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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사회의 온정 ‘밀물’…미국도 ‘인간의 얼굴을 한 대북 정책’ 펼 가능성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가 1986년 4월26일 발생한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에 빚지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체르노빌 사고는 옛 소련의 원전 관리의 허술함뿐 아니라 체제의 여러 모순을 압축해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옛 소련 사회의 극심한 비밀주의·정보 조작·관료 주의·무사안일주의 그리고 인명 경시 풍토가 뒤엉켜 있었다.
‘앙시앙 레짐’(구체제)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 때 고르바초프가 대개혁의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동과 서를 막론하고 세계가 보여준 온정의 물결 덕분이었다. 처참한 대사건의 이면에서 드러난 인간 생존의 처절한 모습 앞에서 이념과 체제는 무력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강력한 외교적 자본(캐피탈)’이라는 ‘휴머니즘(온정)’의 물결이 철의 장막을 열었던 것이다.
닷새 간의 중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던 김정일 위원장의 등 뒤에서 터진 ‘룡천 대폭발 사고’는 그래서 북한의 미래를 전망하는 데 심상치 않은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돌이켜 보면 북한은 여태까지 세계로부터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왔다. 국제 사회는 북한을 냉랭하게 바라보았고, 북한이 사고를 치면 자국의 이익을 계산하기에 바빴다. 북한이 진짜 하고 싶은 말에는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았다. ‘우리도 당신들처럼 안전하게 살고 싶고, 잘 먹고 잘살고 싶다’는 그들의 희망은 강대국의 패권놀음 앞에서 무참히 짓밟혀야 했다.
지금까지 국제 정치와 외교, 즉 하드 파워가 북한을 대할 때 거기에는 ‘인간의 얼굴’이 없었다. 일부 비정부기구(NGO)를 제외하면 굶어가는 북한 주민에 대한 온정은 없었다. 그럼으로써 북한 위정자들은 더욱 강퍅해졌고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이벤트’ 찾기에 골몰했다. 오늘날 북한 핵 문제라고 불리는 세계적 이벤트의 본질 역시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북·중 ‘핵 조율’ 후 사고 터져 불행 중 다행
체르노빌에서 그랬던 것처럼 북한 룡천에 대해서도 강대국의 하드 파워는 ‘인간의 얼굴’을 하고 나설까? ‘비정하고 냉혹한 대북 정책’이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한 대북 정책’이 등장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경과를 보면 고무적이다. 4월22일 낮 12시10분 사고 발생 이후 북한이 신속하게 국제 사회에 보고하고 지원을 요청한 이래, 실로 오랜만에 국제 사회로부터 온정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 등 북한의 동맹국은 물론이고 유럽연합(EU)에 이어 미국과 일본이 뒤따를 채비를 하고 있다.
냉혹한 국제 질서 속에서 핏줄로서의 애틋함을 유지해온 한국이 정부와 민간을 막론하고 이 대열의 선두에 서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 사회에서 반북 세력의 보루를 자처해온 한나라당마저 이 대열에 동참했다는 사실은 룡천 폭발 사고의 의미를 새삼 들여다보게 한다.
김정일 위원장이 룡천 사고 직전에 중국 지도자들과 핵 문제를 조율한 것은 그야말로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다. ‘6자 회담에 참여해 핵 문제를 융통성 있게 풀어가겠다’는 김위원장의 메시지가 세계에 타전된 직후 룡천 사건이 터짐으로써 이 비극이 북한에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가능성이 더욱 커진 것이다.
북한은 늘 핵을 포기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왔다. 그러나 ‘마지막 자위 수단인 핵을 내려놨는데도 미국이 적대 정책을 유지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가 북한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김위원장의 방중 전 북·중 양국이 공동으로 펼친 외교 게임의 핵심도 이것이었다.
북·중 양국은 리자오싱 외교부장이 방북했을 때 이미 ‘북한은 핵을 포기하고 중국은 식량·에너지와 신의주특구를 지원한다’는 빅딜안을 마련했다(<시사저널> 제756호 참조). 그러나 미국에는 헷갈리는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최근 확인되었다. 북한 유엔대표부가 미국측에 ‘미국이 대북 적대 정책을 포기하면 북한도 핵을 포기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더 이상 6자 회담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고 핵 억지력 강화로 나갈 것이다’고 치고 나갔다. 이를 ‘급보’로 해석한 미국이 중국에 조회했으나 중국 역시 능청을 떨었다.
네오콘 수장 체니 “중국의 북한 지원 OK”
북한이 6자 회담을 깨고 핵 억지력 강화로 나가면 그렇지 않아도 이라크 문제로 궁지에 빠진 부시에게는 ‘재앙’이다. 무모한 이라크 전쟁을 감행해 부시의 눈 밖에 난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수장 체니 부통령이 몸소 해결사로 나설 정도로 부시 진영은 다급했다.
체니는 지난 4월 중순 중국을 방문해 중국 지도부에 “북한이 6자 회담을 깨고 핵 억지력 강화로 나가면 미국도 군사적 대응 외에는 선택할 여지가 없다. 또한 일본의 핵무장을 막을 명분도 없다. 중국이 책임지고 북한을 설득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해 중국은 북한을 설득하려면 북한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고, 체니는 그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이 북한에 제공하기로 한 식량·에너지 및 신의주특구 지원에 대해 네오콘의 수장 체니가 ‘오케이 사인’을 보낸 것이다.
체니와 중국 지도부 간에 거래가 ‘성립’된 사실을 확인한 김정일 위원장은 예정했던 방중 일정을 앞당겼다. 그리고는 중국의 경제 지원과 안보 지원을 기정사실화했다.
미국 국무부를 포함한 국제 사회가 북한에 대해 인간적으로 접근하려 할 때마다 제동 장치 구실을 한 것이 미국의 네오콘이고, 그 핵심 인물이 체니였다. 체니가 비로소 대북 지원에 대해 방향을 선회한 직후 룡천 사고가 터졌다. 그리고 국제 사회의 온정이 북한에 이어지고 있다. 미국도 이제는 ‘제국주의의 냉혹함’이라는 마스크를 벗고 ‘미국식 박애주의’라는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비명에 간 수백의 넋이 북한의 미래, 나아가 한반도와 동북아의 미래를 밝히고 있다.