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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수의 난> 완성한 박광수 감독/역사적 사건 탈피, 주위 사람에 시선 돌릴 듯

‘황소 걸음을 걷는 작가 ’박광수 감독(44)이 4년 만에 신작을 내놓았다. 신인 감독이 충무로의 주류를 형성한 지금, 중견 감독의 행보는 각별한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 박감독은 15년 전부터 염두에 두었던 <이재수의 난>을 끝내고 숨을 돌리고 있었다.

<이재수의 난>(아래 상자 기사 참조)이 그의 작업에서 분기점이 될 것이라는 추측이 무성했다. 그 자신도 이를 예감하고 있었다. “이제 만들고 싶은 영화보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들겠다.” 하지만 그는 욕망의 분열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가 그동안 역사적으로 굵직한 사건에 관심을 두었다면 이제는 당대, 주위 사람들에게 더 눈길을 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할 뿐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이재수의 난>은 오히려 박광수 스타일을 끝까지 밀고 갔다는 평을 들었다. 널리 알려지지 않은 백년 전 민란에 관심을 돌린 것부터가 그렇다. 또 이야기는 불친절하고, 형식은 탐미적일 정도로 새로운 ‘그림’을 찾는 데 골몰했다. 비판적 리얼리즘을 추구하면서도 이미지에 깊이 빠져드는 것이 그의 특징이라면, <이재수의 난>은 둘 사이의 긴장이 극도로 증폭된 작품이다. 그 긴장이 흥미를 자아낼지 작품의 와해로 이어질지는 관객이 판단할 일이다. 다만 후반 작업에 각별히 공을 들여 한국 영화에서는 좀처럼 즐기기 어려운 ‘때깔’과 소리를 빚어낸 것은 눈에 띄는 성과로 꼽을 만하다.

프랑스 국립영화센터가 백만 프랑 지원해

돌아보면 그의 길은 두 가지 점에서 새로웠다. 주류 영화에 정치적 소재를 끌어들인 것과, 어려운 여건을 헤쳐온 남다른 제작 방식이 그것이다. 그는 주위 사람들이 만들기 어렵다며 손사래친 영화만 만들었다. 비슷한 시기에 출발한 동료와 선배들이 변신을 위해 앞으로 달음질칠 때, 박감독은 우직하다 싶을 만큼 자기 자리를 지켰다. 서울의 주변인인 페인트공(<칠수와 만수>), 탄광촌에 위장 취업한 운동권 (<그들도 우리처럼>), 혹은 70년대 분신한 노동자(<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들을 스크린에 불러냈다. 그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정치적인 영화’에 매달렸다. 이제 그의 눈길은 백년 전 민란을 주도했던 한 젊은이에게까지 미쳤다.

그가 4년 동안 <이재수의 난>을 준비하면서도 확신을 잃지 않았던 데는, 험난한 과정을 헤쳐온 자신에 대한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다. 초기작 <칠수와 만수> <그들도 우리처럼>은 검열을 통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이유,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제작비 때문에 몹시 시달렸다. 그러나 일단 걷기 시작했고, 걷다 보니 길이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뛰어난 전략가이기도 했다. 한 예로 <그들도 우리처럼>은, 올림픽 행사 기간에 맞추어 심의를 신청했다. 자칫 잡음이 새어 나왔다가는 ‘영화를 검열하는 나라’로 지목되어 국제적으로 망신당하리라는 것을 염두에 둔 전략이었다. 이 작품은 비록 흥행은 부진했지만(서울 6만 명으로 그의 작품 가운데 최악이었다), 낭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상과 연기상을 받아 보상을 받았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만들 때에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애를 먹었다. ‘지금 왜 전태일이냐, 누가 그런 영화를 보겠느냐.’ 제작진은 국민 모금을 제안했고, 기부자가 몰렸다. 그 정도 관심이면 극장에서도 외면 받지 않으리라는 계산에서였는지 대기업도 비디오 판권을 사겠다고 나섰다.

<이재수의 난>은 더욱 어려웠다. 스펙터클한 시대극을 만들려면 제작비 규모가 커지므로 선뜻 돈을 대겠다는 곳이 없었다. 그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그들도 우리처럼>이 영국의 텔레비전 방송국 ‘채널 4’로부터 제작 지원을 받은 선례가 있고, 또 이 작품에 대한 평이 좋았던 데 착안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시나리오와 캐스트 진용을 꾸린 그는 프랑스 영화사 롭세르 바투와르와 합작을 성사시켰고, 그 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작업을 함께 했던 프로듀서 유인택씨와 손잡았다. 올 3월에는 프랑스 국립영화센터(CNC)로부터 백만 프랑을 지원받기도 했다. 국립영화센터는 매년 해외 영화 가운데 두 편을 골라 지원하는데, 올해에는 이란의 키아로스타미와 박감독이 뽑혔다.

바깥으로부터 수혈이 있었다고 해도 순제작비가 32억원에 이르는 것은, 제작자로서는 이만저만한 부담이 아니다. 그렇다고 관객을 겨냥한 흥행 영화도 아니어서 뚜껑을 열었을 때의 결과를 장담하기 어렵다. 더구나 이 작품은 ‘후광 효과’ 없이 맨몸으로 나서야 한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사회적인 사건으로 자리매김되면서 관심이 증폭된 것에 비해, <이재수의 난>은 작품 자체가 주목될 수밖에 없다.“두려운 마음 때문에 <이재수의 난> 아직 못봤다”

<이재수의 난>은 촬영 현장에서 몇 가지 실험을 했다. 작품의 설계도를 미리 그리되, 그에 구애되지 않기로 한 것이다. 현장에 도착해서 스태프와 연기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참여를 유도했다. 대사는 물론 에피소드까지 새로 만들어내라고 주문한 것이었다. “모두에게 귀찮은 일이었다. 하지만 어제 (책상 머리에서) 생각한 것과 현장의 느낌이 같을 수 있겠는가. 처음에 곤혹스러워하던 배우들도 나중에는 열성을 보였다.”

그는 아직까지 <이재수의 난>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첫 시사 때 극장에 기술적인 문제가 생겨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감정의 흐름이 끊겼고, 이제는 두려운 마음이 들어 차마 보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나는 작품평을 잘 읽지 않는다. 내 영화의 허점을 내가 가장 잘 안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의 눈이 두려운 것이다. 더구나 지금까지와는 다른 실험을 해보고 싶다는 결심을 한 터여서, <이재수의 난>은 그의 작품 연보에서 1부를 마감하는 작품이 된다. 2부가 가능할지가 이 작품에 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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