 ‘곁다리글’ 잘 꼬집어
문화 비평 ‘불순한 곁다리글이 넘친다’[제501호]는 독자들이 가려워하는 부분을 잘 긁어 주었다. 예전부터 책을 구입할 때마다 저자 사진과 화려한 이력을 보며 메스꺼움을 느꼈었다. 얼굴이 좀 예쁜 어떤 여류 작가는 책 광고에 자신의 얼굴을 대대적으로 이용해, 이 여자가 작가인지 모델인지 구분이 안 가게 하기도 했다. 사실 책을 읽는 독자에게 저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필자의 고향·이력·사상도 알 필요가 없다. 작가의 글에 모든 것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의 화려한 경력을 이용해 독자를 한 사람이라도 더 끌어 모으려는 작가가 있다면 그는 글 쓰기를 중단해야 한다. 출판사들도 마찬가지이다. 작가의 화려한 이력에 기대어 책을 더 팔아 보겠다는 출판사가 있다면 하루빨리 문을 닫아야 한다.
정희원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부흥동)
‘햇볕’, 탈북자에게 먼저 비추자
중국 국경 도시를 떠도는 탈북자들의 육필 수기를 다룬 ‘이 지옥에서 언제면 벗어날 수 있갔습네까?’[제501호]를 읽고, 불쌍한 것이 ‘북한이 아니라, 힘 없이 죽어가는 북한 동포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꽃제비가 되는 어린 동포가 있고, 매음굴로 흘러드는 처녀 동포들이 있다는 것은 민족의 아픔이자 수치이다. 당국은 햇볕 정책도 중요하지만, 탈북자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우선 강구해야 한다. 탈북자 문제를 더 방치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조금 덜 먹고 덜 쓰더라도, 그들을 감싸고 보듬어 주어야 한다. 한국에서는 지금 너무 많이 먹어 비만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북한 동포들의 생활은 어떠한가. 이제 좀더 진지하게 북한 동포를 생각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곽은영 (서울시 금천구 시흥1동)
‘고집 센 여성주의’에 동의 못해
제500호 문화 비평 ‘한국의 힘은 남근의 힘인가’에서 주장하는 내용 가운데 잘 납득이 가지 부분이 있었다. 우선 필자는 ‘과속은 가정 파괴’라는 현수막을 보면서 불만을 느꼈다. 즉 과속이 어째서 가정만 파괴하냐고 묻는다. 즉 ‘독신 여자와 독신 남자의 목숨은 목숨이 아니라는 말인가?’ 하고 불만을 털어놓는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과속은 가정 파괴’라는 현수막의 의미는 좀더 폭넓게 파악해야 한다. 과속은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행위이고, 이 행위는 개인의 생명 파괴에 그치지 않고 곧바로 가정 파괴로 이어진다. 현수막은 바로 그같은 위험성을 경고한 것이지, 가정 파괴가 개인 생명 파괴보다 우선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더군다나 독신 남녀의 생명 역시, 그들도 분명 누군가의 자식이며 형제·자매이므로 가정 파괴로 이어진다는 의미로 파악하는 것이 옳다. 독신 남녀를 무시한다는 주장은 좀 터무니없는 의견 같다. 그리고 필자는 1930년대 화중선이라는 기생이 <기생 생활도 신성하다면 신성합니다>라는 글을 통해, 현모양처를 배출하는 학교의 교장을 가리켜 ‘살인자’라고 했다고 밝히고 있다. 필자는 그것에 대해 ‘혼인과 가정이란 여성을 노예처럼 묶는 현장이기도 한데 거기에 들어가 잘 견디라고 교육하는 사람이 진정한 교육자일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라고 설명했다. 이 주장은 전체 문맥상 일관성이 없다. 그리고 결혼 생활이 족쇄라면 비단 여성에게만 그런 것은 아니다. 남성도 마찬가지이다. 필자의 주장은 서로 많은 불평등을 감수하며 두 남녀가 한 가정을 이루어내는 그 수고로움을 일시에 하찮게 만드는 내용이다. 사실 같은 여성으로서 이런 여성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을 보면 마치 ‘다른 부류의 여성들’ 같아 위화감만 든다.
김인아 (서울시 도봉구 창1동 주공아파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