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북한 “비전향 장기수 송환하면 남북 관계 풀린다” 공언

장기수 송환을 상호주의에 입각해 처리해야 한다는 국민 여론이나 일부 보수 세력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무엇보다 1993년 3월12일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씨를 북송한 뒤의 여진이 아직도 작용하고 있다. 또한 우리가 장기수를 보내는 대신, 북한도 국군 포로나 납북자를 보내는 성의를 보여야 한다는 주장 역시 일견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이인모씨를 무조건 송환했던 데 비해, 북한은 핵확산방지조약(NPT) 탈퇴로 보답했다는 보수 언론의 단골 레퍼토리는 상당 부분 진실을 왜곡한 측면이 있다. 이인모 씨 송환이나 다음날 결행된 북한의 핵확산방지조약 탈퇴 조처는 우연히 시기가 일치했을 뿐, 사실 그 전 해인 1992년 하반기부터 핵 사찰을 둘러싸고 미국과 벌여온 신경전의 연장선에서 취해진 조처로 보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국군 포로나 납북자와 맞바꾸어야 한다는 주장 역시 꼼꼼히 따져 보면 여러 가지 맹점이 드러난다. 여기에는 비전향 장기수와 국군 포로 및 납북자 간의 법리적 위상 차이가 문제로 지적된다.

현재 북한이 송환을 요구하는 비전향 장기수는 한국전쟁 포로 출신인 함세환·김인서·김영태 씨 세 사람을 제외하면 모두 60∼70년대 북측이 남파한 공작원이다. 민가협 등 시민단체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남파 공작원 중 비전향 출소한 사람의 수는 약 80명이다. 이들 중 송환 대상으로 거론할 수 있는 사람들은 북한이 고향이거나 북에 가족을 두고 있어 본인이 돌아가기를 희망하는 사람들로, 그 수가 40여명이다.

사실 북한은 1998년까지만 해도 전쟁 포로 출신 세 사람 외에 이들 남파 공작원 출신 장기수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해 왔다. 민가협 관계자에 따르면, 1998년 북한을 방문한 리영희 한양대 교수가 `간첩을 보내놓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북측의 이율배반적 태도를 질타한 것이 계기가 되어 북측의 입장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실 관계 확인은 어렵지만 북측이 지난해 2월23일 남측 적십자사에 보낸 공개 서한에서 처음으로 이들 남파 공작원 출신 17명에 대해서도 송환을 요구한 것을 보면, 이런 주장에 어느 정도 개연성은 있어 보인다.

비전향 장기수의 법적 성격을 이런 방식으로 구분해 놓고 보면 상호주의 주장이 안고 있는 맹점이 저절로 드러난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우리 정부 역시 ‘공작원 북파’ 사실을 인정하고, 북한 내에 이들이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단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북파 공작원’의 존재에 대해 정부는 아직까지 공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남파 공작원 출신 비전향 장기수와 국군 포로를 맞교환하자는 주장은 서로의 법적 신분이 다를 뿐 아니라 국제법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국제법적으로 볼 때 한국전쟁 당시 남북의 포로 문제는 정전 협정에 따라 설립되었던 ‘중립국 포로 송환 위원회’가 1954년 2월1일 소정의 임무를 마치고 해체된 시점을 계기로 이미 종결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전후 처리 과정을 무시하고 우리가 국군 포로 송환을 요구할 경우 북한 역시 우리가 당시 정전 협정을 위반한 채 일방적으로 석방한 반공 포로를 송환하라고 요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자신의 의사에 반해 북에 남게 된 국군 포로나 납북자 문제가 안고 있는 인도적 측면을 무시할 수는 없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먼저 물꼬를 틀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아태재단 한운석 책임연구위원은 이와 관련해 “과거 동·서독 관계에서 서독의 정책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당시 서독은 먼저 동독과 관계를 긴밀하게 해놓은 후에, 즉 동독이 서독의 요구를 거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을 때 인도적 문제를 하나씩 제기함으로써 실질적 효과를 보았다는 것이다.

북측은 이미 지난해 2월 우리 적십자사에 보낸 서한에서 남측이 먼저 무조건 송환 조처를 단행하면 ‘얼어붙은 북남 관계를 풀고 폭넓은 대화와 접촉의 문을 열어나갈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다. 북측이 이같은 약속을 지킬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지만, 국군 포로나 납북자 문제를 풀기 위해서라도 상호주의를 고집하기보다는 조건 없는 송환 조처가 훨씬 효과도 빠르고 가능성도 높은 길이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시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